순백의 성소, 그리고 푸른 공명
아로스와 시즈는 새벽 어스름 속에서 신전을 향해 길을 나섰다. 여명이 밝아오면서 마력에 물든 하늘은 히드니스 산맥의 중심으로 향하는 길 위로 환상적인 색채를 드리우기 시작했다.
산맥이 가까워질수록 아텐시아의 마력은 더욱 짙어지자, 그 영향은 대기 전반에 스며들어 세상을 다른 결로 물들이기 시작했다. 푸른 대기층 너머로 솟아오르는 태양은 그 본모습을 감춘 채 흐릿한 윤광만을 흘려보냈다. 금빛과 주홍빛으로 번지던 햇살은 어느새 연보랏빛과 초록빛의 물결로 바뀌었고, 하늘 위로 드리운 푸른 오로라는 은은하게 퍼지며 춤을 추고 있었다.
창은의 강을 따라 수없이 맞이했던 여명은 이미 익숙한 풍경이었지만 이날만큼은 달랐다. 오늘의 여명은 두 사람이 지나온 모든 날들 위에 덧그려진 듯한 아름다움이었다. 빛의 물결은 하늘을 가로지르며 천천히 퍼져 나갔고, 멀리 솟은 산맥의 윤곽은 그 오로라 속에서 마치 신의 기척처럼 신성하게 떠올랐다. 청록빛으로 번지는 아우라가 두 사람의 발아래를 감싸면서 이 길을 걷는 존재들을 조용히 반기는 듯했다.
길이 깊어질수록 주변에는 방책과 함께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규칙적인 간격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그들의 갑옷은 마력의 빛을 받아 은은히 빛났고, 흉갑 위에 새겨진 용의 문양은 이들이 아텐시아의 신전을 수호하는 자들이라는 것을 명확히 드러냈다. 기사들은 다가오는 두 사람을 묵묵히 바라보다 조용한 목례로 인사를 건네자 시즈와 아로스 역시 고개를 숙이며 지나쳤다. 그들의 태도는 결코 위협적이지 않았지만 침묵 속에는 누구도 꺾을 수 없는 의지와 단련된 사명의식이 배어 있었다.
신전이 가까워질수록 공기 중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이 짙게 깔려 있었다. 피부에 닿는 마법의 감촉은 뻗어나가는 숨결처럼 부드러웠으나 아로스는 문득 옆을 바라보며 낯선 이질감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 모습에 시즈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텐시아께서 남기신 마법진이에요. 이 신전은 그분의 손길이 머문 마지막 신성의 영역이자, 허락받지 못한 자들에게 있어서는 함정인 곳이죠. 그 뜻을 거스른 존재는 이곳을 무사히 지나갈 수 없답니다."
이윽고 신전이 자리한 산기슭에 도달했을 때, 풍경은 한층 압도적인 장관으로 바뀌었다. 하늘 높이 치솟은 산맥 사이로 하얗게 깎인 절벽을 등지고 선 신전은 순백의 대리석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외벽은 눈부시도록 깨끗했고, 표면에는 먼지 한 점 없이 정제된 결이 고스란히 살아 있었으며, 신전 주위를 감도는 마력의 푸른 기운이 그 존재를 더욱 돋보이게 하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거대한 문이 천천히 열리면서 그 너머로 장엄한 회랑이 모습을 드러냈다. 용의 형상이 정교하게 조각된 높고 묵직한 기둥들이 늘어서 있었고, 빛은 그 기둥 사이를 천천히 흐르듯 비췄다. 회랑 끝에는 신전 바깥을 조망할 수 있는 노대가 놓여 있었다. 좌측에는 천천히 상승하는 승강기가, 우측에는 여명의 성당으로 이어지는 입구가 자리하고 있었다.
내부는 숨죽인 듯 고요했다. 가볍지 않은 긴장감이 가라앉아있는 그 정적은 걸음을 옮기는 이들의 마음에까지 자연스레 경건함을 일으켰다.
"이상하리만큼 조용하군요."
아로스가 회랑을 바라보며 낮게 말했다.
"지금은 여명의 성당에서 기도를 드리는 시간이에요. 특히, 이 시간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엄숙하죠."
시즈는 조용히 대답하며 그의 곁을 나란히 걸었다.
두 사람이 회랑의 중앙을 지나칠 무렵, 안쪽에서 한 무녀가 조용히 모습을 드러냈다. 수수한 의복에 몸을 감싼 그녀는 단숨에 시선을 끌었다. 명치까지 내려오는 목걸이가 그 신비를 더욱 강조하고 있었고, 목걸이 끝의 증표에는 초승달과 태양, 교차된 두 기둥이 어우러진 독특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그녀의 얼굴을 반쯤 가린 기묘한 가면이었다. 백색 머리카락으로 반쯤 가려진 그 가면은 목걸이의 문양과 같은 형상이 새겨져 있었다. 가면 아래로 드러난 표정은 조용하고 온화했으나 눈빛에는 앳됨 대신 차분한 연륜이 깃들어 있었고, 결코 쉽게 다가설 수 없는 기운을 머금고 있었다.
무녀는 걸음을 멈추며 다가오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한동안 시즈에게서 떨어지지 않은 시선 아래의 표정에는 억눌린 감정이 고요히 번지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위험한 땅으로 떠났던 아이를 바라보는 걱정과 안도, 그리고 지금 다시 마주한 기쁨이 한데 섞인 눈빛이었다. 말이 없었기에 더 선명하게 드러나는 감정들이 고요한 성전의 기운 위로 서서히 피어올랐다.
시즈와 무녀는 서로를 향해 조용히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나누었다.
"율리아님을 뵙습니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무녀는 앞으로 성큼 다가와 시즈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 품은 놀라울 만큼 따뜻했다.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안은 채 품에 담긴 체온으로만 오랜 시간을 건넸다. 시즈는 잠시 멈칫했지만, 이내 천천히 팔을 들어 무녀를 안았다. 긴 여정을 견뎌낸 몸과 마음이 조용히 풀려나갔다.
"......보고 싶었어요...!"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온 속삭임은 금방이라도 눈물로 번질 듯 떨려 있었다. 율리아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다만 그 등을 한 번 더 감싸 쥐며, 오래도록 그대로 시즈를 품었다. 시즈의 등을 천천히 토닥이다가 이내 조용히 팔을 풀은 그녀는 이내 아로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환시를 품은 이여."
율리아는 한 손을 가슴에 얹고,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이곳 아우로라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당신의 이야기는 이미 이곳까지 전해졌습니다. 무엇보다도, 저희의 어린 신도를 지켜주신 것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그녀는 우리 모두에게 소중하기에, 당신의 헌신이 없었다면 이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로스는 예상치 못한 무녀의 존중 어린 태도에 잠시 놀란 듯했으나, 곧 고개를 숙이며 말없이 인사했다.
율리아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분께서 이 먼 길을 무사히 오셨다는 것만으로도 큰 위안이 됩니다. 지고의 신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신전의 최상층에서 그분을 뵐 수 있을 것입니다."
말끝을 정돈한 그녀는 몸을 돌려 손짓으로 두 사람을 이끌었다. 조용히 발걸음을 옮긴 그들은 회랑을 지나, 좌측에 자리한 승강기 앞으로 향했다.
대리석과 금속으로 이루어진 승강기 중앙에는 용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고, 그 앞에는 한 명의 기사가 말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율리아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기사는 손에 쥔 레버를 조작했다. 철제 장치가 은은한 마찰음을 내며 부드럽게 작동했고, 승강기가 천천히 상승하기 시작했다.
승강기가 움직이자 천장 깊숙한 곳에서 커다란 수정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희미한 푸른빛이 퍼져 나가며 내부 공간을 부드럽게 감싸 안는 동시에 빛은 숨을 쉬듯 맥동하며 점점 더 밝아졌다. 승강기 안을 물들인 빛은 탑승한 이들의 표정마저 맑게 밝혔고, 마치 무언가 신성한 의식 속으로 들어서고 있는 듯한 기분을 자아냈다.
율리아는 조용히 승강기의 손잡이를 쥐며 말했다.
"이 수정은 지고신의 기운을 담고 있습니다. 신전을 움직이는 동력이자 우리가 이곳에 설 수 있게 해주는 축복이기도 하죠."
시즈와 아로스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수정에서 느껴지는 묘한 힘을 음미했다. 상부로 진입할수록 푸른빛은 더욱 짙어졌고, 그 감각 너머에는 무언가를 가라앉히는 듯한 정적이 깃들기 시작했다.
잠시 후, 승강기가 부드럽게 멈췄다. 문이 열림과 동시에 고지대 특유의 서늘한 바람이 그들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 바람은 이곳이 단순한 성소가 아닌 신성과 현실의 경계임을 조용히 일깨우는 듯했다.
세 사람이 문을 나서자 앞에는 광대한 공간이 펼쳐졌다. 마치 거대한 동굴처럼 드러난 그 공간의 끝 너머로는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광경이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아우로라 신전의 옥상에서 내려다본 서쪽 대륙은 말문이 막힐 만큼 장엄했다. 높은 고도에서 시야 끝까지 펼쳐지는 지형은 마치 하나의 거대한 지도가 된 듯했고, 멀고도 먼 경계에는 삶과 죽음이 나란히 자리한 듯한 대조가 선명히 드러나 있었다.
남쪽 아래, 지평선 가까이 엘라리모스의 초원이 어렴풋한 푸른빛으로 땅을 물들이고 있었다. 빛의 결에서 느껴지는 색조만으로도 그곳이 여전히 생명을 간직한 땅임을 알 수 있었다. 그에 반해, 리마 산맥 너머 대륙의 중심부로 이어지는 방향에는 전혀 다른 기운이 내려앉아 있었다. 카노르 평원은 흐릿한 윤곽만으로도 그 속의 황량함을 드러냈으며, 어스름한 검은빛이 대지를 드리운 듯 낮게 깔려 있었다. 눈에 잡히지 않음에도 그곳에서 감돌고 있을 공기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등줄기를 스쳐갔다.
산맥 아래의 무너진 신계의 관문은 멀리서도 그 거대한 틀을 드러낸 채 고요한 폐허로 남아 있었다. 그 뒤편의 산맥 저 멀리 솟은 카노라스의 탑은 지금도 하늘을 찌르듯 검은 형체를 드러내고 있었다. 탑은 그저 잊힌 도시의 마지막 조각처럼 멈춰 선 채 침묵하고 있었다.
아로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가 생명과 죽음이 선명하게 갈라진 거대한 대륙의 정적을 바라보는 순간, 옆에서 율리아와 시즈가 허공을 향해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갑자기 공기를 뚫는 거대한 기류가 울렸다. 처음엔 멀리서 들려오는 진동 같았지만 그것은 점차 하늘을 가르는 날개 짓이 되었고, 곧이어 태고의 고룡 아텐시아의 형상이 하늘을 가로지르며 모습을 드러냈다.
첫 만남에서처럼, 그녀는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압도적인 존재감을 내뿜었다. 거대한 날개는 천천히 접히면서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눈동자가 세 사람 위에 머물렀다. 에스트라 가도 앞에서 처음 마주했을 때와 같이 공기 전체가 잠시 멈춘 듯한 적막에 휩싸였다.
「새벽의 빛이 너희를 이끌었구나. 언제나 떠오르는 여명이 어둠을 거두듯, 오늘도 너희 세 사람의 앞길이 환히 밝혀지기를 바란다.」
부드럽지만 깊은 울림이 세 사람의 내면으로 깊이 파고들었다. 아침 인사를 마친 아텐시아의 시선이 천천히 시즈와 아로스에게 머물렀다.
「너희의 여정이 결코 쉬운 길이 아니었음을 알고 있다. 나는 하늘과 대지를 통해 세상의 흐름을 바라보았으나 지금의 나는 과거처럼 모든 것을 꿰뚫을 수 없다. 엘나가 사라진 이후로 나의 시선은 점점 흐려지고 있다. 그러니 너희가 본 것과 겪은 것을 내게 말해 다오. 내가 알고 있는 것들과 아울러, 너희에게 필요한 길을 비춰줄 수 있기를 바란다. 그 도정(道程)은 단지 두 사람의 것이 아닌 많은 이들의 미래가 달려 있다.」
아텐시아의 말은 단순한 호기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이 놓친 것을 되찾고, 이들을 향한 지침을 완성하기 위한 태고의 존재가 감당해 온 책임감 그 자체였다. 그녀는 여전히 고룡으로서 모든 것을 통찰하고자 했으나 더 이상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었다.
푸른 눈동자는 조용히 시즈와 아로스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들 마음 깊은 곳의 결심과 망설임, 상처의 결을 꿰뚫듯 한 치의 흔들림 없이 머물렀다.
시즈는 천천히 걸음을 내디뎌 아텐시아 앞에 섰다. 말은 없었지만 공기엔 알 수 없는 긴장과 정적이 서려 있었다. 그러나 이내 둘 사이로 부드러운 빛이 퍼지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아우라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푸른빛은 물결처럼 퍼졌고, 그 결은 조용히 시즈의 몸을 감쌌다.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아무 말 없이 마주 섰다. 그들 사이에 오간 것은 말이 아닌 감각이었고, 시선과 아우라만으로도 수많은 이해가 오갔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아로스는 율리아 곁으로 조용히 다가와 낮게 물었다.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겁니까?"
율리아는 표정변화 없이 답했다.
"공명입니다. 아텐시아께서 자매님과 마음을 잇고 계신 거죠. 우리가 보기에는 아무 일도 없는 듯 보일지 몰라도, 지금 둘 사이에서는 아주 깊은 대화가 오가고 있을 겁니다."
아로스는 율리아의 말을 되새기며 다시 두 존재를 바라보았다. 푸른 아우라는 시즈와 아텐시아 사이를 감싸며 점점 더 짙어졌고, 어느 순간 그 흐름이 아로스에게도 미세하게 다가왔다.
처음 느껴보는 감각이었다. 마치 그의 기억 속 깊은 곳을 누군가 조용히 들여다보는 듯했지만, 강제적인 침입이 아닌 내면이 스스로 열리는 듯한 이상한 이질감이었다. 기억의 층위들이 낱낱이 파헤쳐지는 것이 아니라 정제된 설명처럼 차분히 그녀 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잠시 뒤, 공명이 끝난 아텐시아가 시선을 들어 신전의 천장을 바라보자, 그녀의 의지가 파문처럼 퍼지면서 세 사람의 의식을 조용히 채워갔다.
「파도의 악마들의 기세는 여전하며... 공허의 신도들의 움직임이 심상치가 않다. 그들의 움직임이 날이 갈수록 대담해지는구나.」
시즈는 천천히 고개를 들며 진중하게 물었다.
"지고의 존재시여. 이 안개의 땅에서... 아우로라의 자매님들이 사라지는 이유를 알고 계십니까?"
「공허의 신도를 이끄는 수장이 무언가를 꾸미고 있는 듯하구나. 나의 권속들이 이유 없이 사라지는 것은 예삿일이 아니다. 공허의 수장은 실체를 드러낸 적이 없는 비밀스러운 인물이기에 나 또한 그 의중을 헤아리기는 어렵다.」
아텐시아는 시선을 저 멀리 신전 밖으로 돌렸다. 그 눈동자에는 오랜 세월 동안 축적된 염려와 조용한 분노가 동시에 어른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