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창한 고백이나 다짐 없이도
아, 내 마지막 사랑인가보다.
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있었다.
마지막 연애인가보다, 라고 생각했다는게
더 맞는 표현일 수도 있겠다.
직장 상사였던 그는
그무렵 엉망진창 상처투성이인 채로 방황하던 내가
어느 날 친한 사람들과 술을 마시다가 억울한 마음에
엉엉 울자,
다른 사람들은 각자의 조언과 위로를 해주기 바쁜데
아무 말도 없이 일어서서 나가더니
커다란 사탕을 사서 건네주었다.
"저 단 거 싫어하는데... 제가 일곱살도 아니고 무슨 운다고 사탕을 줘요."
"그러게요. 왜 일곱살도 아닌데 엉엉 울고 그래요."
사탕은 먹지 않았지만, 눈물은 멈췄다.
그 해 내 생일날 그는 우리 집 앞에서 주춤주춤
고백을 했고,
연애가 시작됐다.
나는 때때로 뾰족하고 나약하고 냉소적이었고,
그는 한결같이 넓고 단단하고 따뜻했다.
서로 웃기기 바빠하면서
사이좋게 잘 지내다가도
핀트가 조금이라도 나가면
나는 감정적으로 날을 세웠고, 실제로 상처받았다.
상처받기 쉬운 인간이라는 건 정말 피곤한 존재임에도
그러나 그는 쉽게 사과하지도, 함부로 위로하지도 않으며
맞춰나가려고 애썼다.
완벽하게 행복했다거나 로맨틱했다며
그 때의 연애를 부풀려서 말할 생각은 없다.
싸우고, 화해하고, 불평불만하기도 했지만,
그저 그가 묵묵히 그 자리에 있어줌으로 나는 달라졌다.
습관처럼 흔들리던 나도 그를 닮아 좀 편안해졌다.
2년 여의 시간을 거쳐 아무 날도 아니던 어느 날
그는 마치 "밥 뭐 먹을래?"처럼
"올해엔 결혼할까?"라고 말했다.
죽을래? 헤어지고 싶냐?
무릎꿇고 말해. 사정사정해.
울면서 나랑 결혼해달라고 졸라.
받고 싶은 프로포즈를 A4용지에 정리해서 줘
토시 하나 안틀리게 모든 걸 실현 시켜줄게.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린 결혼하지 않았다.
우린 이별했다.
서로가 싫어졌다거나, 서로에게 실망했다거나
결혼하려고보니 본색을 드러냈다거나 하는 이유는 아니었다.
되려 그것보다 훨씬 심플한 문제였다.
그의 부모님이 모종의 이유로 결혼을 반대했다.
절대로 넘을 수 없는 이유는 아니었지만
나는 그 결혼과 함께 그를 포기했다.
헤어짐을 결정한 날 많이 울었다.
나쁜 새끼.
나쁜 새끼.
비겁한 새끼.
울며 불며 이별을 받아들였다.
그 뒤로는 잘 울지 않았다.
친구들이나 선배들이
"너 좀 우는 편이 낫겠다."
라고 말했지만, 나는 울지 않았다.
우리 집 앞에 찾아와 며칠 째 아무 말없이 눈물을 떨어뜨리는 그에게
눈물대신 말했다.
"이렇게해선 어머니에게 효자도 못 돼고, 나한테 좋은 남자도 못 돼.
불효자가 되서 나한테 오는 것도 바라지도 않고, 그렇다고 모르는 척도 못 해줘.
그러니까 헤어지자."
그런데 나는, 당신에게 받은 게 너무 많고,
해준 게 하나도 없어.
해주고 싶었던 게 많았는데,
이렇게 헤어지면 나는 내내
당신에게 못해준 것만 떠오르겠지.
그러니까
그 당시 프리랜서 였던 나는 출장을 간다고 말하고
일주일 치의 짐을 싸서 그의 집으로 갔다.
치열한 이별이 마치 없었던 일인 것처럼
일주일 간의 생활을 시작했다.
그가 출근을 할 때 꼭 안아주며,
오늘도 수고해. 라고 말하고,
그는 점심 꼭 챙겨먹어라며
집 앞의 샌드위치 가게에서
점심과 커피를 사다주고 출근했다.
나는 내 나름의 일을 하다가,
퇴근시간에 맞춰서 장을 보러 나가서 저녁을 해놨다.
할 줄 아는 요리가 별로 없으니
재료만으로도 맛있는 소고기 구이, 전복구이, 닭볶음탕, 파스타 같은 걸 해놓고
맥주를 잔뜩 사놓고 시원하게 냉동실에 넣어놓은 채로
그의 퇴근을 기다렸다.
퇴근하고 나면 영화를 다운받아보면서 웃고,
소소하게 하루에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하고 술을 마셨다.
손을 잡고 집 앞 놀이터로 산책을 나가고,
커피를 사서 동네 한바퀴를 돌며
시덥지 않은 말장난을 했다.
업어달라고 졸라서 돌아오는 길엔 업혀서 돌아오고,
주말엔 동네 만화방에서 만화를 잔뜩 빌려서
치킨과 맥주를 마시며 시간을 보냈다.
주어진 시간이 아깝다거나, 슬프다거나,
하는 생각을 했던 기억은 없다.
숨쉬듯 자연스러운 시간을 보냈다.
대신 친구들과 함께 술을 마신다거나
멀리 외출을 하진 않았다.
권태로운 부부처럼 그저 충실히,
둘만의 시간을 보내고
해주고 싶었던 것들은 해줬다.
약속했던 마지막 날 나를 집 앞에 데려다주고,
트렁크에서 짐을 내려주고는 마주보다가
서로를 한 번 안아주고
"잘지내"라고 길지 않은 인사를 주고받았다.
사실,
그가 정말 잘 지내도 괜찮겠다고 생각하게 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쉽게 휘청거리던 나를 단단하게 붙잡아 매주던 그가
내 삶에서 사라진 후에도
그 단단함을 지키고 싶었다.
필사적으로 상처받지 않으려고
휘청거리지 않으려고 애썼다.
혼자서 조금씩 이별했고,
결국엔 완벽하게 이별했다.
그런 이별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