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검은 것 사이에 섞인 하얀 난방

고요는 과열되고, 밤은 눕는다

by 구시안

두껍게 한 겹 덧칠한 얼굴 보일러가 있다. 얼굴이라는 표면에 난방관이 지나가고, 기억의 밸브를 열면 미지근한 과거가 스팀처럼 분출된다. 따뜻한 방 안에 누워 나는 천장을 보지 않는다. 천장은 이미 접혀서 벽이 되었고, 벽은 스크린이 되어 눈송이들의 움직임을 재생한다. 눈은 떨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이동한다. 흰 픽셀이 검은 픽셀을 침범하고, 검은 픽셀이 다시 흰 픽셀을 삼킨다. 리모컨은 없다. 노크나 벨소리는 없다. 초인종의 신경은 절단되어 있고, 문은 문이라는 개념만 남긴 채 사라졌다.


밤은 고요한 검은 것들의 집합이다. 그 사이에 하얀 것이 섞인다. 하얀 것은 순수하지 않다. 하얀 것은 단지 대비일 뿐이다. 대비는 의미를 낳고, 의미는 중독을 낳는다. 얼굴 보일러는 과열된다. 이마에서 사막의 지도가 피어나고, 눈꺼풀 아래에서 낮의 잔해들이 컷업되어 재조합된다. 뉴스의 단어, 약국의 냄새, 지하철의 진동, 이름 모를 약의 색깔. 모든 것이 잘게 썰려 같은 팬에 던져진다. 볶아진다. 타닥타닥. 의식의 프라이팬 위에서 문장들이 튄다.


나는 누워 있다. 그러나 누워 있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중력의 방향이 바뀌었다는 점이다. 생각은 바닥으로 떨어지지 않고 벽으로 흐른다. 벽에서 다시 천장으로 역류한다. 눈송이는 그 흐름의 표식이다. 하나가 멈추면 시간도 멈춘다. 둘이 겹치면 다른 밤이 열린다. 그 밤에는 이름이 없다. 그 밤에서는 나의 이름도 작동하지 않는다. 신분증은 녹아내리고, 얼굴 보일러의 열은 모든 표정을 평평하게 만든다.


지금 바로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가 되어
멤버십 특별 연재 콘텐츠를 모두 만나 보세요.

brunch membership
구시안작가님의 멤버십을 시작해 보세요!

말하지 못한 감정과 쉽게 합의된 문장들 사이를 기록합니다. 빠른 공감보다 오래 남는 문장을 쓰고자 합니다. 내면을 중요시 여기며 글을 씁니다. 브런치 71일째 거주중입니다.

500 구독자

오직 멤버십 구독자만 볼 수 있는,
이 작가의 특별 연재 콘텐츠

  • 최근 30일간 225개의 멤버십 콘텐츠 발행
  • 총 417개의 혜택 콘텐츠
최신 발행글 더보기
이전 02화무방비도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