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의 방

어둠 밝음 사이에서

by 구시안

잉마르 베리만의 영화 속 장면들이 떠올랐다. 이유는 없다. 늘 그렇다. 인생에서 중요한 것들은 설명 없이 튀어나온다. 흑백의 얼굴들, 너무 오래 침묵해서 말보다 더 많은 걸 말해버린 눈들. 신은 거기 없고, 대신 질문만 남아 있다. 질문은 술값처럼 늘 계산서에 찍혀 나온다. 도망칠 수 없다. 나는 소파에 몸을 던지고 담배를 찾는다. 담배는 늘 그 자리에 있다. 신보다 성실하다.


베리만의 사람들은 늘 서로를 똑바로 보지 않는다. 보고 있지만 닿지 않는다. 그게 꼭 우리 같아서 웃음이 난다. 웃기지만 웃지 않는다. 웃을 기운은 오래전에 다 써버렸다. 삶이라는 게 원래 그렇다. 처음엔 다들 연극인 줄 알고 들어왔다가, 나중엔 출구가 없다는 걸 깨닫는다. 카메라는 인물을 오래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마치 세상이 나를 그렇게 대했던 것처럼.


맥주를 한 모금 마신다. 보일러가 최고치를 달리고 있었다. 어느새 맥주가 미지근하다. 인생도 그렇다.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게, 애매하게 사람을 괴롭힌다. 베리만의 장면 속에서 누군가는 신에게 소리를 지르고, 누군가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쪽이다. 말이 너무 많아지면, 진짜 중요한 건 다 빠져나가 버리니까. 침묵은 비겁함이 아니라 선택이다. 적어도 나한텐 그렇다.


영화 속 밤은 깊다. 조명이 없어서가 아니라, 인간이 너무 많이 생각해서 그렇다. 생각은 사람을 늙게 만든다. 나는 이미 충분히 늙었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안다. 베리만의 인물들처럼, 나도 가끔 내 얼굴이 가면처럼 느껴진다. 벗겨도 또 하나가 나온다. 끝이 없다. 그래서 그냥 쓰고, 마시고, 피운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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