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되기 전 마지막 문 앞에서

어른이 되기 직전, 나의 첫번째 용기

by 볕드는 이야기

코끝이 시리고 공기가 찬 기운을 내뿜으면 수능이 코앞으로 다가온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올해는 온화한 기운으로 날씨가 신호를 보내지 않았는데 수능 날이 성큼 다가와버렸습니다.

어느새 벌써 한 해의 끝자락이 다가왔습니다.

이제는 아득한 옛날 일이 되어버려 한참을 잊고 지내다가도 이맘때쯤 되면 저 깊숙이 있던 기억들이 툭 튀어나옵니다.

안 그래도 두려운 수능날, 한파까지 매섭게 공격해 패딩을 꽁꽁 싸매고 완전 무장해도 정신을 못 차렸던 그날을요.

까마득히 옛날 일이 되어버렸지만 그날의 느낌은 여전히 기억납니다.

그날에 마음을 생각보다 많이 쏟아부었었나 봅니다.

12년의 결실을 한낮 한때에 결정한다고 하니 어찌나 두렵고 떨리고 도망쳐버리고 싶었는지요.

뉴스를 틀어도 어느 곳에 시선을 둬도 온 세상이 수능만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수능 일주일 전쯤에는 “그래, 될 대로 돼라. 이미 결정 난 건데 어쩌겠어.” 하고 외치다가도

뒤돌아서면 물밀 듯 밀려오는 걱정과 불안 속에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오지 않을 것만 같았던, 아니 오지 않기를 바랐던 그날이 드디어 왔습니다.

수험장 앞 도로에는 경찰들과 응원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입김 서린 추위 정도는 거뜬히 이겨낼 기세였습니다.

교실 안에는 차가운 공기와 낯선 사람들, 낯선 분위기가 가득했습니다.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겁니다.

정확히 1교시 국어 영역이 끝난 직후 한 여학생에게서 터져 나온 울음소리를요.

그리고 그 순간 스쳐 지나간 제 이기심을요.

‘나만 어려웠던 게 아니었구나.’

누군가의 슬픔이 묘하게 위안과 안도감을 주었습니다.

그 덕분이었을까요. 긴장이 풀렸고 생각보다 문제도 술술 잘 풀렸습니다.

기쁘다 못해 심장이 점점 뛰기 시작했습니다.

수능이 끝나고 교문 앞에서 선생님이 보였습니다.

저 멀리서 “어때, 잘 쳤어? 어려웠어? 풀 만했어?”라고 물어보면

머쓱해하면서 “선생님, 저 생각보다 수능 잘 본 것 같아요! 평소보다 술술 풀렸는데 채점 실수만 안 했으면 좋겠어요.”

라고 말할 상상을 이미 다 해놓았었지요.

그 순간이 다가왔고 말할 준비가 되어 있었는데

선생님은 아무것도 묻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누구보다 따뜻하게 나를 꼭 안아주셨습니다.

“수고했어. 이제 다 끝났네. 축하해, 정말.”

그 순간 마치 내가 솜사탕이 되어 사르르 녹는 기분이었습니다.

다 끝났다는 안도감과 선생님의 품은 정말 따뜻하고 포근했습니다.

집에 돌아오니 하루 종일 떨었던 몸과 마음이 금세 녹아버렸습니다.

이 순간만을 기다렸습니다.

수능이라는 무거운 짐덩이를 내려놓고 훨훨 자유롭게 날아갈 이 순간을.

그런데 자유함과 동시에 원인 모를 허무함이 찾아왔습니다.

수능만 끝나면 정말 행복하고 기쁘고 마음이 편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단 한순간 이 시험 하나를 위해 12년을 보냈다고 생각하니 어이가 없고 허무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문득 생각했습니다.

‘이제 나는 뭘 해야 하지?’

아무도 나에게 수능 이후의 삶에 대해서

수능의 의미에 대해서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한참을 돌고 돌아 수많은 방황 끝에 이제야 그 의미를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10년 전, 과거의 나에게 전해주고 싶은 말입니다.

“말랑하고 부드럽기만 한 네가 뛰어들기엔 세상은 거칠고 냉정하게 느껴질 수 있는 곳이야.

어른으로 세상에 나아가기 전 치르는 수능이라는 시험 하나가 너의 12년 인생을 모두 평가할 순 없어.

세상에 나가면 무수한 기회들과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될 거야.

하지만 그럼에도 무언가에 최선을 다해 열중해 본 경험.

두렵고 떨리고 무섭지만 그 순간을 피하지 않고 맞부딪쳐 본 경험.

하기 싫지만 참고 인내해서 성과를 낸 경험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치야.

그 경험들이 너를 힘들고 지친 순간에 다시 일으켜 줄 강력한 무기가 되어줄 거야.”

이런 이유들을 말해줄 수 있는 어른들을 만났더라면

빙 둘러가지 않고 지름길로 갈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잠깐 들었습니다.

하지만 천천히, 느린 걸음으로 갔기 때문에

그 순간들을 온전히 느끼고 그 감정들을 내 안에 담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지름길이든 빙 둘러가든 느리든 빠르든

모든 길과 그만의 속도에는 의미와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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