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아파서 미안해.

by 한냥이

수술한 시기는 당연하고

네 번의 항암치료 때마다 암병원에 일주일 간 입원했다.

토하고 힘들어하는 모습을 아이들에게 보여줄 순 없었다.


다행히 아이들은 처음엔 괜찮은 듯했다.

오히려 첫째 아이는 엄마가 다시 학교와 회사에 가질 않아서 좋아했다.

가슴에 세균 덩어리가 생겨서 수술했다고 말했고, 아이들은 내 가슴에 달려있는 피주머니를 신기해했다.

항암치료는 엄마가 대왕주사 맞고 와서 쉬어야 한다고 둘러댔다.


문제는 빠지는 머리카락이었다.

항암치료가 결정되고 긴 생머리를 고수하던 나는 부랴부랴 단발로 잘랐었다. 치료를 시작한 지 한 달이 지날 무렵부터 엄청난 양의 머리카락이 빠지기 시작했다. 온 집안에 머리카락이 날아다녔고, 버티다 머리를 겨우 감은 날이면 징그러울 정도로 머리카락이 화장실 바닥에 나뒹굴었다. 이제는 머리를 밀어야 할 때였다.


'아이들이 엄마의 변화를 충격 없이 받아들일 수 있을까?'

삭발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난 아이들 걱정뿐이었다.


삭발을 하기 전 주말에는 가족사진을 찍으러 갔다.

가정의 달인 5월이 되면 어린이집에서 가족사진을 제출하라고 할 텐데 미리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사진 속 나는 이미 많이 아픈 모습이었지만 그래도 내가 있는 우리 가족의 모습을 남길 수 있어서 좋았다.


삭발하기 전날, 아이들에게 말했다.

"선이야~ 환이야~ 엄마 버킷리스트 중 하나가 머리를 밀어보는 건데 한 번 해볼까?

살면서 대머리를 언제 해보겠어! 엄마한테 용기줄 수 있어?" 물었다.

호기심 찬 눈으로 아이들은 나에게 해보라고 용기를 줬다.


다음 날 미용실에 가서 삭발을 했다. 내 상황을 아는 미용실 직원들이 나를 구석으로 데려갔고 울면서 머리를 밀어줬다.


그리고 집에서 하원한 아이들을 마주했다. 첫째는 까르르 웃어댔고, 둘째는 엄마 못 생겼다고 다시 머리를 붙이라고 울었다. 하나의 해프닝처럼 잘 넘어갔다.


그렇게 우리 가족이 잘 버틸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아이들 마음속 불안이 밖으로 터져 나왔다.

'엄마 잘 다녀와!' 하며 괜히 더 씩씩한 척하던 5살 첫째 딸아이는 손 냄새를 계속 맡는 틱 같은 행동이 생겼다. 유치원 담임 선생님이 아이에게 손 냄새를 맡는 이유를 물어보니, "여기서 엄마 냄새가 나요."라고 대답했단다.

치료가 거듭되어 엄마와의 긴 헤어짐을 반복할수록 첫째 아이는 이상 행동을 보였다. 별일 아닌 일에 울분을 토하고 소리를 지르며 급기야 들고 있던 요거트를 벽에 던지고 물건을 있는 대로 집어던졌다.


결국 첫째 아이는 심리 치료를 받았다. 자화상을 의미하는 '나무'를 그리라는 상담사의 요청에 아이는 나뭇잎이 빽빽한 나무를 그렸다고 한다.

그러면서 말하길, "사실 이 나무는 대머리예요. 근데 나뭇잎이 많이 달린 모자를 쓰고 있는 거예요."라고 설명했단다. 자기 자신의 모습에 엄마를 투영하는 아이의 심리에서 불안감과 엄마에 대한 연민, 사랑이 동시에 느껴졌다.


둘째 아이는, 내가 치료를 받으러 병원에 가는 날이면 며칠간 엄마를 못 만날 걸 아는지 등원 거부가 더 심해졌다. 어린이집 앞에서 서럽게 울며 엄마 가지 말라고 내 뒤에 숨어서 내 바지 끝자락을 꽉 쥔다. 그 작은 두 손을 힘으로 떼어 내어 선생님께 맡긴다. 통곡 소리를 뒤로 한 채, 난 일부러 더 빠른 걸음으로 병원에 갔다.


힘들어하는 아이들을 보며 들었던 마음이

항암치료로 썩어 가는 내 몸 보다 더 아팠다.


얼굴이 시커메지고 손톱과 발톱이 까매졌다.

말초신경 마비 증상으로 손가락이 붓고 감각이 사라졌다.

급격히 떨어진 체력에 침대 위에 송장처럼 누워 지냈다.


나의 병으로 우리 가족의 삶은 그렇게 멈췄다.

치료 기간 동안 아이들과 근거리 외출조차, 여행조차 가질 못 했다.

내가 빨리 몸을 회복하고 싶었던 이유는 아이들과 다시 일상을 보내기 위해서였다. 예전처럼.


그렇게 아이들이 내 인생의 짐이라고 외쳐댔던 나는,

이제 아이들을 보며 힘을 얻고 있었다.

내가 다시 살고 싶은 유일한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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