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한 아이를 더 잘 이해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아니 그보다 먼저는 그녀의 단아하면서도 수려한 글빨에 대한 존경과 부러움이었다. 글을 읽으면서는 내내 단아하면서도 수려한 건 그녀 자신이었구나를 알게 된다. 그리고 책을 덮으면서는 그녀는 어쩌면 사랑이구나 하는 마음마저 든다. 어쩌면 이 책은 그녀의 처절하고도 절절한 사랑 이야기다.
한 청년이 내게 왔다. 자신도 모르는 아기였던 시절 엄마로부터 분리된 경험을 한 청년. 아빠와 조부모, 고모의 손에 남부러울 것 없이 자란 듯 보였지만 내면에 분리와 상실에서 기인한 깊은 아픔을 갖고 있던 아이. 겉보기에는 부족함 없이 자랐기에 부족했다고, 힘들다고, 나는 왜 "내" 가족이 없는 거냐고 감히 물을 수도 없었던 아이. 이 아이를 좀 더 잘 이해하고 싶었다.
나 역시 분리와 상실의 아픔이 있다. 죽음이라는 거스를 수 없는 신의 섭리였지만, 내가 힘을 쓸 수 없는 영역이었기에 더 아팠다. 아니, 아플수도 없게 무력한 현실이 허망했다. 어쩌면 나는 그 현실을 철저히 회피하고 왜곡했는지도 모르겠다. 무력하게 허망한 현실 이후로 웃음을 장착하기 시작했으니. 그리고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신나게 살았으니. 이후 15년이 지나서야 알았다. 그 때 많이 아팠다는 걸. 아파하는 것조차 두려웠다는 걸. 부족함 없이 키우기 위해 혼자서 고군분투하던 엄마의 모습에 감히 아프다는 말을 하는 것도 미안했다는 걸. 그 아픔은 열 다섯 살 소녀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큰 것이었다는 걸.
서른 살의 아낙은(아줌마라고 썼다가 지웠다. 왜 아줌마라는 호칭은 안 익숙해지는걸까...) 딱 반쪽짜리 소녀를 그렇게 안았다. 상은아, 그 때 너 진짜 아팠겠다. 너 그 때 진짜 무서웠겠다. 도망갈 수밖에 없었겠다. 니가 살려고 그런거였네. 쑈가 아니었어.
서른이 되어서야 소녀를 마주했던 나처럼 이 스무살짜리는 지금 어린 시절의 자기를 마주하고 있었다. 상실로 인한 아픔이 풍요와 사랑으로 덮여진 듯 했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 아픔이 없어진 건 아니었음을 마주하고 있었다. 그는 그렇게 혼란스러운 상태로 내게 왔다. 최선을 다해 잘해준 가족들에게 자꾸 화를 내는 스스로에 대한 괴로움과 함께.
혹 이 아이를 내 수준으로만 이해하고 있는 것 아닐까 의심이 드는 순간 <모두의 입양>이 눈에 들어왔다. 이설아 선생님의 글에 매료되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구입한 책. 그러나 고이 넣어두었던. 어쩌면 분리와 상실의 아픔을 좀 더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는 마음으로 책을 열었고, 한 달음에 책을 닫았다.
아이를 더 잘 이해하려던 나는 책을 읽으며 나를 안는다. 아니, 그녀의 글이 나를 안았다고 하는 게 맞겠다. 열다섯살 소녀였던 나를, 그리고 지금의 나를 포근하게도 안는다. 그 품에 안겨 어딘가 막혀있던 샘을 뚫고 나니 정신이 번쩍 든다. 그래, 이렇게 사랑해야지. 무엇을 쏟아내도 안전한 품으로, 무엇을 쏟아내도 버틸만한 땅으로.
<모두의 입양>은 입양인들과 양부모, 생부모들의 이야기인 것 같지만, 사실은 모든 부모들과 자녀들의 이야기다. 가족의 형태가 점점 더 다양해지고 있고 우리들 모두는 각자의 삶에서 각양의 분리와 상실을 경험하는 까닭이다. 설령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이 책은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가를 말한다. 낳거나 키우는 부모됨의 표면적인 과정을 넘어 진짜 부모됨을 이야기한다. 입양가족이든 아니든 부모라면, 더 나아가 아이들과 관계하는 모든 사람들이 읽고 공부하고 나누며 성찰하는 책이 되면 좋겠다.
이 책 덕에, 사랑을 갈아 넣은 글을 써준 그녀 덕에 더 잘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청년을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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