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그럴 때가 아니지만, 사실 그러고 싶은 마음에게

자라는 것이 멈췄지만 분명히 자라고 있어요

by 백야

때때로 확신이라는 감각은 사람을 가두는 것 같다.

나 이제 이런 것 안 좋아해. 이제 내 나이 되면 이런 건 안 어울려. 그런 건 하면 안 되지. 이제 그럴 때가 아니지. 정해진 것 없이 대충 '그럴 거야' 하고 마는 말들. 무의식적으로 스스로에게 제한하고 금지시키는 것들. 그렇게 하려다가 아닌 것 같아서 마는 것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것이 나도 모르게 습관이 되어버린 순간들. 어느 순간부터 그렇게 말하게 되는 이유가 뭘까. 금세 겁먹어 버리는 이유가 뭘까. 아마도 평범하게 탈없이 잘 살고 싶기 때문일까? 현재에 바로 서고 싶은 마음 때문일까? 그러나 그 바로 잡고 싶은 마음이 나를 너무나 흔한 일반성으로 밀어넣는 것 같다. 사실 나는 조금 다를 수 있는데, 그래서 이건 가능할 수도 있는데. 어느 순간부터 나는 나에게 혹은 희망에게 여지 주지 않고 평범해지는 것을 선택한다. 그러다 뒤를 돌아 보았을 때, 어느 날 내가 사라진 것 같은 기분이 들고 다시 지나온 시간으로 돌아가 내가 두고 온 것들을 생각하게 만든다. 결국 나는 나로 살아가게 된다는 것. 나도 모르게 두고 와도, 두고 온 나를 되찾게 되는 여정 같은 삶이 조금씩 느껴지고 있다.


나를 잃어버려도 다시 나를 찾게 되는 관성의 법칙은 최근 들어 느낀 것 같다. 스무 살 초반에 자주 입었던 옷 스타일이 이십대 후반이 된 지금, 더 이상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내가 좋아했던 옷들은 몸매가 드러나지 않는 큰 사이즈의 옷이었고 바지는 밀리터리 무늬가 들어간 카고 팬츠를 좋아했다. 생각해 보니 치마를 입은 적도 없고 딱 붙는 오프숄더를 입은 적도 없었다. 요즘 들어 그런 옷들을 자주 입고 구매하지만 당근마켓에 전부 팔기가 주저된다. 마찬가지로 습관처럼 적던 일기도 이제 실용성이 없다고 느껴졌다. 심지어 전부 종이 일기장에 적었다. 적을 거면 메모장에 적었어야지, 아이패드에 적었어야지, 차라리 인스타툰으로 상업화해서 올려야지, 같은 생각들이 사소한 습관들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그래서 더 이상 쓰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실용성 있는 무언가를 계속 찾은 것 같다. 그렇게 사소하게 나를 구성하던 것들을 정리했다.

예전에 좋아했던 것들을 생각해 보면 결국 그것을 바라보고 다루는 과정 자체가 나에게 가까워지는 시간이었다. 보기만 해도 좋고 만지기만 해도 좋은 것. 어떤 의미를 추구하려던 게 아닌, 그냥 종이 위에 글자를 적는 순간들이 좋았던 것 같다. 그 시간이 나도 모르게 나로서 유일해지는 시간처럼 느꼈던 것 같다.


종이에 글을 쓰는 시간이 좋고, 옷을 고르는 시간이 좋고, 요리에 대해서 고민하는 시간이 좋고, 예쁜 카페를 찾는 시간들도 좋고, 그 안에서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시간들도 좋고. 그러나 이제는 다 샛돈처럼 흐르는 것으로 단정되어 '아껴 써야 된다'라는 슬로건이 왠지 내 현재를 더 강하게 움켜 쥘 때. 이제 그만하기로 한다는 결심까지는 보낸 시간이 무색해질 만큼 짧았다. 그렇게 정리하고 지내다 보면 나도 모르게 내 안에 허무함이 맴돈다. 그리고 어른이 되는 과정이라며 다그치고 합리화시킨다. 어떤 시절의 나를 매듭 짓고, 남들과 비슷해지기로 마음먹는다. 그렇게 열심히 살고, 저축하고, 쓸데없다고 느껴지는 것들은 하지 않는다. 그럼 내 하루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 행복의 윤곽이 희미해진다. 사실 내가 바라는 것과 나에게 어울리는 것은 그렇게 커다랗고 의미가 대단한 게 아닐 수도 있는데도.


'이제는 안 좋아해. 왜냐하면 솔직히 돈만 나가고 쓸데없으니까.' 그런데 내가 좋아하는 시간들을 다시 찾기 위해 서랍을 열어 보고 사진첩을 둘러 보았을 때, 그 순간을 보낸 시간 안에서 행복했던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요즘은 쉼조차도 실용적이어야 할 것 같아서 러닝을 했는데 그냥 다시 예전처럼 시간을 보냈다. 다시 좋아했던 옷들을 입고 사진을 찍었다. 좋아하는 노래를 틀어 놓고, 잡지 속에 있는 마음에 드는 글자들을 오리고, 내가 좋아하는 영화 속 이미지로 스티커를 만들고, 아무도 모르는 곳에 익명으로 내가 좋아하는 것에 대해 하루 종일 떠들어 보니까 재미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나는 아마 그런 시간들을 사랑한 것 같다. 의미없는 시간 속에서 의미를 만들어가는 과정 자체에서 쉼을 느꼈던 것 같다. 너무 의미만 좇다간 나를 잃어 버린다. 어떤 나는 의미가 이뤄지지 않는 순간에 가장 선명하게 빛나기도 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 같다.


장바구니에 담아두었던 고양이귀 비니를 구매해야겠다. 다시 좋아했던 옷을 입고 카페로 걸어가는 길에서 예전에 그저 그렇게 보냈던 시간 속의 나를 꺼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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