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가 자라는 속도는 다르다

각자의 시간은 다르게 흐른다

by 이시안

요즘의 내 생활 패턴은 매일이 비슷하다.

오전에 미적거리다가 점심을 먹고 소위 말하는 별벌레 카페 같은 곳 말고 동네 카페로 향한다.

아메리카노 한 잔을 시켜놓고 몇 시간을 독서와 필사, 글쓰기를 하다가 진상으로 찍혀 쫓겨(?)난다.

그 후에 저녁을 먹고 복싱하고 구직활동을 하든지, 컴활 2급실기 연습을 하든지, 인터넷 방송을 하든지 하는 시간을 보낸다.


우울증에 시달리는 매일 속에서 그나마 뭐라도 하고 있다는 이 사실들이 나는 뿌듯했다.

나름의 연기, 글쓰기 연습에 운동에, 현실 문제를 외면하지 않고 해결하려는 노력들 등등.

내가 일을 구하거나 새로운 이벤트가 벌어지지 않는 이상 이 평화로운 생활패턴이 계속될 것 같았다.

이 뿌듯하고 알찬 하루하루가 머리에서 별이 뿅뿅 터져 나오고 입에서는 헤헤거릴 정도로 행복했다.

그래서일까?

갑작스럽게 터진 ‘현실 이벤트‘ 폭탄에 정신을 차리지 못한 것이.


시간이 벌써 이렇게 흐른 것일까.

벌써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1년이 되었다.

때문에 우리 가족은 아버지의 추도예배를 드리기 위해 우리 집에 모였다.

귀엽고 시끄러운 조카 두 명과 현실적이고 대문자 T의 내 동생, 동생 못지않은 매제, 세상 물정 모르는 감성적인 엄마와 나.


밥을 먹고 예배를 드린 후 여타 단란한 가족들이 그렇듯 우리 가족도 둘러앉아 이야기를 시작한다.

삼촌을 찾는 조카들과 신나게 놀고 있는데 갑작스레 공격이 들어온다.

‘누가 봐도 사기인데 거기서 왜 일을 하려고 해’

‘자기 앞가림은 해야지.’

‘한다는 컴활 자격증은 땄어?’

‘그냥 일반 사무직해서 200 벌고 150은 저축하고….‘

‘정신 좀 차려.’

폭포수 같은 잔소리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을 무렵, 간신히 고개를 올렸는데 뭔가 이상했다.


우리 가족이 다른 가족들과 다른 점이 하나 있다.

자신의 자손이, 조카가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혹은 자랑하고 싶은 마음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것들이 모여 미움을 사게 되는 것을 잔소리라 하겠다.

그리고 그 잔소리는 보통 어른들의 몫이다.

결코, 여동생의 몫은 아니란 말이다.

내가 오빠인데, 내가 쟤보다 2년은 더 살았는데. 뭐지.

이 아이러니함에 반발하려 눈을 치켜올리며 말을 하려다가 그냥 벌린 입에 그대로 과일을 집어넣었다.

누가 지 아빠 딸 아니랄까 봐….


하나부터 열까지 그래, 동생말이 틀린 점은 없었다.

나이 30대 중반이 되도록 자기 앞가림 못하는 나의 모습에, 조금만 생각해도 사기인 게 뻔한 수법에 걸릴 뻔하고, 컴활 2급은 아직도 못 땄고….

삼촌 좋다며 달려드는 조카들에, 너 잘되라며 달려드는 여동생에, 정신이 아찔해지고 에너지는 이미 바닥나버린 지 오래였다.

그와 반비례로 내 우울감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일이 생각난다.


“너 30살까지만 성우 준비한다며, 도대체 언제까지 할 거야?”


오랜만에 만나 기분 좋게 맥주를 먹다가 뱉어버릴 뻔했다.

고등학생 때부터 친구였던 녀석이 하는 소리다.

지금까지 대기업에서 일만 하던 녀석이 나의 꿈에 대해 언급하며 태클 거는 것이 참으로 아니 꼬았다.

내 인생 내가 알아서 하겠다며 친절히 욕설을 섞어 대답해 주었다.

그러자 친구가 기름통을 안고 불 속으로 뛰어드는데 어떻게 안 말리겠냐고 한다.

그냥 맥주를 얼굴에 뱉어버릴걸.


사실 나는 숲 속의 한가운데에 있는 거대한 소나무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주변의 작은 나무들을 돌보아주고, 내 큰 그늘 아래서 사람들은 쉬다 가고, 하늘을 향해 뻗은 가지들 위로 새들이 앉아 지저귈 수 있는 믿음직하고 거대한 나무가 되고 싶었다.

그런데 눈을 떠 꿈에서 깨보니 난 발아하지도 못한 조그마한 씨앗이었다.

동생은 나보고 발아하라고 하는 것이다.

거대한 소나무가 아니어도 되니까, 이제 그만 땅 속에서 나와 조그마한 나무라도 되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 말은 간신히 끌어올린 내 자존감을 다시 땅 속으로 넣어버렸다.

방 안에 멍하니 앉아 나는 왜 이리 못났을까를 주절거린다.

자기혐오에 빠진 모습마저 보기 싫어 넌덜머리가 났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너무 파고들어 나무는커녕 발아조차 힘든 깊이까지 내려가서야 나는 정신을 차렸다. 여기는 어디지?


이 사회는 뭔가 평균을 이야기한다.

20대에는~ 해야 하고, 30대에는 ~돼야 하고….

어디서 본 건데 그럼 80대 되면 돌아가실 거냐는 농담이 떠오른다.

나는 사람이 각자의 기준과 시간이 있음을 믿는다.

나 또한 아직 발아하지 못했을지 몰라도, 언젠가 내 시간이 되면 발아하여 나무가 될 것을 믿는다.

설령 그것이 내 꿈처럼 거대한 소나무가 되지는 못해도, 주변 나무들과 조화를 이루며 커갈 것이라 믿는다.


하지만 가끔씩 내 신념이, 기준이 흔들리며 우울감이 올라올 때가 있다.

누군가가 내 인생에 태클을 걸 때이다.

그 태클이 마음이, 사랑이, 안타까움이 담긴 태클이라 할지라도 마음이 연약한 나는 또 흔들려버리고 만다.


두 손을 모아 마른세수를 한다.

난 성우 지망생으로서, 연기 서적도 읽고, 글쓰기도 연습하고 현실도 외면하지 않고 구직활동하고, 대학도 다니고, 컴활 자격증도 준비하고 있어.

시안아. 너 잘하고 있어.

왜 아직까지도 나무가 되지 못했냐고 하지만, 그건 그들의 시간이고 난 내 시간이 있어.

나를 흔들리게 하는 말들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리자.

내가 생각하고 내가 정한 그 길을 즐겁게, 담담하게 걸어가자.

내 시간에서 최선을 다한다면, 그게 바로 잘 사는 인생일 거니까.


조금씩 내 안의 씨앗이 발아하는 느낌이 들어 마음이 간질간질하다.

아직 나무가 되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성장해 가는 거겠지.

그리고 언젠간 푸른 소나무가 될 거야.

나는 조그마한 메모장을 들고, 오늘의 감정을 기록해 나간다.

그리고 동생의 말은 인정하기 싫지만… 어쨌든 컴활 2급 자격증은 빨리 따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