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It is what it is
나는 It is what it is 정신을 배우고 돌아온 대기업 8년 차 영써티 직장인이다.
지난 일기에서 쓰여있듯 근래 정신적으로 많이 힘들었다. 그리고 또 나는 도망쳤다.
숨줄기가 되어준 피아노 학원도 나가지 않았다.
집에서 연습하던 드로잉도 하지 않았다.
브런치 글도 쓰지 않았다.
그리고 현실에서 도망치듯 스위스로 훌쩍 떠나버렸다.
갑작스런 일정에 혼자 다녀왔다.
지난 유럽투어에서 다시 한번 오고 싶었던 벵겐의 호텔에서 지냈다.
나의 계획은 이랬다.
일주일간 책 두 권은 읽고 브런치 원고도 매일 하나씩 써두기. 결론적으로 어느 것도 완수하지 못했다.
티탄이 깎아 만든 듯한 알프스 산을 바라보기만 했다.
아무것도 하지 못했지만 내 안은 티탄의 기운이 들어찼다.
내가 머문 호텔은 접객 서비스가 매우 좋은 곳이다.
직원들은 유럽 각지에서 모였지만 모두 같은 수준의 접객 태도를 보여줬다.
고급스럽진 않아도 모든 직원이(심지어 주방 직원들도) 투숙객에게 친근하게 대하며 스몰톡을 나누는 곳이었고 나는 혼자 갔다 보니 스몰톡이 길어졌다.
유럽 각지에서 모인 그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It is what it is였다. 나는 이 문장을 ‘어쩔 수 없지’란 체념의 의미로만 알고 있었는데 그들은 수용의 의미로 사용했다.
굳이 바꾸기 어려운 부분을 애쓰며 바꾸려 들기보단 수용하고 본인들이 원하는 것에 애를 쓰는 태도.
남들보다 부족한 부분을, 원하지도 않으면서 탐내며 힘들어하는 나에게 필요한 태도였다.
이래서 여행을 다니는 건가 보다.
두 주먹 꽉 쥐어 놓지 않으려는 욕심쟁이이고, 그로 인해 나 자신은 오히려 주먹 사이로 흘러내리고 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어떻게 주먹을 펼 수 있는지는 어려운 문제였다.
It is what it is는 그 주먹을 펴게 만드는 마법의 주문이었다.
극도의 우울함과 슬픔으로 떠난 여행이었으나
지금 돌이켜보면 여행의 시작인 공항에서부터 그 부정적인 감정을 잊게 하는 일들이 생겼다.
여행 중에도 재밌고 생각을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았다.
인생지사 새옹지마라 했나, 이러한 우울함을 안고 갔기에 그저 지나쳐갈 하루의 조각들도 하나의 사색으로 남아 내 안을 채워주었다.
또, 돌아와서도 많은 것에서 많은 것들을 배우고 있다.
여행기는 다음 편에 이어서 쓰도록 하겠다.
……………………….
내 오랜 연인은 나 혼자 여행을 가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너무 힘들어하는 모습에 군말 없이 보내주었다.
어떤 마음으로 배웅해 줬는지 안다.
앞으로 항상 함께 추억을 쌓고 싶어 하는 연인.
나에게 불안함을 느끼는 연인.
그러나 이번 여행을 통해 오랜 연인에겐 미안하지만, 나는 종종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한 사람이라는 걸 깊이
느꼈다.
연인과 함께 떠났다면 그냥 관광객으로 알프스 산을 보며 감탄만 하다 왔을 것이다.
혼자 갔기에 느끼는 바가 남달랐고, 곱씹으며 사색에 잠길 수 있었다. 그 덕에 티탄의 기운이 내 안에 들어찰 수 있었고 마법의 주문을 배워올 수 있었다.
그리고 보다 근본적으로, 나는 혼자 있어야 스스로에게 솔직한 사람이다.
물론 내 오랜 연인은 나의 자기 편향적 사고를 바로 잡아주는 길잡이이다.
오늘의 좋은 모습의 나는 내 연인이 만들어준 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유는 잘 모르겠다.
아마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지 않을까?
혼자 있어야 아무런 꾸밈도 없이 벌거벗은 나를 마주 할 수 있는 것 말이다.
이를 전달하는 것은 또 다른 숙제이다.
아직 어떻게 얘길 꺼내야 할지도 모르겠다.
다만 오랜 연인도 It is what it is로 받아들여주길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