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린 가을날의 오후

by 이하늘


시월 중순의 한가한 오후에 고향 집에서 창을 열고 하늘을 올려다보자, 하늘은 온통 회색 구름으로 덮여있고 다만 드문드문 보이는 틈새로 투명한 빛살이 들어왔습니다. 거의 모든 사람이 그렇듯이 저 역시 구름 한 점 없거나 가끔씩 새털구름만 보이는 맑은 날을 가장 좋아하지만, 이렇게 다소 흐린 날도 가슴을 차분하게 만들어 주어 마음에 듭니다. 지붕 아래 있거나 우산을 쓰고서 밖에 나갈 수 있다면 비 오는 날도 그리 싫지는 않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집을 나서 여행을 떠날 때, 집을 나서는 순간부터 다시 집에 돌아올 때까지 언제나 맑기만을 바랍니다. 하지만 우리가 맑은 날만을 바라는 것과는 별개로 날씨는 끊임없이 변화하기 마련이고, 간혹 하늘에 내리 앉은 회색 구름과 그보다 더 가끔 찾아오는 이슬비는 우리의 마음을 아래로 내몰며 화창한 맑은 날에 가려져 미처 볼 수 없었던 작고 낮은 풍경들을 마주하게 해줍니다.

삶의 기반을 위협하는 폭풍우를 견디는 사람이나 비가 올 때 야외에서 원치 않는 일을 해야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나 비 오는 날을 낭만적으로 여길 수 있지만 우리는 그러지 않습니다. 휴일에 비가 올 때 대부분의 사람은 맑은 날이 아닌 것을 아쉬워하며 하릴없이 집 안에서 시간을 보내기 마련입니다.

예전의 저 또한 휴일에 비가 내리는 것은 불행한 일이라 생각했지만, 이제는 생각을 바꾸기로 했습니다. 비가 내리는 날에 우산을 쓰고 산책하러 나가면 맑은 날에는 볼 수 없는 풍경들이 보입니다. 조용히 흐르는 시냇물은 거친 급류가 되었고 개울가의 풀잎들은 이슬에 젖어 들거나 급류에 잠겨버렸습니다. 개구리와 풀벌레들은 몸을 피해 자신들의 언어로 이야기를 나눕니다. 희미하게만 느껴졌던 풀 내음은 비 오는 날이면 유달리 선명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니 여행지에서 예상과 달리 먹구름이 끼거나 비가 내린다고 해서 하늘이 우리를 도와주지 않는다 여기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새털구름과 무지개는 자연의 아름다운 모습임이 틀림없지만, 비가 내리거나 폭풍이 몰아치는 일 역시 자연의 또 다른 얼굴입니다. 자연은 스스로 그곳에 있는 세상의 모든 것이고 인간의 마음가짐에 따라 움직이는 존재도 아닙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동안 흐렸던 하늘은 다시 맑아졌습니다. 일기예보는 내일까지는 비가 내릴 가능성은 거의 없고 다만 저녁부터 차츰 흐려진다고 말하는데, 그 말대로 해가 저물고 밤이 찾아오면 다시 흐린 날씨가 찾아올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제 저는 어떤 날씨가 찾아와도 그것이 저를 위한 선물이라거나 저에게 내리는 벌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비가 내리기에 꽃이 피어나고 햇살이 있기에 열매를 맺습니다. 바람이 부는 날에 씨앗은 멀리 날아가고 바람 한 점 없는 날 씨앗은 낯선 땅에 내려앉습니다. 맑은 날도, 비 오는 날도 모두 아름다운 세상을 이루는 퍼즐의 한 조각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탐구생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