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잊지 못할, 베네치아 항구

21th. '하니아'에서 '이라클리온'으로

by 조르바와 춤을


이미 일어난 일은 되돌릴 수 없다.
지금부터, 이 자리에서 다시 새롭게 시작하면 된다.
처음 세운 계획에 집착할 이유도 없고, 작은 난관 앞에서 쉽게 포기할 필요도 없다.
남아 있는 선택지 안에서 가장 나은 방향을 고르는 것,
그 판단과 태도까지 포함해 여행은 완성된다.



1.

오늘도 어김없이, 시작은 아침 조깅이다. 겨우 이틀을 지냈을 뿐인데 해변과 길이 꽤 익숙하다. 바다는 아직 잠에서 덜 깬 얼굴이다. 이른 시간, 베네치아 항구는 한산하다. 밤새 식어 있던 돌바닥은 차갑고, 햇살은 막 수면 위로 올라오며 항구의 윤곽을 천천히 드러낸다.

코움카피 해변에는 이미 수영을 마치고 나오는 중년의 남성도 보인다. 이 시간에 바다에 들어갔다 나온 체력과 정신력이 놀랍다. 식당들은 하나둘 셔터를 올리고, 테이블을 닦고, 의자를 맞춘다. 하루가 이제 막 준비를 시작한다.

4킬로미터 지점에서 되돌아와 베네치아 항구로 접어든다. 하니아의 마지막 아침이니, 방파제 성벽 위에서 바다를 한 번 더 보고 싶어진다. 성벽 입구에는 창고를 개조한 천정 높은 카페 겸 레스토랑이 일찍부터 개점 준비를 하고 있다. 저기서 커피 한 잔, 아니면 맥주 한 잔 마셔도 좋겠다. 사진을 한 장 남기고 다시 방파제 쪽으로 달린다.


아침 해변의 풍경
아침 만조, 코움카피 해변 앞 식당
베네치아 항구 동쪽 끝, 방파제 성벽 앞 카페 겸 레스토랑


그때였다. 정말 한순간이었다.


날카롭고 불규칙한 시멘트 바닥에 러닝화 밑창이 걸리는 느낌이 들더니, 발에 브레이크가 걸리며 몸이 급격히 앞으로 쏠린다. 균형을 잡아보려 했지만 이미 무게 중심은 무너졌고, 가속도가 붙었다. 두 팔이 반사적으로 앞으로 뻗고, 몸은 그대로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진다. 손바닥이 먼저 바닥을 긁고, 무릎이 뒤따라 쓸린다. 골반 쪽으로 둔탁한 충격이 올라온다. 동시에 외마디 비명이 튀어나온다. 오른손에 쥐고 있던 스마트폰도 바닥에 부딪히며 파열음을 내고, 앞으로 미끄러져 달아난다. 순간 멍해지며 현기증이 인다. 몸이 굳어 바로 일어나 지지가 않는다.


얼굴은 다치지 않은 것 같다. 그런데 왼손바닥이 뜨겁다. 무릎에서는 즉각적인 통증이 치고 올라온다. ‘어디가 얼마나 다친 걸까?’ 천천히 왼손을 들어 올리자 손바닥 아래쪽 피부가 벗겨졌다. 살이 그대로 드러나 피가 흐른다. 무릎도 마찬가지다. 상처를 확인하자 통증이 더 또렷해진다.


폰의 마지막 사진, 넘어지기 바로 전 촬영 버튼이 눌러졌다


오른손은 가벼운 스크래치만 났다. 스마트폰이 상처를 대신한 모양이다. 간신히 몸을 추슬러 세우고, 주위를 둘러본다. 조금 떨어진 방파제 성벽 위에 사람이 보이지만 무심하다. 심호흡을 하고 놓친 스마트폰을 줍는다. 걷는 동작이 부자연스럽고 골반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난다. 가까운 벤치까지 절둑거리며 걸어가 앉는다. 숨을 고르고 손과 무릎을 번갈아 살핀다. 주로 왼쪽이 크게 다쳤다. 왼손바닥과 무릎에는 이미 피가 엉겨 붙고, 진물이 흐르기 시작한다. 스마트폰 액정은 거미줄처럼 갈라져 있다. 화면이 켜지지 않는다. J에게 연락을 할 수가 없다. 병원이나 약국도 아직 문을 열기에 이르다. 어디서 치료를 해야 할지, 어떻게 숙소까지 돌아가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난처함이 통증 위로 겹쳐온다.


일단 숙소 방향으로 걸어가 보기로 한다. 발을 내딛자 무릎뿐 아니라 골반에서도 통증이 전해진다. 걷다 쉬다를 반복하고 있을 즈음, J가 보인다. 뒤따라오던 내가 보이지 않자, 되돌아온 것이다. 나를 보자 얼굴이 굳는다. 많이 놀란 표정이다. “괜찮아.” 나는 웃어 보인다. 아마 웃는 표정이 좀 일그러져 보였으리라. J의 부축을 받아 절뚝거리며 숙소로 돌아온다. 의연한 척을 했지만, 움직일 때마다 불규칙한 통증이 전달된다. 가져온 응급약으로 상처를 소독하고 밴드를 붙인다. 밴드 위로 금세 진물이 번져 나온다. 소파에 기대앉아, 나보다 더 심하게 박살 난 스마트폰을 쳐다본다. 그 안에 저장된 일정, 지도, 예약처, 기억들이 모두 내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사라졌다. 단순한 사고라고 하기엔 상처가 크다.


2.

상처 부위를 소독하고 밴드를 다시 붙이길 여러 번. 진물은 쉽게 멈추지 않고, 밴드는 금세 눅눅해진다. J의 표정도 점점 어두워진다. 병원에 가보지 않아도 되겠냐고 묻는다.

"통증이 가라앉고 있으니 괜찮아. 조금만 쉬자."


마음이 조금씩 진정되며 조르바가 떠오른다. 산으로 이어진 케이블과 지지대가 무너지고, 광산 사업이 한순간에 끝나버린 날. 그는 울거나 주저앉지 않았다. 까짓 거, 어쩌겠어. 인생이 꼭 잘되란 법만 있는 게 아니잖아! 조르바는 춤을 췄다. 모든 것이 무너진 자리에서, 그는 체념 대신 스스로를 위로하며 실패를 껴안았다. 어제는 조르바와 해변에서 흥을 나눴다면, 오늘은 조르바에게서 재기의 정신을 발견한다.

일단 이라클리온으로 가자. 아직 오른손은 멀쩡하고, 걷기도 가능하지 않은가. 그렇게 생각하니 통증도 어느 정도 견딜 만해진다.

“J, 걱정할 거 없어. 짐 싸서 '헤라클레스의 도시'로 가보자. 카잔차키스 선생도 만나야지!”


여행은 늘 예기치 못한 변수와 마주하는 일이다.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이 생길지 알 수 없다. 당황할 수 있으나, 사고 앞에서 주눅 들거나 비관할 필요 없다. 이미 일어난 일은 되돌릴 수 없다. 지금부터, 이 자리에서 다시 새롭게 시작하면 된다. 처음 세운 계획에 집착할 이유도 없고, 작은 난관 앞에서 쉽게 포기할 필요도 없다. 남아 있는 선택지 안에서 가장 나은 방향을 고르는 것, 그 판단과 태도까지 포함해 여행은 완성된다.


밴드를 단단히 붙이고, J가 가져온 얇은 장갑을 낀다. 졸지에 영화 〈내부자들〉의 안상구 같은 모습이 된다. J를 바라보며, 상구 톤으로 한마디 던진다.

“이라클리온 가서 모히또 한 잔 혀야지.”

J가 웃는다. 다시 몸을 움직일 기운이 솟는다.


버스 정류장 바로 옆 해변. 우리가 석양을 감상한 장소이기도 하다


3.

크레타에는 여행자가 마음 놓고 쓸 만한 택시 앱이 없다. 하니아 버스터미널까지 버스를 타고 나간 뒤, 다시 이라클리온으로 향하는 시외버스를 탄다.

하니아에서 이라클리온까지, 섬의 서쪽과 동쪽을 잇는 이 구간은 약 140킬로미터. 이라클리온 터미널까지 세 시간이 소요된다. 신형버스임에도 그 거리에 세 시간이 소요된다는 것은 도로 사정과 지형이 만만치 않다는 뜻이다.


시외버스터미널까지 타고 나간 시내버스
하니아 버스터미널까지 가는 길에서 만난 풍경
하니아 버스터미널


부상 부위의 통증, 그리고 블랙화면 거미줄 속으로 사라진 정보를 추적하느라 버스에서 잠을 잘 수 없다. 무엇보다 이라클리온 숙소 위치를 정확히 알 수가 없는 것이 답답하다. 에어비엔비는 타인 폰으로 내 계정에 로그인이 되지 않는다. 본인 확인 방법이 내 폰에서 인증을 거쳐야 하는 방식이라 뾰족한 수가 없다. 다행히 미리 출력해 온 종이자료가 있어, J폰으로 지도 검색을 한다. 두 개 지역에 마크가 뜬다. 이건 무슨 혼선인지는 모르겠다. 숙소 출입방법도 확인할 수가 없다. 그러면 집을 찾는다 해도 들어가지 못할 확률이 높다. 다른 곳에 거주하는 주인이 숙박업을 위해 리모델링 후 렌트하는 경우가 많아, 현장을 가도 키를 숨겨놓은 곳이나 문의 비번을 모르면 숙소에 들어갈 방법이 없다. 인터넷 플랫폼 시대, 스마트폰 의존의 사각지대를 제대로 경험하고 있다. 머리가 띵해진다. 한숨을 내쉬며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다 당황한다. 한숨이 감탄사로 바뀐다. 이 해안선 도로는 절경이라 할만한 바다와 해변을 수시로 마주친다.

'에라 모르겠다. 가서 부딪혀보자. 옆집에 초인종은 있겠지.'



이곳의 바다는 끝까지 푸르고, 산은 끝까지 메마르다. 토양은 얕고 거칠며, 그 사이사이로 올리브 나무만이 완강하게 초록을 유지하고 있다. 멀리서 보면 한 폭의 그림 같지만, 가까이 들여다보면 이 땅은 결코 호의적인 환경이 아니다. 물은 귀하고, 농지는 제한적이며, 산맥은 섬을 동서로 가르며 사람들의 이동을 가로막는다. ‘살기 좋은 곳’이라기보다, ‘잘 버텨며 살아야 하는 곳’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크레타는 유럽에서 가장 이른 문명 중 하나를 꽃피운 땅이다. 미노스 문명은 이 척박한 자연과 정면대결 대신, 바다를 통해 우회했다. 크레타 사람들은 산이 아닌 해로를 택했고, 고립 대신 교류를 선택했다. 에게해와 지중해를 오가는 항로 위에서 그들은 곡물과 도자기, 올리브유를 교환하며 살아남았다. 척박한 땅은 그들을 약하게 만들기보다, 바깥을 향하게 했다. 역사적으로도 이 섬은 늘 경계에 서 있었다. 그리스 본토와 이집트, 소아시아를 잇는 요충지로서 수없이 정복당하고 점령당했다. 로마, 비잔틴, 베네치아, 오스만의 지배가 차례로 지나갔다. 그럼에도 크레타의 삶은 완전히 지워지지 않았다. 외세는 바뀌었지만, 올리브를 가꾸는 방식과 가족 중심의 생활, 그리스 정교의 신앙으로 버티고 이겨냈다. 땅은 척박하고 침략은 드셌지만, 사람들은 더 강인해지는 방식으로 자연과 외세를 이겨냈다.


버스는 묵묵히 동쪽으로 달린다. 창 밖의 풍경을 보며 이 섬의 시간을 조금 더 이해하게 된다. 일부러라도 한번은 타봐야 할 노선이다.


이라클리온 시내로 들어서는 버스 밖 풍경


4.

버스는 세 시간을 조금 넘겨 이라클리온에 도착한다. 이번 여행의 종착지이자, 엔딩을 장식할 헤라클레스의 도시, 그리고 엘 그레코와 카잔차키스의 고향이다. 상처 난 손바닥과 무릎이 욱신거리고, 숙소를 어떻게 찾아 들어가야 할지도 막막한 상황인데 마음 한쪽은 자꾸 들뜬다. 이 도시가 가진 이름의 무게 때문인 것같다.


일단 여행계획서에 적어둔 주소로 가보기로 한다. 그곳에 주인이 실제로 살고 있다면 다행이지만, 숙소만 운영하는 호스트라면 출입부터 난관이다. 지도를 검색한 후, 택시를 타고 주소지에 도착해 짐을 내린다. 골목 안쪽, 아담한 2층 집이다. 1층과 2층이 분리된 구조로, 한국의 오피스텔 원룸 정도 크기다. 집 입구의 작은 철문은 닫혀 있고, 초인종 따위는 없다. 집 앞 둔턱에 걸터앉아 잠시 상황을 정리한다.

혹시 누가 있을까, 건물 안을 힐끔힐끔 염탐한다. 누가 보여도 좋고, 누군가 나를 발견해도 좋다. 오히려 누군가 나를 봐주길 바라며 동작을 크게 한다. 의심을 살 법한 행동이지만 보는 사람이 없다. 한낮의 골목은 고요하고, 지나가는 사람조차 없다. 펜스를 잡은 왼손 장갑은 진물이 말라 암갈색 얼룩이 번졌다.


구글 맵 길찾기로 확인한 숙소 골목, 우리가 예약한 숙소


인근의 다른 호텔이라도 찾아봐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1층 안쪽에서 문이 열리며 한 청년이 모습을 드러낸다. 우리의 수상한 움직임이 창에 비쳤던 모양이다. 스무 살 후반쯤 되어 보이는 그는 경계와 호기심이 섞인 얼굴로 묻는다.

"What are you doing?"

이때 본론부터 말했어야 했는데, 나는 당황한 나머지 오늘 아침 넘어져 다쳤고, 스마트폰이 망가져 예약 정보를 확인할 수 없으며, 그래서 지금 난처한 상황이라는 이야기까지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았다. 말을 듣던 청년의 고개가 삐딱하다.

"What?"

내가 너무 장황했음을 그때서야 깨닫는다. 나는 곧바로 본론으로 돌아가 말한다.

"여기를 에어비앤비로 예약했는데, 폰이 망가져서 확인을 못해요. 여기가 에어비앤비 숙소 맞나요?"

잠시 생각하던 그는 뭔가 알았다는 듯 크게 웃음을 터뜨린다. 그는 곧바로 대문의 잠금장치를 풀고 우리를 맞아준다. 알고 보니 본인도 이 숙소를 예약한 사람이며, 1층에 머문다는 것이다. 그는 2층이 주인집인 줄 알았는데, 그곳이 우리가 예약한 룸일 줄은 몰랐다며 웃었다. 우리 역시 그가 주인인 줄 알았다며 마주 웃었다.

휴, 살았다.


2층으로 올라가야 하는 상황에서, 그는 내가 손을 다쳐 불편한 것을 알고 짐을 들어 옮겨준다. 그가 낮에 집에 없었더라면, 혹은 밖을 나와보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어떻게 됐을까. 정말 고마운 인연이다. 2층 문에는 열쇠가 꽂혀 있다. 햇볕을 받아 반짝이는 열쇠를 잡는 순간, 온몸의 힘이 빠진다. 지쳤다.


5.

J가 짐을 푸는 동안, 나는 침대에 몸을 눕히고 한동안 쉰다. 손바닥과 무릎이 후끈거려 밴드를 살짝 연다. 아침에 했던 소독과 비상약이 주효했는지, 진물은 멈춘 상태다. 병원까지 갈 상황은 아닌 듯하다. 다시 한번 상처 주변을 조심스럽게 소독하고 새 밴드를 붙인다. 캐리어를 끌고 한낮의 25~26도 기온을 헤치며 이동한 탓인지, 상처 부위가 계속 후끈거린다.


원래 계획은 이라클리온 고고학 박물관을 먼저 둘러본 뒤, 해 질 무렵 카잔차키스의 묘소를 방문하는 것이었다. 크노소스 유적지를 대신해 가보려 했던 고고학 박물관은 미노아 문명을 대표하는 유물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크레타의 고대사가 가장 밀도있게 정리된 공간이다. 크노소스 궁전의 프레스코, 파이스토스 원반, 미노아 여신상 같은 유물들을 통해 이 섬이 얼마나 이른 시기에 독자적인 문명을 꽃피웠는지를 보여준다. 이라클리온에 간다면 반드시 들러야 할 곳으로 일찍부터 점찍어 둔 곳이다.

하지만 오늘의 일정은 '여기까지'다. 무사히 이곳에 도착한 것으로 임무를 종료키로 한다. 내일 가보려 했던 카잔차키스의 고향 마을 미르티아(Myrtia) 방문도 취소가 불가피해 보인다. 아쉽지만, '포기'도 선택 중 하나다.


생각할수록 아이러니하다. 여행 내내 체력을 잘 유지하려고 아침마다 러닝을 했는데, 그 러닝 중에 부상을 입어 제대로 걷지도 못하다니... '인생사 새옹지마'라면, 다음엔 뜻밖의 행운이 올 차례라고 생각하며 혼자 웃어본다.

아니다! 하루를 되짚어보니 큰 부상이 아니라는 점도, 스마트폰이 망가진 상황에서도 숙소를 잘 찾아온 것도, 그리고 친절한 아랫집 여행자를 만난 것도 이미 내게 행운이었다. 실수든 불운이든 이미 다 지난 일이다. 여기까지 잘 왔다는 사실이 새삼 뭉클하고 감사하다.


출발할 때부터 맥주 안주로 지니고 다녔던 김부각. 마지막 여행지까지 살아 왔으나 이제 고소함만 남기고 사라져야 할 때가 되었다. (이라클리온 숙소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