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었음을
“아이 참. 쌤은 유치하게 왜 그래요 어른이. 꼭 내 친구 같다. 쌤 우리 친구 먹어요ㅋㅋ”
“놀고 있네. 맞을라구? 맨날 나만 보면 먹을 거 사달라고 하잖아. 친구 말고 호구 아님?”
“ㅋㅋㅋ들킴ㅋㅋ”
“아유, 이걸 그냥.”
“ㅋㅋ 쌤 좋음ㅋ 저 나-중에 대학교 가면 진짜 친구 해요ㅎ”
나만 보면 맥도날드 가자, 롯데리아 가자, 어디 뭐 먹으러 가자고 노래 부르는 개구쟁이 학생과의 대화. 귀여워서 한참 피식거리며 웃었다. 그러다 문득 몇 년 전, 비슷한 장면이 떠올랐다. 뒤이어 추억과 감정이 밀려왔다. 잘 지내고 있을까, 그 사람.
“너 마음에 든다. 우리 친구 하자.”
“에? 뭐에요 갑자기. 만화 대사 같은 소리 하네. 나이 차이도 많이 나고.”
“그게 뭐 대수야? 니가 더 원할걸?” 그가 말했다.
“맞아요.” 솔직히 인정했다.
“그런데 정말 괜찮아요? 제가 너무 어린데.”
“말 잘 통하고 마음 맞으면 됐지 뭐. 나이차는 내가 감안해야겠지만. 잘 부탁해, 친구야.”
집에 돌아와 학창시절 일기장을 찾았다. 그를 만나고, 교류한 시기에 한참을 머물렀다. 몇 개월 동안 일기 대부분이 그 사람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그에 대한 생각, 느낌, 주고받은 문자, 전화통화. 이따금, 만난 날의 기록 등등. 서투르고 투박한 글씨와 글솜씨로 퍽이나 많이도 적었다. 픽 웃었다. 하여간, 사람을 너무 좋아해서 탈이라니까.
우린 학원에서 알게 됐다. 그는 보조교사, 나는 학생. 당시 막 글쓰기에 눈을 뜬지라 시도 때도 없이 노트를 펼쳐 글을 쓰곤 했다. 그가 지각(내가 아니다.)한 날도 어김없이 그랬다. 기다리다 무료해져 글을 쓰다 화장실에 갔다 왔는데, 그새 도착해 숨을 고르며 내 노트를 보고 있었다. 마치 일기 훔쳐보는, 호기심과 흥미 어린 표정으로. 빼앗으려 푸드덕거렸지만 역부족이었고- 그는 내용에 지대한 흥미를 보였고- 이야기를 좀 나누다 위의 상황 전개. 우와, 친구라니(그와 나는 7살 이상 나이 차이가 났다)?
우리는 보충을 후딱 끝내고(때로는 안 하고)다른 데 더 열심이었다. 소설, 작가, 영화, 인간관계 등에 대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다방면으로 박식했고, 또래에게 없는(정확히는, 내 또래가 가지지 못할)경험과 통찰이 있었다. 그는 '어른'이었다. 아주 멋진 어른. 금세 매료되어 깊은 애착을 가졌다. 더 많은 시간을 함께하고 싶었고, 더 깊은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이해하지 못할 행동을 거듭하며
번번이 큰 상처를 주었다.
문자를 주고받다가 갑자기 뚝 끊기거나, 만나기로 약속하고선 계속 시간을 미루다가 갑자기 펑크를 낸다거나, 심지어 잠수를 타버리는 등. 이해하기 힘든 사건의 연속이었다. 그런데 핸드폰으로든 학원에서든 다시 연락이 닿아 교류하고 있으면, 정말 잘해주었고 참 좋았다. 지난 일에 대해선 늘 진심으로 사과했기에, 다시 믿음을 가졌다. 하지만 이런 패턴은 거듭되었고, 상처가 쌓이며 관계가 차차 흐지부지되었다. 수십 번씩 되풀이했던 원망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도대체 어른이 왜 그러는 거야?’
이해하려 애썼으나 이유를 몰라 혼란스러웠다. 좋아하는만큼 상처는 점점 벌어지고 깊어졌다. 꽤 많이 울었다. 미웠다. 정말 미웠다. 세월이 흐르며 기억도 감정도 많이 마모됐지만, 이따금 생각나면 너무나 섭섭하고, 미웠다. 애증.
“쌤 저 얼마 전에 쌤한테 상처 받았어요.”
얼마 전, 개구쟁이가 지나가듯, 농담조로 말을 던졌다. 평소처럼 배시시 히히덕거리고 있기에 그냥 지나칠 뻔했다. 사뭇 진지하게 되물었다.
“그래?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해줘. 어떤 상황이었더라? 느낌이 어땠어?”
생각 없이 맨날 먹을 거나 찾는 녀석인 줄 알았는데, 의외로 속이 깊다. 감정표현은 몹시 서툴렀지만, 최대한 자세히 느낌을 말했다. 알고 보니, 내 약점.상처에서 비롯된, 같은 상처를 받았다. 나를 이해하지 못해 조금 원망하고 있었다. 참 미안했다. 상처는 끊지 않으면(치유하지 않으면)다른 이에게 고리를 형성(전이)한다더니, 사실이구나.
개구쟁이와 마주앉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네가 보기에 나는 어른이지만, 실은 아직도 자라지 못한 부분이 제법 있다'고.
여전히 마음이 아픈 데가 좀 있고, 그 상처는 언제쯤 어떻게 생긴 듯하고, 좋아지려고 어떤 노력을 해왔으며.. 그런데도 아직 많이 약하고.. 상처가 되리라 생각 못해서, 주의하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미주알고주알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개구쟁이는 진지하게 들으며 자기 이야기도 나눴다.
녀석은 다 끝나자 잠깐 머뭇거렸다. 이내 “그러니까 맛있는 거 사줘요.”라며 배시시 웃었다. 그래서 먹으러 갔다. 맛있는 거. 배부름과 함께 앙금은 사라진 듯했다. 그늘 없는 미소가 참 좋았다. 참 좋았다. '그'가 나를 볼 때 이런 기분이었을까?
방으로 돌아와 누웠다. 눈을 지그시 감고 그 사람을 떠올렸다.
이젠 원망하지 않는다. 그를 용서했다. 워낙 좋아하고 따랐기에 상처가 당장 온전히 씻기지는 않겠지만, 차츰 사라지리라. ‘어른’이라고 생각했던 그도 사실은 이십대에 불과했다. 그도 성숙의 여정을 걸어가며 자신과, 자신의 상처와, 대인관계 속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어느 드라마 대사처럼 ‘미생’, 완성되지 않았음을, 그가 날 만난 나이가 돼서야 이해했다. ‘어른이잖아!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라고, 오랜 시간 소리치던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달랬다. '그 사람은..'
찬찬히 순간순간을 돌이켜보면, 이십대 그는 최선을 다했다.
그는 지금 나처럼 사람이 고프고, 때때로 마음이 아프고, 힘들고, 외로워 했었다. 그러나 나름대로 힘을 내어 마음 한 자리를 열어주었다. 나는 그 '한 자리'에서 큰 위로와 기쁨을 누렸다. 비록 상처가 제법 남았을지라도. 그에게서 세계관, 사고방식 등 여러 가지 영향을 받았다. 그는 내가 최초로 사귄 ‘나이 많은 친구’이자, 멘토였다. 덕분에 참 많이 성장했다. 지금은 멀어져 서로 연락도 않지만..
이젠 이해해요. 나도 아직 어른이 되어가고 있답니다. 긴 시간 오해해서 미안해요.
그리고 이 글을 쓰며 다시 느꼈어요. 깨달았어요. 우리가 친구 된 그날, 무척 기뻤다는 걸. 그 순간의 기쁨을 지금까지, 줄곧 간직하고 있었다는 걸. 기억은 희미해졌어도 추억은 사라지지 않았네요.
세월을 넘어 못다한 인사를 건넵니다. 고마워요, 그때 그 시절을 함께 해줘서. 우리 친구 하자고 말해줘서.
고맙습니다.
이메일 - Seryuah@naver.com
*모든 독자님께 열려 있습니다 ^^
*작가의 말
이 글, 초고는 1~2년 전쯤 썼습니다. 거기에 한 두 문단만 추가된 거예요. 그 몇 문단이 글 전체 흐름과 제가 원하는 완성도에 크게 기여했다고 느낍니다. 하지만 이와 별개로, 뭔가 계속 마음에 걸렸어요. 다시 손댈 때마다, '이미 다 완성됐잖아? 올릴까?' 질문할 때마다 번번이. 아마 시간이 필요했던 게 아닐지.
마지막 장은 1~2년 전 초고에는 없던, '추가된 한 두 문단' 중 하나니까요..
사진 출처
http://pixabay.com (이하 작가명)
표지 및 마지막: cdd20
1번: moritz320
2번: angelx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