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아버지한테 말하면 큰일 난다."
친정 엄마가 왔다. 싸다 만 보자기처럼 어설프고 낡은 엄마가 왔다. 살짝 굽은 등에는 힘없이 납작하게 눌린 백팩 하나가 붙어있었고, 손에는 소라 빵 여남은 개가 담긴 하얀 비닐봉지가 대롱거리고 있었다. 벌써 어둠이 짙게 내려앉았고 바람마저 냉기로 가득한 11월의 끝자락, 저물녘에 엄마가 우리 집에 왔다.
"내 집을 나왔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엄마는 이 한마디를 내뱉으시고는 소파에 앉아 거실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심중의 하소연을 탈탈 털어놓을 실마리를 찾으려는 게 분명했다. 이윽고 갓 돌 지난 딸아이가 아장거리며 웃고 있는 사진 앞에서 시선이 멈추었다. 아마도 이야기를 풀어갈 꼬투리로 삼으려는 듯했다. 예상대로 엄마는 이 사진 속 시절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로, 다시 가까운 과거에서 현재로 이어지는 전지적 '엄마 시점'의 물꼬를 트기 시작했다. 한 번만 더 들으면 백 번은 들었을 바로 그 하소연이 분주하게 거실 여기저기로 쏟아졌다.
딸아이가 돌을 맞은 1999년은 81세인 엄마가 지금의 내 나이와 비슷한 때이다. 나는 결혼이 좀 늦은 편이었다. 대개 남자는 서른 전에, 여자는 이십 대 초중반에 가정을 이루던 시기였으므로 29살 나의 결혼은 '노처녀'라는 짐짝을 내려놨다는 후련함이 컸을 것이다. 그런데도 결혼식장에서 엄마는 홀짝홀짝 눈물을 감추셨다. 그때 나는 엄마의 눈물이 딸을 시집보내는 엄마로서 '보여주기 위한 섭섭함'이라 여겼다. 그만큼 엄마는 딸에게 살갑지도 않았고, 따뜻한 격려를 준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내 편을 들어준 적은 더더욱 없었다. 그러니 나를 위해 우는 엄마를 상상할 수 없었다.
엄마에게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아버지한테 말하면 큰일 난다"였다. 하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 실패에 대한 두려움..... 그런 사소한 말들을 엄마에게 조심스럽게 꺼낼 때마다 돌아온 이 말은 지금까지도 나를 짓누른다. 어떤 해결책을 바랐던 것이 아니다. 적어도 "괜찮다", "그럴 수도 있다", "잘했다" 같은 온기가 필요했을 뿐이다. 엄마의 그 말은 내 안에 외로움을 차곡차곡 쌓아 올렸다.
엄마의 "아버지한테 말하면 큰일 난다"라는 단순한 금지의 어떤 말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의 강한 주술이었다. 가부장적 분위기 속에서 가족의 모든 결정권은 아버지에게 있었고, 그 결정을 거스를 때면 술의 힘을 빌린 폭력이 찾아왔다. 어린 삼 남매에게도 폭력을 휘둘렀지만, 대부분은 엄마에게 향했다. "네가 잘못 가르쳐서 그렇다", "네가 조종해서 그렇다" 같은 말 뒤엔 욕설과 손찌검이 따라왔다. 일찍 끝나면 몇 시간, 길면 반나절 동안 이어지는 아버지의 주사는 아버지가 잠들어야 끝나는 악몽이었다. 아버지는 권위를 가장한 절대 군주가 아니었다. 그저 술에 취해 미쳐 날뛰는 괴물이었다. 술은 아버지를 괴물로 만들었고, 그 괴물은 점점 엄마와 어린 삼 남매를 무력하게 만들었다.
술이 깬 아버지는 모든 걸 잊은 척하며 잘못했다 빌었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각서를 썼다. 우리에게 다정한 말투로 과자를 나눠주고 머리를 빗겨주기도 했다. 세상 어디에도 없는 다정한 아버지처럼 굴었다. 우리는 괴물인 아버지를 피해 옆집으로 달아났다가 다정한 아버지로 돌아오면 아무 일 없었던 듯 밥을 먹고, 학교에 가고, 집에 돌아와 숙제를 하고 잠드는 일상을 이어갔다. 그저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조용하게 아무 일 없이 지내는 사이 우리 삼 남매는 모두 공부 잘하고 착한 아이들로 통하고 있었다.
외로움은 점점 쌓여갔다. 벽이 되고 산이 되어도 나는 그 외로움을 외로움이라고 부르지 못했다. 아버지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다. 결혼은 아버지로부터의 도피처가 아니라 또 다른 외로움을 쌓을 거라는 생각에 독신을 고집했었다. 그러나 이 역시 "아버지한테 말하면 큰일 난다."에 굴복하고 말았다. 원룸에서 따로 살겠다는, 공부를 계속하겠다는, 학원을 운영해 보겠다는 나의 모든 발악을 엄마의 이 말에 묻어버리고 지금의 남편과 결혼을 했다. 결혼은 아버지로부터의 도피처 그 이상의 새로운 많은 것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결혼은 "아버지한테 말하면 큰일 난다."에 갇혀 살던 나에게 새로운 아버지와 엄마, 남편이라는 남자가 있는 새로운 세상이었다. 내가 중심이 되어 꾸려가야 하는 나의 작은 세계였다. 술을 전혀 마시질 못하는 새로운 아버지-시아버님은 나에게는 신기함 그 자체였다. 어떻게 남자가 술을 안 마실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도 들었으나 아버님과 남편은 술을 못 마시는 체질이었다. 그렇다고 마음대로 가족들의 의견을 묵살하는 일도 없었다. 어머니도 그저 "네가 알아서 해라"라고 모든 것을 나에게 맡기셨다. 나의 새로운 가족은 적어도 엄마처럼 "아버지한테 말하면 큰일 난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버지와 다른 시아버님, 엄마와 다른 시어머니를 보면서 엄마의 그 주술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분노는 격동하는 파도처럼 휘몰아쳤다. 아버지와 엄마가 내게 심어놓은 세계에 대한 부정은 내 뿌리 전체를 흔들었다. 그 세계를 부수고 싶었다. 나를 가두었던 엄마를 향한 분노가 오랜 시간 내 안에서 들끓었다. 몇 년을 엄마와 연락을 끊고 지냈다. 그렇게 나의 분노를 혼자 조용히 삭히면서 엄마를, 엄마의 세계를 가만히 들여다보게 되었다. 아버지한테 갇힌 엄마를 이해하기로 했다. 아버지라는 그 공포에서 어린 삼 남매를 보호하기 위해 몸부림쳤을 엄마가, 그 엄마의 두려움과 쓸쓸함이 보이기 시작했다.
엄마의 삶을 돌아보면, 엄마는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었다. 경북 청도에서 태어나 자라 아버지를 따라 강원도 태백의 광산촌으로 시집와서 광부들에게 술과 담배를 파는 작은 가게를 꾸려가며 삼 남매를 키우던 세월, 그 속에서 "아버지한테 말하면 큰일 난다"라는 말에 담겨 있던 모정이 뒤늦게야 보이기 시작했다. 그 말은 엄마가 만든 감옥이 아니라, 우리 삼 남매를 보호하려는 울타리였다는 것을 이제야 이해하게 되었다. 나는 엄마가 되어서야 조금씩 엄마를 다시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오늘, 늦가을 저물녘 소라빵 봉지를 들고 우리 집 문 앞에 선 엄마, 여전히 "아버지한테 말하면 큰일 난다."라는 말에 갇혀 살아가는 엄마가 가엾기까지 하다. 산보다 더 높은 외로움을 품고도 풀지 못한 엄마의 말은 돌처럼 굳어져, 조금씩 엄마의 등을 굽게 만드는 것만 같다. 지금부터 나는 엄마를 엄마가 아버지로부터 자신에게 걸어놓았던 그 주술에서 조금이라도 풀려날 수 있도록 돕고 싶다. 아버지의 세계로부터, 그리고 우리 삼 남매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나는 절실하게 바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