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아침 소주 대신 수영

중년 남자,동굴(소주)을 나와 수영장으로

by 반백수 남편

아침 소주 마시던 내가 수영반 '유일한 생존자'가 되기까지


중년 남자의 동굴, 소주와 폐기 안주의 루틴


2022년의 어느 즈음이었습니다. 저는 편의점 야간 일을 마치고 돌아와 아내를 출근시키면, 혼자만의 의식을 시작했습니다.

바로 '폐기 안줏거리'로 차린 '오늘의 스페셜'과 소주 한 병이죠.

냉장고에 들어 있는 폐기 샌드위치나 소시지를 펼치고, 알싸한 소주를 입에 털어 넣습니다.

커다란 TV 앞에 대자로 뻗어 전날의 야구 하이라이트를 보며 한 잔, 알쏭달쏭하게 취기가 오르면, 어느 날은 양치도 못 하고 잠자리에 들곤 했습니다.

축 늘어진 몸에서는 알코올 냄새가 맴돌았고, 햇빛은 철저히 암막 커튼으로 가린 채 오직 술기운에 의존해 잠드는 이 '동굴 생활'이 벌써 1년째였습니다.


‘이러다 정말 폐인 되겠다.’라는 걱정은 있었지만, 쉽사리 그 의식을 멈추지는 못했습니다.


저를 가장 괴롭게 했던 건, 매일 아침 출근하는 아내의 눈빛이었습니다.

그 눈빛은 한편으로는 '그렇게 살면 안 된다'라고 말리는 걱정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힘든 밤샘 노동 후 술 한 잔이 '당신에게 유일한 위안'임을 이해한다는 이중적인 연민이었습니다.


그 복잡한 눈빛이 저를 바꾸게 만든 결정적인 순간이었습니다. 저는 더 이상 그 눈빛을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술 대신 '버티는 힘'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8월의 어느 날, '오늘은 꼭 수영장에 전화하리라’ 마음먹었습니다.

코로나로 막혔던 수영 강습이 9월에 오픈한다는 소식에, 저는 생애 가장 비장한 발걸음으로 수영장으로 향했습니다.

나의 아침은 안주 봉투 대신 수영 가방을 메고, 암막 커튼이 쳐진 TV 앞이 아닌 수영장으로 향했습니다.


'저주받은 몸뚱어리'의 오뚝이 도전기


드디어 수영장 첫 수업. 초보반밖에 없는 요일이라 초보반에서 시작했지만, 이전에 평영까지 배운 적이 있어 살짝 자부심도 있었습니다.


초보반에선 내가 ‘박태환’이지 라는 오만이 생겼죠.


하지만 오랜만에 물에 들어간 몸은 저를 처절하게 배신했습니다.

물속에 들어간 저는 영락없는 '물에 빠진 돼지'였습니다. 온몸으로 물을 거부하더군요.

팔을 휘저을수록 몸은 앞으로 나아가기는커녕 꼬꾸라지기 일쑤였고,

수영장 물을 이렇게 많이 마시면 물값을 더 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 정도로 물을 마시고,

10미터만 가도 폐가 터질 듯 숨이 찼습니다.

물은 저를 띄워주는 존재가 아니라, 제 게으른 몸을 끌어내리며 중력이 수영장 안에서도 잘 작동되고 있음을 알려줬습니다.


하지만 기분이 좋았습니다. 이제는 술에 기대어 잠드는 아침이 아니라, 운동으로 땀 흘리고 잠드는 '건강한 중년'이 될 거라는 기대감 때문이었습니다.


근거 없는 자신감이 막 샘솟았죠. 강습이 없는 날도, 마치 숙제하듯 억지로라도 수영장에 갔습니다.

워낙 운동에 '젬병'이고 운동 신경은 원래 붙어있지 않던 몸뚱어리라, 남들보다 더 자주 물에 들어가도 실력은 쉽게 늘지 않았습니다.

평영의 고비를 넘어서니, 이번엔 접영이 '저주받은 몸뚱어리' 앞에 거대한 벽으로 막아섰습니다.


‘나하고 수영은 안 맞나?’라는 자괴감이 무겁게 절 가라앉혔습니다.

비 오는 날이나 눈이 많이 오는 날이면 가기 싫은 핑계를 찾다가도 수영 가방을 메고 수영장으로 갔습니다.



꾸준함엔 장사 없다. 나는 유일한 생존자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시 '소주와 암막 커튼'의 폐인 생활로 돌아갈 것 같았으니까요. 꾸준함엔 정말 장사 없더군요.


수영은 신체적 조건과 유연성이 크게 작용하는 운동입니다. 작은 신체와 뻣뻣한 몸으로 구조화된 저에겐 커다란 도전이었습니다.

유튜브 강습 영상을 돌려보고, 샤워실 거울 앞에서 팔 동작을 꾸준히 연습했습니다.

강사의 지시는 머리는 이해하는데 몸뚱어리는 모르는 체하는 날이 지나가고, 지나가는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반복 끝에, 자유형, 배영, 평영을 거쳐 접영 자세가 조금씩 잡히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막 배우는 초보들 눈에는 제가 꽤 잘하는 '선배'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에게 자세를 알려주고 싶은 숨길 수 없는 '오지랖'과 은근한 '자랑질'이 튀어나왔고, 저는 수영장에 더 자주 가고 싶어 졌습니다.


이 맛에 다니는 것이죠!.


어느덧 3년이 흐른 지금. 묵묵히 하다 보니, 저에게 가장 큰 자산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저와 같이 시작했던 회원 중, 지금까지 남아서 수영하는 사람은 제가 ‘유일’합니다.

수많은 사람이 접영 앞에서, 혹은 일상의 핑계 앞에서 포기하고 사라졌지만,


저는 더 이상 '도망치지 않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새로운 사람과 특유의 넉살로 친해지는 것은 덤이고요.

더 이상 술기운에 암막 커튼 뒤에 숨어 하루를 시작하지 않습니다. 이제 매일 아침 수영장에서 흘리는 땀과 함께, 찬란한 햇빛 아래 세상 밖으로 걸어 나섭니다.


쉰을 넘긴 인생은 지금, 꾸준함이라는 무기를 들고 가장 건강하고 재밌는 '현재 진행형(ing)'입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키 160cm 꼬마의 현재 진행형(ing) 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