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추억을 먹고 산다.
한 해가 저물어 간다. 한 장뿐인 벽걸이 달력이 외로이 걸려 있다. 한 장씩 떼어내며, 시간은 소리 없이 흘러갔나 보다. 그때는 몰랐는데, 달력에서 12라는 큰 글자를 보니 연말임을 이제야 알겠다. 밤이 되니, 크리스마스트리의 작은 전구 불빛이 알록달록 반짝이며, 차가운 몸을 따뜻하게 감싼다. 온정이 깃든 한 해로 마무리되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진다.
어제는 40년 지기 친구들을 만났다. 한 세기를 뛰어넘고 밀레니엄을 건너 1980년대에 청춘을 불태우며 대학생활을 함께 했던 지인들이다. 그때는 그랬다. 각자의 꿈과 목표를 가지고 공부하고, 연애하고 또 낭만을 즐기며 바쁘게 젊은 에너지를 발산했다. 이제 40년을 거슬러 기억의 캠퍼스로 다시 돌아가니, 그때 기억은 가물거리고 파편화된 추억이 새록새록 살아난다. 1년에 서너 번씩 주기적으로 만나는 친구들의 소소한 추억은 다시 들어도 웃음이 나고, 말하는 친구는 늘 처음 하는 이야기처럼 생생한 기억으로 더듬는다. 삶은 추억을 먹고사나 보다. 잊힌 기억보다 추억으로 살아난 기억으로 울고 웃으며 지난날을 회상한다.
연말이 다가오는 시기가 되면, 떠나는 세월이 아쉬워 모임에서 만나는 친구도 많아진다. 한 해가 저물기 전에 비록 짧은 기간일지라도 한 때 삶을 함께 했던 지인들이 보고 싶어지나 보다는 생각이 든다. 늦기 전에 만나서 곡차를 나누며 회포를 풀고, 아직 함께 할 날이 많은 만큼 추억을 되살리는 삶을 살자고 약속한다. 취기가 오르기 전엔 일상의 건강, 취미, 근황 등 소소한 이야기로 동정, 수긍, 정보공유를 하면서 삶을 나눈다. 만나지 못하는, 소식이 궁금한 지인들에 대한 근황도 주고받으면서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자리가 빛난다. 즐겁고 기분 좋은 밤이다.
취기가 오르면 과거로 추억의 기차가 달린다. 각자 그 시절에 경험했던 일 중에서 사무치게 새겨진 잊히지 않은 기억들이 추억으로 소환되어 이야깃거리로 되살아난다. 함께 공유한 경험일 수도 있고, 돌고 돌아 듣게 된 얘기도 있다. 시대를 함께 했기에 정서가 같아서 그래그래 하면서 수긍한다. 허허 너털웃음도 웃고 그래 그랬지 하면서 맞장구도 치고 점점 고조되는 취기와 함께 세월의 터널은 과거로 과거로 들어간다. 과거는 희미하게 빛이 각색되어 아름답기까지 한 추억으로 다가와 현재의 일상을 웃음으로 즐겁게 한다. 오늘 이 밤은 과거의 추억이 얼개처럼 엮여 만들어지는 삶의 한 순간으로 다가올 내일의 기억이 된다. 그래서 추억이 없으면 현재도 없고, 추억을 떠올리는 오늘이 없으면 삶은 없다.
40년 지기 친구들의 기억, 추억은 암울했던 시대상도 투영되어 있다. 이데올로기 갈등으로 시위가 일상처럼 등장하기도 했다. 시대의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시위하고 숨어 지내기도 했지만, 강의실을 벗어나 낮술을 즐기기도 하고, 당구장, 나이트클럽 등으로 가서 청춘을 불살랐던 철없는 낭만도 함께 했다. 추억은 기쁨도, 슬픔도, 고통도 모두 지난 과거의 기록으로 현재의 삶에 투영되어 그냥 그때는 그랬지 하면서 위로하고 쓴웃음을 짓게 한다. 기쁨은 기쁨대로, 슬픔과 아픔은 소리 없는 희미한 웃음으로 다가온다. 40년 지기 친구들과 나누는 추억에는 잘난 이야기가 주축이다. 좋은 일만 기억하고 싶은 욕망 때문이겠지만 말이다. 좋은 기억, 행복한 추억으로 삶은 희망을 꽃피우려 내일을 산다.
오늘의 어제 이야기는 내일, 아니 다시 먼 미래의 추억으로 소환되어 삶의 씨줄, 날줄이 되리라. 우리는 그렇게 살아간다. 과거 40여 년 치열하게 살았던 추억이 오늘을 있게 했듯이 10년 뒤, 아니 더 먼 훗날 우리는 오늘을 추억하며 빛 잃은 사진 이야기를 꺼내 또 함께 삶을 나누겠지? 주름 하나, 더 허허해진 머리카락 날리면서 연말에 만나. 그렇게 삶은 늙고 세월은 흐른다. 추억도 빛을 잃는다.
2025. 12. 05. 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