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영화 속에서 빠져나오는 법
갑자기 무슨 소리인가 싶겠지만
최근에 인상 깊게 들은 힙합 노래 가사이다.
그 노래에는 오랫동안 기억하고 싶은 가사가 있다.
나에게 해주고 싶은 선언문이 있다.
저 제목은 LOV3라는 노래 가사다. 릴모쉬핏(이휘민, 그루비룸), 식케이 등이 참여한 K-FLIP이라는 앨범 수록곡이다. 에픽하이의 Love Love Love를 샘플링한 리메이크곡이기도 하다.
세 명의 래퍼가 등장하는데, 나는 그중 오케이션 파트를 제일 좋아한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그렇다.
오케이션의 가사는 들으면 들을수록 의미가 충만하다.
여러 방향으로 해석될 수 있겠지만, 이번 글에서는 내가 느낀 바만 말해보고자 한다. (주관적 해석 100%.)
우리 길이 달라도 그런 거지 그냥,
keep smiling tho
나와 다른 모습을 마주했을 때, 그리고 그 다름이 내가 속한 무리의 교집합과 어긋날 때 우리는 자주 이렇게 생각한다.
“다르면 틀린 건가?”
나도 은연중에 그렇게 살아왔던 것 같다. 저 래퍼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다름을 웃음으로 받아들이겠다고 담담히 말한다.
그 말이 가능하려면 내 자아(코어)가 단단해야 한다. 관용은 단단한 사람에게서 나온다.
겁쟁이들이 만든 규칙, 우린 안 따라줘
대한민국은 관계주의 사회라고 불린다. 나를 관계 속에서 해석하는 경향이 강해서다. 그래서 ‘나’보다 ‘우리’를 더 많이 쓴다.
하지만 규칙이라는 건 결국 누군가가 만든 것이다. 도덕과 예의, 회피 프레임, 타인의 기준, 그런 규칙들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너무 과하게 맞추다 보면 나를 잃는다. “~일까 봐”라는 프레임 속에 스스로를 가두게 된다.
법정까지 가서 시시비비를 가릴 사안이 아니라면, 누군가에게는 관용이 필요할 수 있다. 그는 이미 자신에게 충분히 가혹했을 것이기 때문에. 스스로에게 베푸는 관용은 때때로 스스로를 구원한다.
네 말대로 네 삶이 영화라면
나는 라면 끓여, 그냥 TV 보네
너의 삶이 영화처럼 극적일 수는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그 영화를 꼭 봐야 하는 건 아니다.
영화는 자극적이고, 감정의 소용돌이가 있고, 관계의 드라마가 있다. 그런데 나는 굳이 거기에 끌려 들어가지 않겠다. 팝콘 대신 라면을 먹고 영화 대신 TV를 보겠다고 선언한다.
이건 “너를 무시하겠다”는 말이 아니라 “나는 나를 위해 살겠다”는 선언이다. 남만큼 나를 돌보고 챙기겠다는 다짐이다.
똑같은 고통을 느끼지만 이젠 있는 경치를 그대로 보네
look과 see의 차이다. look은 의지가 개입된 시선이고, see는 무의식이 반응하는 감각이다.
우리는 경치를 볼 때조차 생각을 껴넣는다. 과거의 충격, 트라우마, 상처는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렌즈 초점을 줄여버린다. 좁은 렌즈로 보면 세상은 왜곡된다.
하지만 이제 있는 경치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됐다. 왜냐고? 이제는 누군가 내 앞에서 어떤 영화를 찍든, 라면 끓여 TV를 볼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니까. 내 자아가 단단해졌고, 남의 눈치를 덜 보게 되었으니까.
이 노래를 들으면서 떠오른 영화는 트루먼 쇼다. 거대한 세트장 속에서 살아가는 트루먼은 처음엔 이상함을 못 느끼다가 점점 세계관이 가짜라는 걸 깨닫는다.
트루먼은 두 세계 앞에 선다. 편안하지만 가짜인 울타리, 그리고 위험하지만 진짜인 바깥.
PD는 말한다. “그 바깥은 위험하다. 예측할 수 없다.”
하지만 트루먼은 담담하게 말한다.
In case I don’t see ya,
good afternoon, good evening,
and good night.
담담하게 미소 짓고 세트장을 떠나간다.
우리도 그렇다. 관계라는 울타리, 익숙한 감정의 틀.
편안할 때도 있지만 어쩌면 나를 옥죄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 옥죄는 불편함에 길들여진 채로.
그 울타리를 벗어나려는 순간 누군가, 또는 내 과거가 겁을 준다.
“미지의 세계는 무섭다.”
“어두운 방 안엔 괴물이 있다.”
하지만 막상 방을 밝히면 괴물은 내 그림자일 뿐이다.
그러니, 누군가 내 앞에서 그들만의 영화를 찍는다면
굳이 보지 않아도 된다. 그 영화 속 배우로 캐스팅될 필요도 없다.
그냥 라면 끓이고 TV 보자. 나를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