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업하는 사람에게 가장 두려운 일은 바로 예상치 못한 변수라는 것이다.
- 믿을 수 없겠지만 등장인물들과 회사명을 제외한 대부분의 주요 내용은 현실에 기반한 이야기입니다.
* 부라퀴 : 자신에게 이로운 일이면 기를 쓰고 덤비는 자들을 일컫는 우리말입니다.
목소리는 낮았고, 표정은 심각했다. 이럴 땐 대체로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무슨 일입니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정 팀장님은 아셔야 할 것 같아서요. 새 부회장님 오십니다.”
진규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 누가요?”
“신경욱 부회장님이라는 분이요. 다음 주부터 출근이십니다.”
“다음 주요? 지금 목요일 저녁인데요.”
진규의 말끝이 허공에 흩어졌다.
“이런 중요한 인사를 이렇게 느닷없이요? 언론에도 내야 하는데, 인사 발표 자료는요?”
“저희도 아직 ... 통보만 좀 전에 받았습니다.”
진규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이 회사는 늘 그랬다. 중요한 일일수록 뒤늦게, 대충, 누군가의 기분으로 결정됐다.
“어떤 분이신데요? 주요 경력은요?”
“서진건설 출신이시래요. 총무부로 시작해서 사장까지 하셨답니다.”
“그럼 건설 하나만요? 다른 경험은 없고요?”
“네.”
진규는 헛웃음을 삼켰다.
“우린 제조업에 M&A, 재무, 투자, 부동산 안 건드린 영역이 없는데... 온리 건설이라. 활동영역이랄 게 없으시네.”
“조 부사장님이 직접 결정하셨다고 합니다.”
오준기가 문득 주위를 살폈다. 누가 들을까, 목소리를 한 톤 더 낮췄다.
“정 팀장님만 아세요. 제가 서진 노조위원장이랑 좀 아는 사이거든요.”
진규가 고개를 들었다.
“그래서요?”
“별명이 ‘대리급 상무이사’, ‘대리급 대표이사’였답니다.”
“…….”
짧은 침묵이 흘렀다. 진규는 소리 없이 웃었다.
“딱 그림이 그려지네요.”
진규는 쌀알이 머리에 떠올랐다.
머릿속을 아무리 뒤져봐도 좁쌀이랑 연결되는 이미지가 들어 있지 않았다. 생각으로 그릴 수 있는 가장 작은 한 톨이 쌀알이었다. 그 쌀알보다 몇 배는 더 작은 게 좁쌀.
‘대리급 상무.’
‘좁쌀 영감.’
한번 그려진 쌀알 이미지가 대화 내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회사는 불타고 있었다. 그 불길 속에 던져진 소방수가, 소방호스가 아니라 종이컵을 들고 깔짝거릴 것만 같았다.
진규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팀장님, 어쩌죠? 특급 소방수를 기대했는데, 블론세이브가 걱정이네요.”
진규의 말에 오준기가 피식 웃었다.
“그러게요. 이 불, 꺼질까요?”
“글쎄요. 불길을 잡기는커녕 백드래프트에 홀라당 할지도 모르겠네요.”
창 밖 하늘은 흐렸고, 그 흐림이 꼭 지금 회사의 분위기 같았다.
월요일 아침.
새로운 한 주의 시작, 그리고 새 부회장의 첫 출근 날.
진규는 새벽같이 출근해 보도자료에 매달렸다.
수십 번을 읽었지만, 뭘 더 넣을만한 게 없었다. 빈약한 내용일수록 손이 더 오래갔다.
‘경력: 前 서진건설 사장.’
그게 전부였다.
‘짧을수록 어려운 게 인생이고, 보도자료야.’
진규는 허탈하게 혼잣말을 했다.
오전 9시, 뉴스가 나가자마자 전화통에 불이 났다.
- “신임 부회장님은 어떤 분이세요?”
- “재무개선 계획은 어떻게 바뀌나요?”
- “특별한 능력이나 경력이 있으신가요?”
- "어떻게 한국기공그룹의 부회장님으로 오시게 됐나요?"
진규는 말끝을 삼켰다. 꿀을 먹지도 않았는데.
“중요한 건, 저희가 지금까지 해오던 걸 계속하는 거 아닐까요? 따뜻한 무관심으로 조금 지켜봐 주세요.”
그게 그가 할 수 있는 가장 무해한 거짓말이었다.
이 바닥에서 살아남는 길은 단 하나, 여론의 따뜻한 무관심이 유일했다.
신경욱은 생각보다 더 일찍 도착했다.
작달막한 키, 흰머리, 주름 가득한 얼굴에 꽉 다문 입술.
그리고 ‘아무 일도 안 하면서 아주 부지런한’ 사람이었다.
오전 내내 그는 조진혁 부사장과 차만 마셨다. 말보단 ‘위치’가 편한 사람이었다.
‘서진에서 버텼는데, 한국기공쯤이야.’
그의 어깨는 이미 올라가 있었다.
오후 세 시, 첫 미팅은 구조조정본부 전체 업무보고.
대회의실에는 숨소리마저 조심스러웠다. 누구는 자료 가득한 결재판을 펴고, 누구는 입술을 깨물었다.
진규는 피곤이 목까지 차 올랐다. 점심 때도 기자들을 만나서 읍소하고 다녔다.
‘따뜻한 무관심 좀 간절히 바랍니다.’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몸이 축축 처졌다. 손가락을 빠져나가는 묽은 밀가루 반죽처럼. 받쳐주는 의자가 없다면 그냥 바닥에 널브러질 것 같았다. 게다가 감기가 오려는지 시린 눈에 코도 꽉 막혀 숨쉬기가 버거웠다.
‘두 시간만 버티자.’
주문을 걸었다. 왼손 엄지와 검지로 코를 잡아 틀어막았다.
“거두절미하고 본론으로 갑시다.”
신경욱의 첫마디였다. 가래 낀 듯한 목소리.
순간 임원들은 일제히 ‘해바라기 미소’를 장착했다.
진규는 고개를 숙였다. 그 미소의 냄새가 너무 지독했다.
그때였다.
멀찍이 진규의 건너편에 앉아 있던 오준기의 수상한 행동.
처음엔 무심하게 휴대폰을 열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안색이 확 변해서 벌떡 일어섰다.
'무슨 경을 치려고? 지금이 어떤 시간인데.'
이런 생각을 할 때, 오준기는 신경욱에게 급히 다가갔고, 휴대폰 화면을 그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첫날부터 돌출 행동.
'뭐 하는 거지?'
순간, 공기가 멈췄다. 신경욱의 얼굴이 대번에 굳었다. 그는 말없이 손만 까딱했다.
다음 순간 오준기는 회의실 입구 쪽으로 뛰쳐나갔다. 그가 막 문고리를 잡고 나서려 할 때였다. 신경욱의 신경질이 진규에게 꽂혔다.
“홍보팀장은 뭐 해? 같이 안 가?”
진규는 반사적으로 몸이 움직였다. 생각은 나중이고 일단 튀어 나가는 게 먼저였다.
'뭐지?'
축 늘어졌던 몸이 자신도 모르게 확 깨어났다. 번개에 맞아 한꺼번에 충전되듯.
“예, 바로 가겠습니다.”
펼쳐 놓은 결재판과 서류들을 한꺼번에 옆에 끼고, 뛰어 나갔다.
밑도 끝도 없이 헐레벌떡. 곧바로 오준기 뒤를 쫓아 계단을 뛰어올랐다.
“무슨 일입니까?”
대답은 없었다.
헐떡거리는 숨, 울리는 발소리.
몇 개 층을 뛰어올랐는지 셀 수 없는 상황. 순식간에 달궈진 온몸에선 땀이 돋았다.
“오 팀장님.”
“……”
오준기의 이런 모습은 지금껏 본 적이 없었다. 알 수 없는 불길함이 진규의 온몸을 짓눌렀다.
‘대체 뭔 일인 거야?’
헉헉거리는 숨결 사이로 불길한 의문이 계속 일었다.
오준기는 11층. 뒤따르는 진규는 10층에서 무겁게 불타는 허벅지를 억지로 한 계단 한 계단 올릴 때.
계단실 문을 여는 소리. 그리곤.
“팀장님. 스톱!”
다급한 오준기의 외침이 울렸다.
순간, 냄새가 진규를 덮쳤다. 머릿속마저 하얗게 얼음이 된 그의 온몸에 달라붙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냄새. 단 한 번의 숨으로 직감했다.
'죽음.'
단 한 번도 맡아보지 못한 지독한 냄새. 그 냄새 하나로 지금 오준기가 마주하고 있는 11층 계단실이 그려졌다.
“아이 참. 이게 뭐야, 진짜!”
오준기의 절규에 가까운 탄식이 계단 전체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일요일 31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