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오로지 살아남는 쪽만이 옳았다.

사업하는 사람에게 가장 두려운 일은 바로 예상치 못한 변수라는 것이다.

by 부라퀴버스터

- 믿을 수 없겠지만 등장인물들과 회사명을 제외한 대부분의 주요 내용은 현실에 기반한 이야기입니다.

* 부라퀴 : 자신에게 이로운 일이면 기를 쓰고 덤비는 자들을 일컫는 우리말입니다.



식당을 나서니 12시 반.

햇살은 따갑고, 마음은 서늘했다. 술도 깰 겸 천천히 걸었다.

인국역을 지나 헌법재판소 앞길로 해서 진동초등학교까지. 혼자였다. 경훈이는 운동장 안쪽 철봉에 거꾸로 매달리기도 했고, 흙장난도 하며 놀고 있었다. 영락없는 개구쟁이 1학년의 모습 그대로.

“훈아!”

진규는 걸어가다가 운동장 가운데쯤에서 경훈일 불렀다. 그러자 경훈이 손에 묻은 흙을 막 털면서 달려왔다.

“뛰지 마, 넘어질라.”

“친구랑 놀았는데, 좀 전에 걔는 갔어.”

“그래. 얼른 가자.”

교문을 나서며, 진규는 아이의 머리를 잡고 뒤로 돌렸다. 학교를 한 번 더 보게 했다. ‘다음에 또 오자’란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럴 일 없으니까.


택시 안.

진규는 슬슬 빌드업을 시작했다. 이사 갈 집을 모른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고 자연스럽게 알아내야 하니까.

“훈아, 새 집 맘에 들어?”

“응. 지금 집보다 훨씬 좋아.”

“너 거기 혼자 찾아갈 수 있겠어?”

“당연하지. 202동 302호.”

단박에 튀어나왔다. 똘똘한 경훈의 답은 거침이 없었고, 아빠는 새 집이 어딘지 모른다는 생각 같은 건 애초부터 하지 않았을 테니.

진규는 그 숫자를 속으로 되뇌었다. 202. 302.

아내의 인내, 아이의 기억. 그리고 자신의 부재. 창밖을 보니 하늘이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다. 이사한 건 집뿐인데, 왜 마음은 그대로 낡은 자리였을까.



한국기공그룹은 이상했다.

누가 봐도 공기가 달라졌다. 말 끝마다 충성이고, 눈빛마다 계산이었다.

소식통에 의하면 배정오는 곧 구속될 예정이었다.

사람들은 이상할 만큼 빨라졌다. 서로 티는 내지 않아도 두 세 다리 건너 그 소식을 다들 듣고 있었다.

두려움이 사라진 자리엔, 충성 경쟁이 피어났다. 죽은 권력 앞에서만 모두가 솔직해진다.

누구보다 요란한 자들은, 배정오가 가장 아꼈던, 우기남 상무와 최강식 상무였다.

충성 대상을 순식간에 갈아치웠다.

이제 배정오를 욕했다. 그의 말투, 그의 사치, 그의 오만까지. 조진혁 부사장 앞에서라면 뭐든 불태울 기세로. 수없이 많은 날들동안 했던 그 많은 말들이 어디 간 것도 아닌데.

진규는 웃음이 나왔다. 이 정도면 코미디였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다들 알아서 배역을 맡았다. 주연 조진혁에 나머지는 조연.

근본 없는 시나리오는 헷갈리기만 했다.

조연들 연기가 바껴서 주연이 달라진 건지, 주연이 풍기는 분위기가 달라져서 조연들이 거기에 맞춘 건지.


회의가 끝난 뒤, 김성운과 뒷골목으로 향했다. 흡연장보다는 이곳이 편했다. 회사의 눈도, 귀도 닿지 않는 좁은 골목.

진규가 먼저 말을 꺼냈다.

“상무님, 요즘 분위기 …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김성운은 담배에 불을 붙이며 피식 웃었다.

“배 부회장 힘 빠지니까 다 저러는 거지. 강 건너 불 보듯 하자는 거야.”

“조 부사장 앞에서는 다들 말이 달라집니다.”

“입만 살아 있잖아. 책임질 생각은 없고.”

“그러다가도 정작 진짜 배 부회장 얘기 나오면 다 입을 다물어요. 마치 그런 사람 없었던 것처럼.”

“있을 때 좀 제대로 하지. 이제 와서 욕한들 뭐가 달라지겠냐?”

담배 연기가 흩어졌다. 둘 다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 연기 사이로 회사의 썩은 냄새가 묻어 나오는 듯했다. 진규가 낮게 물었다.

“지금 분위기라면 … 해 먹은 얘기도 곧 나오겠죠?”

“그럴 거야.”

“결국 조 부사장 앞에서 진흙탕 싸움 하게 되지 않을까요?”

“말은 그렇게 해도, 진짜로 뛰어들 놈은 없을 거야. 다들 일단 구경만 하겠지.”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그 다음?”

“언론이 알게 되면 … 회사 전체가 끝장 아닙니까?”

김성운이 짧게 웃었다. 웃음이라기보다 한숨에 가까웠다.

“지금까지 운전대 잡은 놈이 뒷주머니 채웠다면, 이 차는 이미 브레이크 없는 거야.”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살려는 놈이 이기는 거겠지.”

마지막 한 모금을 천천히 내뱉으며, 김성운은 담배를 손가락으로 비벼 껐다.

“이제 가자.”

“……같이 살아야죠, 상무님은 ……..”

진규는 그 말을 끝내고 싶었지만, 입술이 붙었다.

‘배정오가 낙인을 찍었고, 승냥이 떼가 물어뜯으려 몰려들 수도 있어요.’

그걸 꺼내는 순간,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날 배정오와의 마지막 식사에서 특별히 김성운에게만 인사를 차렸다는. 배정오를 잔뜩 묻혀놨다는. 그 자리가 오해의 시작이었다는 얘기.

걸음이 유난히 무거웠다. 비가 올 것도 아닌데, 공기가 눅눅했다. 그 사이 사이에 밴 냄새, 사람 냄새가 아니라 권력의 냄새였다.


선장이 사라진 배, 한국기공은 이미 표류 중이었다. 바깥은 폭풍이었다.

배정오가 구속된 사실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의 퇴임 이후 언론은 하루도 쉬지 않았다. 신문, 방송, 온라인, 주식 커뮤니티까지 모두가 한 목소리로 말했다.

- “한국기공은 이제 끝났다.”

뭘 팔아서 부채를 갚아도, 숫자는 오히려 더 나빠졌다.

자산이 줄어들수록 부채율은 가파르게 상승했다. 그 단순한 수학을 언론은 매일같이 계산했다.

그들은 몰랐다. 숫자 뒤에 피가 얼마나 묻어 있는지. 그리고 진규가 그 피를 닦으러 얼마나 많은 편집국을 돌고 있는지.


진규는 오늘도 기자들을 만났다. 커피 대신 한숨을 삼키며, 웃음을 팔았고 아량에 기댔다.

- “제발 톤만 좀 낮춰주세요.”

- “저희도 서로 더 섹시하게 쓰려는 상황은 압니다.”

- “다음 기사엔 제목이라도 좀 순하게 가시죠.”

- "부디 따뜻한 무관심 좀 부탁 드립니다."

안 되면 바짓가랑이라도 잡고 늘어졌다. 차 마시고, 밥 먹고, 술 마시고, 술 마시고 그게 안 되면 또 술을 마셨다. 웃는 얼굴에 침 못뱉는 법, 욕 먹어도 찰거머리로 생글거리며 먹고 또 먹고, 마시고 또 마셨다.

가끔은 기자들이 먼저 그를 찾기도 했다.

“정 팀장, 이번 건은 우리가 알아서 조정할게.”

매일 얼굴을 비춘다는 건, 결국 신뢰를 쌓는 것이었다. 돈보다, 실력보다, 더 오래 남는 신뢰.

하지만 회사 안은 달랐다. 바깥의 폭풍보다 안쪽의 회오리 바람이 더 매서웠다. 임원들은 살기 위해 달라붙었다. 누군가를 밟아야 누군가가 뜰 수 있었다. 그리고.

표적이 정해졌다.

‘단 한번도 그의 그림자도 오른팔이었던 적도 없었지만. 마지막에 배정오가 잔뜩 묻어버린...'

김성운 상무.

중국집에서의 마지막 식사 후부터 그렇게 불렸다.

그 말 한마디면, 한 사람의 커리어는 끝이었다. 날이 지날수록 낙인은 더 진해졌다.


조진혁 부사장은 처음엔 웃어넘겼다.

“그 양반은 나랑 오래됐잖아요.”

하지만 같은 말이 반복되고, 같은 이름이 여러 입에서 흘러나오자 표정이 달라졌다.

신상필벌. 그 단어가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보상과 벌, 둘 중 하나는 누군가 받아야 했다.

사람들은 집요하게 달려들었다.

생존이 걸린 사냥이었다.

김성운에겐 없었지만, 그들에게는 숨겨야 하는 과거가 있었다. 온도도, 정의도, 의리도 없었다. 오로지 살아남는 쪽만이 옳았다.

그 절박함이 먼저 움직였고 먼저 치게 만들었다.

진규는 그 모든 걸 보고 있었다. 언론의 칼끝보다 더 차가운 건, 내부의 시선이었다.

그날 밤, 사무실 복도를 걸으며 진규는 문득 생각했다.

‘배는 외부의 거센 파도에 침몰하는 게 아니라, 안에서 먼저 무너지는 거구나.’


“정 팀장님, 잠깐 시간 좀 괜찮으세요?”

오준기 인사팀장이 왔다.



[수요일 30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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