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업하는 사람에게 가장 두려운 일은 바로 예상치 못한 변수라는 것이다.
- 믿을 수 없겠지만 등장인물들과 회사명을 제외한 대부분의 주요 내용은 현실에 기반한 이야기입니다.
* 부라퀴 : 자신에게 이로운 일이면 기를 쓰고 덤비는 자들을 일컫는 우리말입니다.
그날도, 진규는 하루 종일 뛰었다. 신문사, 방송국, 인터넷매체, 통신사까지. 발바닥이 불이 나도록.
퇴근 무렵에야 회사로 돌아왔을 때, 책상 위엔 커피도 식고 보고서도 식어 있었다.
목이라도 축이려 물 한잔을 받으려던 그때, 전화가 울렸다.
‘송주오.’
잠깐 망설였다. 시선을 돌렸던 터라 잠시 잊고 있던 이름이었다. 눈동자가 흔들렸고, 속에서 뜨거운 게 훅 치밀었다.
'해도 너무 한다. 정말. 시도 때도 없어. 숨 좀 쉬자.'
그래도 전화를 받았다. 아직도 배정오 때문에 질척거리면 대형사고였다.
“팀장님, 바쁘신데 죄송합니다. 지금 회사 앞입니다.”
쿨럭.
입에 머금었던 물을 넘기지 못하고 뱉어냈다.
‘뭐야 이거? 회사로 쳐들어 와? 설마 아직 배정오를?’
순간적으로 소름이 돋으며 심장이 쪼였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입 안에서 말이 뱅뱅 돌기만 했다.
“… 예? 지… 지금요?”
“차 한잔 하시죠. 제가 사 드릴게요.”
“예? … 안 그래도 담배 한 대 하려던 참이라. 내려 갈게요.”
기자들이 ‘제가 살게요’라고 말할 때, 그건 대체로 거짓말이거나 거래였다.
지금은 회사 문 앞을 지키고 있는 상황, 퇴로가 없었다. 진규는 일단 내려갔다. 속이 울렁거렸다. 토할 것만 같은 속불편함 때문에 몇 번이나 꺽꺽댔다. 엘리베이터에 탄 사람들이 눈쌀을 찌푸리며 진규에게서 한뼘이라도 멀어지려 종종거렸다.
1층 로비 유리문 너머, 송주오 기자가 서 있었다.
해맑게. 너무 해맑은 표정으로. 섣불리 나설 수도, 물러설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행동할 수도 없었다.
‘두드리고 짚어봐야 한다.’
진규는 한숨을 두 번, 천천히 내쉬었다. 명치 아래를 주먹으로 두드렸다. 그리고, 미소를 걸었다.
“아이고, 송 기자님. 이 시간에 어쩐 일이세요?”
“팀장님께 한잔 사 드리려고요. 진짜로요.”
그 말이 이상하게 들렸다. 기자는 절대 ‘진짜로요’ 같은 말을 안 한다. 그래서 더 의심스러웠다.
커피숍으로 자리를 옮겼다. 계산은 진규가 했다. 그게 세상의 균형이었다. 마주 앉은 송주오는 연신 웃었다. 입꼬리가 귀까지 닿을 듯했다.
“좋은 일 있으세요?”
“그렇게 보이세요?”
“네. 오늘은 좀, 해피해 보이시네요.”
“덕분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인센티브라는 걸 받았어요.”
“오, 축하드립니다. 근데 덕분이라니요?”
“지난번에 팀장님이 주신 자료요. 강원도 쪽으로 좀 더 파서 썼거든요. 특종 났습니다.”
“특종?”
“방송이며 일간지며 다 제쳤어요. 국장님이 인센티브 두둑하게 주셨고요. 정 팀장님께 한턱 잘 대접하라며 명령하셨습니다.”
진규는 잠시 말을 잃었다. ‘대접 명령’이라니. 기자의 입에서 그 단어가 나올 줄은 몰랐다.
“덕분은요.”
그는 담담히 웃었다. 그제야 진규는 돋았던 소름이 가라앉고 숨이 돌아왔다.
“저는 그냥 제보만 했을 뿐이에요. 기사야 송 기자님이 만든 거죠.”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속으론 조금 다른 생각이었다. 그 자료는 눈을 돌리게 하려던 미끼였다.
미끼를 투척한 뒤론 매일 전쟁상황이라 송주오나 화인전자유통 기사 검색 같은 건 머릿속에 넣어둘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게, 진짜 특종이 됐다. 진규가 거의 다 쓰다시피 했지만 그래도 운이 좋았고, 어쩌면 위험했다.
“조만간 한잔 합시다.”
진규가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주제넘지만, 충고 하나 드려도 될까요?”
“네, 말씀하세요.”
“기사 계속 모으세요. 그런 깊이 있는 기사. 그게 나중에 기자님 인생 바꿉니다.”
송주오는 고개를 숙였다. 그 눈빛엔, 이상하게도 존경과 경계가 함께 있었다.
“예… 잘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 순간, 진규는 느꼈다. 이 기자, 단순히 기뻐하는 게 아니었다. 무언가 알고 있었다. 그게 아니라면....
화인전자유통을 박살 냈으니 결국 현성그룹엔 득이었다. 끈 떨어졌어도 친정은 친정. 실제 현성그룹이라기보다 박태희 과장 선물이었다. 보답으로 그녀의 눈웃음 한 번이면.
점심 약속이 있어 일찌감치 인사동으로 향했다.
이사하는 날이라 오후는 반차를 냈다. 목적지는 끝내주는 생태탕집이라 붐비기 전에 도착하고 싶었다.
오랜만의 만남이었다. 국민경제 문효식 차장.
유력지는 아니지만, 이름값보다 현장을 더 믿는 기자였다. 데스크 자리에 갈 수도 있었지만, 그는 굳이 ‘현장이 더 좋다’며 고개를 저었다.
그를 오래 전, 송진우 회장 소송 때 처음 만났다. 대검 기자실에서.
폭풍 같던 그 사건 이후, 둘은 같은 방향이었다. 진규는 기업 홍보, 문효식은 산업부 기자로.
살짝 찌그러진 뚜껑을 열자 생태탕 냄비에서 물씬 김이 피어올랐다. 그 사이로 문효식은 소맥을 섞으며 반가운 웃음을 지었다.
“이 집은 여전하네. 자, 끓기 전에 먼저 시원하게.”
잔이 부딪히며 묘하게 익숙한 리듬이 났다.
진규는 자꾸 마음 한 구석이 걸렸다. 무언가 … 중요한 게 있었는데.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이야. 참 세월 빠르네요. 대검 기자실에서 버벅댈 때가 엊그제 같은데.”
“그러게, 난 법조에 너무 있었어. 그래도 산업부에서 또 정 팀장이 있어 든든해.”
“아이고, 별말씀을요.”
“한국기공 일이라면 내가 빤스 벗고 도와줄 테니까, 말만 해.”
“너무 감사합니다.”
문효식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정도면 대성공.
함께 했던 많은 시간만큼 에피소드가 끊어질 틈이 없었다.
그런데 진규는 아까부터 계속 찜찜하게 뭔가 명치에 걸려 있었다. 묵지근하게.
'뭐지? .... 이게 뭘까?'
뭔가 있기는 한데 그게 뭔지는.... 도무지 생각이.
“우리 오래 가자고. 자 한잔 더.”
“예. 제발 오래오래 도와주십시오.”
밥을 먹으면서도 많은 얘기를 주고받았다.
몇 잔 더 서로 권하고 마셨다. 점심이라 가볍게 오부오부.
“여기요. 이모. 여기 알과 곤이 추가요.”
진규가 몸을 돌려 추가 주문을 하고 돌아 앉으려 할 때였다.
왼쪽 팔꿈치가 맥주잔을 툭 건드렸다. 깜짝 놀라 잔이 넘어지려는 걸 급히 붙잡았다.
'휴, 하마트면...'
그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으악! 이럴 수가? 집이 어디지? 오늘이 이삿날인데 아직 집도 모르다니, 어이 없네. 이게 말이 돼?’
그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난처함. 차라리 절망감이라고나 할까. 놀랍기도, 허무하기도 했다.
몇 달 전부터 윤현숙이 집 보러 다녔을 때도, 계약을 하고 나서도, 그리고 시도 때도 없이 집이 어쩌고 하면서 노래를 불렀을 때도. 며칠 전에도 어머니와 애들까지 총출동해서 청소하러 간다고 했는데, 흘려듣기만 했다.
"일찍 와. 이삿짐센터에서 아홉시까지 오기로 했어."
아침에 출근하는 진규의 뒷통수에도 윤현숙의 말이 꽂혔다.
"오케이. 반차하고 그쪽으로 갈게."
진규는 너무나 자연스레 대답하면서 구두를 신었다.
하지만 현관을 나서면서 바로 전투모드. 머릿속 모든 게 한국기공으로 리셋. 다른 생각은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었다.
'그렇다고 전화해서 집이 어디냐고 어떻게 물어봐?'
입술을 깨물었다. 웃을 수도, 한숨 쉴 수도 없었다. 말도 안 되는 상황.
“차장님. 오늘 차는 다음으로 미뤄도 될까요?”
“커피는 언제 마시든 상관없지. 무슨 일 있어?”
“오늘… 저희 집 이삿날입니다.”
“어이쿠. 그럼 얼른 가야지.”
“오후 반차니까 식사하고 가면 됩니다. 차장님은 두어달 전에 미리 약속 안 하면 뵐 수도 없으니.”
진규가 웃으며 넘겼지만, 속은 이미 까맣게 타고 있었다.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윤현숙.
가슴이 철렁했다. 발신 이름만으로도 훔치다 들키기라도 한 도둑처럼 온 몸이 저릿저릿 했다. 앞에 앉은 문효식의 눈치를 보며 고개를 살짝 돌려 전화를 받았다.
"자기야, 오늘 빨리 올 거지? 여기 지금 완전 전쟁이다.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어."
"...응. 당..당연하지. 오후 반차야."
“이삿짐센터 사람들이 책 많다고 얼마나 투덜대는지, 진짜. 방금 목욕비에 짜장면에 탕수육까지 시켜줬어.”
“그래, 잘했어.”
윤현숙은 대뜸 투정부터 늘어놨다.
하지만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진규는 그저 듣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힘든 아내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진규는 다시 죄책감이 밀려왔다.
'너무 무심한 거 아냐? 어떻게 주말도 없고, 집에 있어도 머릿속은 온통 회사 생각뿐이야?'
아내의 말이 귓가에 계속 맴돌았다.
"......"
이어지는 윤현숙의 투정에도 진규는 주저하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경훈이 좀 데려와. 학교 끝나면 운동장에서 놀고 있을 거야.”
“알았어. 금방 갈게.”
마침내 진규는 숨이 트였다.
다행이었다. 경훈이는 엄마 따라 몇 번 갔었다. 통화를 끝내고는 거듭 숨을 내쉬었다. 그제야 긴장했던 속이 조금 풀어져 슬며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차장님, 애 엄마가 숙제를 주네요. 초등학생인 큰 애를 좀 데리고 오래요.”
“어이쿠, 애 기다리겠다. 얼른 가서 애부터 챙겨.”
“아직 시간 있습니다. 이제 열두신 데요. 좀 우스운 얘기 하나 해드릴까요? 사실 지금도 이사 갈 새 집이 어딘지를 모릅니다. 몇 주 전부터 와이프가 입주청소다 뭐다 하면서 설레발을 쳤는데, 근데 좀 전까지 제가 새 집이 어딘지를 모른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습니다. 하하.”
“이사 갈 집을 모른다는 게 말이 돼?”
진규는 쓴웃음을 지었다.
“요즘 회사가 위기라… 온통 생각이 거기로만. 그래도 말은 안 되네요.”
문효식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정 팀장, 그런 사람 있겠지. 하지만 그게 꼭 좋은 건 아니야.”
[일요일 29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