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들 힘만 가지려 하고 책임은 나 몰라라 한다.
- 믿을 수 없겠지만 등장인물들과 회사명을 제외한 대부분의 주요 내용은 현실에 기반한 이야기입니다.
* 부라퀴 : 자신에게 이로운 일이면 기를 쓰고 덤비는 자들을 일컫는 우리말입니다.
그날, 진규는 결재를 마치고 나오는 남용석 재무팀장과 옥상으로 올라갔다.
커피 한 모금보다 먼저 나온 건, 신세 한탄이었다.
“은행 놈들 … 사람을 사람으로 안 봐요. 마른 수건도 짜겠다 이거죠.”
“그래도 버텨야죠. 여기서 버티는 게 이기는 거잖아요.”
“이기는 거? 하 … 이겨봤자, 피 한 방울 남겠어요?”
내려오는 길, 두 사람은 최강식 재무담당 상무와 마주쳤다. 잠깐의 인사 후, 진규는 남용석을 따라 재무실로 들어갔다.
"공시에 이렇게 해서 나가도 문제없겠죠?"
남용석이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숫자에 강한 남용석은 문장엔 지독하게 약했다.
"잘 썼네요. 근데 이러면 오해의 소지가 좀, 잠시만요. 볼펜이...."
겨우 세 문장.
말로는 남용석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았다.
진규는 선 채로 종이를 책상 위에 놓고, 문장을 다시 썼다. 겨우 일분 남짓. 진규는 종이를 옆으로 슬쩍 밀었다. 남용석은 희번덕거리며 진규를 봤다. 하지만 오른손은 슬며시 종이를 집었다. '설마?'를 몸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재무실에선 대여섯 명이 하루 종일 매달려도 한 줄 완성하기가 버거웠다.
"하, 참. 우린 이런 말은 약해서. 정 팀장은 자동이네, 누르면 바로 나오네."
"언제든지 얘기해요. 대신에 우린 숫자엔 잼병이라."
남용석은 손에 들고 몸을 뒤로 젖히며 몇 번이고 읽었다.
그때였다.
'이건 뭐지?'
진규는 침을 꼴깍 삼켰다. 무슨 결재 거리들이 이렇게 많은지. 수북이 쌓인 결재판들. 그중 맨 위에 펼쳐진 결재판, 사각 티슈곽 아래 서류가 눈에 들어왔다. 티슈 한 장을 뽑으며 슬쩍 곽을 옆으로 밀쳤다.
처음엔 '엥?' 그러다 '헉!' 그리고 '우와!!'
'와, 이게 뭐야?'
몇 개인지 알기도 힘든 도장들, 그것도 모자라 결재 칸 아래 여백에도 빽빽한 사인들. 보통의 다른 팀에서는 절대 볼 수 없는 기안서.
안 보는 척하면서, 곁눈질로 살폈다. 그러다가 숫자에서 눈길이 딱. 숨이 턱 막혔다. 동그라미를 셀 수가 없었다. 평생 처음 본 숫자, 한눈에 숫자가 다 들어오지도 않았다.
'...백만 천만 억.....백억 천억. 천억 원?'
괄호 안에 숫자가 한글로도 적혀있었다. 무려 칠천억 원짜리 프로젝트 기안서.
'누군 몇 십만 원짜리 사인 한 장도 욕먹고, 몇 백만 원짜리엔 숨 넘어가는데.'
비좁은 서류 한 장에 이 많은 책임과 권한을 어떻게 다 넣었을까 하는 신기함. 주관사에 자문사들, 법무법인, 회계법인 … 그냥 서류 한 장인데, 도장과 사인을 바라만 봐도 침이 꼴딱꼴딱 넘어갔고, 숨쉬기가 버거웠다.
“우와, 재무는 스케일이 다르네요. 서류 하나에 이렇게 많은 사인은 처음 봐요.”
진규는 너스레를 떨었다. 진지하면 남용석의 의심만 살뿐. 하지만 뭔가, 뭔가가 있는 게 분명했다.
“…….”
“법무에 회계에 투자자문사들까지 일곱, 여덟이에요? 이거 다 돈이잖아요.”
“이건 적은 편이에요. 많을 땐 한 장이 전부 외부기관 사인일 때도 있죠.”
진규는 웃으며 서류를 훑어보다가 한 곳에서 멈췄다. ‘정연홀딩스,’ 처음 접하는 이름이었다.
“이 회사는 뭐죠? 홀딩스라니… 이름만 봐선 모르겠네요.”
남용석의 말투가 대번에 달라졌다. 그리고 재빨리 결재판을 덮었다.
“그 회사, 고위층 투자 자문입니다. 더 알려고 하지 마세요.”
“고위층 자문이라 … 부띠끄인가요?”
“……그만하세요.”
그의 목소리는 단호했고, 표정은 굳어 있었다. 진규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마음 한편이 묘하게 불편했다.
‘정연홀딩스.’
그 이름. 잊지 않기 위해 머릿속에서 계속 되뇌었다.
- 정. 연. 홀. 딩. 스. 정. 연. 홀. 딩. 스.
“우린 회계법인만 알아요. 다른 데는 … 우리 관할이 아닙니다.”
“법무법인 말고 나머지는 관심 둘 여력도 없어요. 우리 거 하기도 벅찬데, 다른 걸 어떻게?”
그들이 내놓은 말들은 이상했다.
정연홀딩스. 이름은 낯설고, 존재는 묘했다. 파면 팔수록. 알면 알수록. 아무도 모르는 곳이었다.
회계팀도, 법무팀도, 각자 자기 구역만 알고 있었다. 구역 밖은 금지구역처럼. 아는 척도, 묻는 사람도 없었다.
'사람들이 짜고 말을 맞춘 거 같진 않은데. 거 참 이상하게도 아는 사람이 없어.'
긁어모은 조각들을 죄다 끼워 맞추면, 한가운데가 커다란 구멍이었다. 아무도 그 구멍 가까이는 가려는 엄두도 내지 않는. 신성불가침의 영역.
지난 몇 년 동안 수백, 수천억 원짜리 거래가 수두룩하게 오갔다.
기업 인수, 합병, 매각, 유상증자, 부동산이나 유가증권 투자까지. 알고 보니 모든 판 위에 늘 그 이름이 있었다. 크든 작든 돈이 오가는 모든 거래.
정연홀딩스.
없는 데 있었다. 보이지 않는데, 늘 한가운데 있었다.
진규가 입사한 뒤에도 유상증자 두 번, BW 두 번에 중간중간 회사채까지. 부동산과 계열사 매각에, 피벨리기공 건을 빼더라도 자금시장에서 조달한 것만 1조 원이 훌쩍 넘었다. 근데 그 피벨리기공 한 건에만 무려 3조 원 규모.
악 소리가 절로 나왔다.
기안 서류 한 줄, 도장 하나. 그게 돈이었다.
'정연홀딩스의 이름 아래, 흐른 돈이 얼마였을까? 다들 못 본 걸까, 안 본 걸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도대체 저 회사, 뭘 하는 곳이지? 그런데 다들 기안지에 버젓이 올라온 걸 보고도 왜?’
결국, 김성운을 불러냈다.
지하 일식집, 오래된 건물의 눅눅한 공기. 낡은 네온사인 아래, 맥주 두 잔. 잔을 부딪히지도 않은 채 술이 목으로 흘렀다.
“우연히 재무실 기안을 봤는데요. 자문사들이 엄청 많더라고요.”
“그럴 수밖에. 부동산, 유증, BW, M&A … 케이스마다 다르겠지.”
“그렇죠. 근데 정연홀딩스는, 안 바뀌더라고요. 항상 그 이름이에요.”
“그래? 그런 데가 있었나?”
기안지 사인과 도장의 경계선 바깥에 있는 김성운 역시 의외라는 반응이었다. 진규는 맥주를 한 잔 더 채웠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이상하지 않아요? 다른 자문사는 다 바뀌는데, 거긴 항상 그대로였어요.”
“담당이 있으니까 올렸겠지.”
“그렇겠죠. 그런데 고위층 자문 같은 걸 이런 식으로.... 고정 처리가 되나요?”
잠시, 정적. 김성운은 잔을 들었지만, 입에 대지 않았다.
“최종 결재권자, 늘 배 전 부회장이시죠?”
진규가 낮게 물었다.
“그럼, 매번 결재하셨을 텐데 … 모를 리가 없잖아요.”
그 말 이후로,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술잔 속 거품만 천천히 꺼져갔다. 단순한 의심이 아니었다. 그때 진규는 알았다.
‘이건 건드리면 안 되는 이름이구나.’
며칠 뒤, 김성운이 진규에게 왔다.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가서 담배 두 대만 하자.”
그 한마디에, 진규는 알았다.
‘두 대면 큰일이다. 진짜 큰일.’
지상 주차장 끝, 아무도 오지 않는 구석. 둘은 말없이 불을 붙였다. 첫 모금, 묵직한 연기가 입 안에 고였다.
“문제가 … 생각보다 어마어마할 것 같아.”
“무슨 일 또 터졌습니까?”
“아니, 엊그제 그거. 정연 말이야.”
“예. 이상하죠?”
“이상한 정도가 아니야.”
김성운의 눈빛이 어두웠다.
“배 부회장이 꽂아놓은 빨대더라.”
“빨대요?”
“그래. 피 빨아먹는 그 빨대.”
담배 끝 불빛이 순간 흔들렸다.
“정연은 … 배 부회장 와이프가 대표야. 지분은 아들, 딸. 가족들이 다 나눠 가졌어.”
진규는 숨이 턱 막혔다. 그동안 흘러간 수천억의 돈이, 고스란히 한 집안으로 들어간다. 그게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재단 김종길 사장이 알려 줬어. 그 양반, 예전에 회장님 밑에서 재무 담당이었잖아. 찍혀서 눈 밖에 났지만. 근데 회장님 돌아가시고 … 사모님 쪽으로 붙었지.”
“살아계셨으면 잘렸겠네요.”
“그랬을 거야. 근데 머리를 잘 썼지. 장례 치르며 혼란했던 와중에 사모님 옆을 지킨 건 김 사장 하나였거든.”
김성운은 엄지와 검지로 담뱃불을 껐다. 말을 하면서도 계속 껐다. 꽁초가 가루가 되어 떨어졌다. 연기가 사라지고, 대신 한숨이 흘렀다.
“김 사장이 그러더라. 회장님 돌아가신 뒤로 정연이 등장했대. 배 부회장 추천으로 딜마다.”
“그럼, 그때부터 …”
바람이 스쳤다. 연기처럼, 말도 흩어졌다.
“회장님 가신 뒤, 배 부회장은 혼란을 이용했어. M&A, 투자, 자문 … 모두 그 통로로 돈이 흘렀지.”
“그런데 아무도 몰랐다고요?”
“아니. 모르는 척한 거지. 알아도, 모르는 거지.”
진규는 웃었지만, 그 웃음엔 아무 온도도 없었다.
“수천억짜리 프로젝트면, 수수료만 수십억인데 … 이건 뭐.”
“정 팀장은 절대 나서지 마. 다칠 수도 있어.”
“전에 공장 원자재 건으로 ‘빨대’ 얘기했다가 혼났는데 … 그건 새발의 피였네요.”
김성운은 담배를 껐다. 그의 목소리가 더 낮아졌다.
“이건 혼자 못 해. 그룹, 공장, 다 엮였어. 지금은 부회장 밑에 붙어 있던 놈들이 다 조진혁 부사장 쪽으로 갔지. 살아남으려면, 감추고 공격해야 하니까.”
잠시, 정적. 그리고 김성운이 말했다.
“그건 연기가 아니야. 살기 위한 몸부림이야.”
진규는 그제야 깨달았다.
‘이 회사는 살아 있는 생물이었고, 지금 그 심장은 썩고 있어.’
[수요일 28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