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무서운 건 악이 아니야, 익숙한 침묵이지.

다들 힘만 가지려 하고 책임은 나 몰라라 한다.

by 부라퀴버스터

- 믿을 수 없겠지만 등장인물들과 회사명을 제외한 대부분의 주요 내용은 현실에 기반한 이야기입니다.

* 부라퀴 : 자신에게 이로운 일이면 기를 쓰고 덤비는 자들을 일컫는 우리말입니다.



“정 팀장님, 들으셨어요? 배정오 전 부회장 … 기소됐답니다. 동명저축은행 건으로.”

"아,,, 기소요?"

진규의 눈동자가 커졌다가 다시 작아졌다. 그러곤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회사 쪽으론 번지면 큰 일이라 법무실에서 계속 보고 있어요.”

“저도 혹시나 해서 안테나를 바짝 세우고 있는데, 아직은.”

“다행이네요.”

“다행이라기보단… 이제 시작 아닐까요?”

"예?"

"공지되는 재판이 노출되지 말라는 법도 없고, 재판 받으러 법정을 드나들다가 눈에 띌 수도."

"아..."

"엄 팀장님 쪽은 법적 공방에 관심을 가지겠지만, 여론에선 한국기공 사람이 법정에 서는 그 자체가 우리한텐 치명적이죠."

"음...."

"법무와 홍보의 차이죠. 무죄추정의 원칙? 언론은 그딴 거 개나 줘버린 지 오랩니다. 클릭 장사 하려면 일단 최대한 섹시한 죄목부터 늘어놔야 하는데, 그 단계에서 이미 천하에 쥑일 놈이 됩니다."

"그러면 진짜 큰 일인데."

"그래서 서초동 쪽에 귀를 바짝 세우고 있긴 한데. 이미 여론상 지옥행 고속열차 티켓은 끊은 셈이네요."

"힘들겠네요. 진짜 정 팀장님 존경스럽습니다. 세상이 다 아는 그걸 묻어야 하니...."

엄경식이 담배뱃불을 비벼 껐다. 바람에 재가 흩날렸다. 엄경식은 엄지와 검지를 계속 비벼댔다. 엄지 손톱 밑으로 들어간 검은 재가 거슬렸다.

진규는 조용히 창문을 올려다봤다. 멀리, 불 꺼진 부회장실, 텅 빈 방. 그 안엔 아직도 배정오의 향수가 남아 있었다.


‘배 부회장님은 저의 멘토이자 스승입니다. 이 시대의 롤모델이죠.’

이런 일이 있을 거라곤 꿈에서도 생각 못했다. 언론이 살살거리고 분위기 잡아주니 대주주인 조진혁 부사장이 우쭐했다. 멋모르고 내뱉은 그 첫마디가 지금도 뉴스에서 살아있는데, 언제든 올가미가 되어 조여올 게 뻔했다.

지금 배정오가 묻었다는 건 공멸이었다.

회사가 살려면 조진혁이 건재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배정오부터 털어내야 했다. 그건 배정오가 묻은 많은 임원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거나 마찬가지.

그래도 고름을 짜내지 못한 종기를 살로 덮는 수 밖에. 암이 될 것이 뻔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진규는 중얼거렸다.

‘진짜 무서운 건 악이 아니야. 익숙한 침묵이지.’

그리고, 그의 눈빛엔 묘한 결의가 번졌다.

무엇보다 배정오와 한 덩어리였던 한국기공의 오너인 조진혁을 떼 내어 지켜야 했다. 그게 진규 자신도 사는 길이었다. 한국기공과 함께.



“혹시 … 정진규 팀장님이신가요?”

늦은 오후.

낯선 숫자 조합이 화면 위에서 깜빡거릴 때마다, 진규는 늘 심장이 먼저 반응했다. 익숙해질 리가 없었다.

“예, 정진규 팀장입니다. 그런데 … 누구시죠?”

“아, 주간이슈 송주오 기자라고 합니다.”

그 이름,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하지만 ‘주간이슈’라는 매체명은 귀에 거슬렸다. 경영진 뒤를 캐서 협박하고, 돈으로 입을 다물게 해야하는, 그런 매체.

'아. 씨발, 지금 주간이슈? 설마?'

예전에 당했던 기억이 떠올라 진규는 짧게 숨을 내뱉었다.

“아, 이수용 국장님 잘 계시죠?”

진규는 자연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상대 의도를 파악할 때까지는 이것저것 투척해 가며 뭐라도 걸리기를 바랐다.

“요즘 통 못 뵈었네요. 통화도 많이 하고 종종 뵈었는데.”

잠깐의 정적. 전화기 너머로 기자의 숨이 끊기는 소리가 들렸다.

“… 역시, 정 팀장님. 발 넓기로 소문이 자자하시던데요.”

말 끝이 풀렸다. 하지만 곧, 기자는 본론을 던졌다.

“그게요. 배정오 부회장님 건, 아시죠?”

진규의 손끝이 떨렸다. 올 게 왔다. 다행인 건 유력 일간지가 아니라는 거였고, 불행인 건 기업의 구린내를 쫓는 하이에나인 주간이슈라는 거였다.

“예? 어떤 건 말씀이십니까?”

“배정오 부회장님. 저축은행 건으로 기소 들어갔잖아요.”


‘그 이름.’

퇴임 이후 단 한 번도 입 밖에 내고 싶지 않았던 이름이었다.

“아, 그분은 이제 회사와 상관없습니다. 한참 전에 퇴임하셨어요.”

진규는 일부러 말을 늘렸다. ‘한참’이라는 단어에 거짓이 묻었지만, 들키지 않았다. 침을 삼켰지만 숨이 넘어간 듯 호흡이 불편했다.

“그래도 부회장님이실 때 벌어진 일이잖아요. 회사 입장은 들어봐야죠.”

송주오는 어쩐지 자신감이 넘쳤다. 진규는 머릿속이 하얘졌다. 무심한 한 문장이, 회사를 수렁에 처박아 버릴 수도 있었다.

“아직 뵙지도 못했는데요 … 혹시 내일 저녁, 시간 괜찮으시면 식사하면서 이야기 나누는 게 어떨까요?”

진규의 제안은 계산된 미소처럼 부드러웠다.

“내일이요? … 좋습니다. 후배 한 명 데려가도 되죠?”

“그럼요. 두 분 다 환영입니다.”

통화가 끊기자마자 진규는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났다. 창문 너머로 내려다보이는 저녁 하늘이 유난히 낮게 깔려 있었다. 그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생각했다.

‘그냥 시키는 일만 하면 되는 직원들이 부럽다.’

그날 밤, 잠은 오지 않았다. 머릿속엔 수천 개의 단어가 스치고, 수백 개의 전략이 부서졌다. 결론은 하나였다.

‘다른 미끼를 던져야 한다.’


다음날 오전, 박태희 과장의 전화가 왔다.

“선배. 별일 없어요?”

“별일 없으면 좋겠다. 요즘은 하루하루가 피 말리는 전쟁의 연속이야.”

“하하, 우리도 그래요. 근데 … 화인전자유통 건 말이에요.”

그 이름에 진규의 눈빛이 반짝였다.

“홍 사장 그 사람, 아직도 임기 보장 타령하나?”

“그 보다요 … 숨은 게 많아요. 골프장, 강원도 땅, 전부 아들 명의. 돈 빼돌린 게 장난 아니에요.”

진규는 무심하게 웃었다.

“그런 인간들이 꼭 끝까지 버티지.”

“여론에 현성그룹이 엮이면 곤란하니까 저도 조심하고 있어요.”

그 순간이었다. 진규의 머릿속에서 퍼즐이 ‘착’ 하고 맞아떨어졌다.

‘이거다. 화인 홍 사장이면.’

박태희와의 통화에서 진규는 비로소 숨이 트였다. 오후 내내 화인전자유통을 파고들었다.

현성그룹 팀장 시절 화인전자유통 인수전에서도 진규가 마셨던 술이 한 트럭이었다. 최근 기사부터 홍정규 화인전자유통 사장 개인사까지, 먼지 한 톨까지 죄다 털었다.

프린터에 열이 올랐다. 새 박스를 가져와 프린터 카트리지에 A4지를 두둑하게 쟁여넣었다. 자료를 추리고 또 추렸다. 부족한 부분이 있지만 그게 바로 취재거리였다.

평소 뒤를 캐는 것은 진규가 하던 방식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살아야 했다.

프린터가 뜨거운 인쇄물을 오후 내내 토해냈다. 자료들이 미지의 수렁을 가리키고 있었다.


밤이 되어, 약속된 식당. 소꼬리찜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정 팀장님, 반갑습니다!”

두 명의 젊은 기자. 아직 사회의 냄새가 덜 밴 얼굴이었다.

“아이고, 이수용 국장님께 안부 여쭙더라고 전해주셨죠?”

“예, 팀장님 말씀드리니 아주 반가워하셨습니다. 현성 시절부터 잘 아신다고.”

“예, 쫌 오래됐네요. 하하.”

진규는 미소를 지었다.

“여긴 소꼬리찜이 최고입니다. 배 부르게 드시죠.”

소맥잔이 돌고, 분위기가 풀리자 진규는 차분히 운을 뗐다.

“요즘 한국기공, 진짜 힘듭니다. 수천 명이 재무개선 위해 피땀 흘리고 있어요. 그런데 퇴임한 분 소송 얘기까지 나오면 … 회사는 진짜 끝입니다.”

기자들이 숨을 죽였다. 그때, 진규가 안주머니에서 종이뭉치를 꺼냈다.

“이게 오히려 특종이 될 겁니다.”

자료가 탁자 위에 놓였다. 두 기자의 눈이 커졌다. 그 안에는 홍정규, 화인전자유통, 그리고 우진그룹 송진우 회장의 이름까지 빽빽했다. 진규의 목소리는 낮지만 단단했다.

“배정오 전 부회장보다, 지금은 이쪽이 훨씬 뜨겁습니다.”

식당 조명이 그의 얼굴을 반쯤 비추었다. 웃고 있었지만, 그 눈빛엔 피가 서려 있었다.

송주오는 술잔을 내려놓고 자료를 집어 들었다. 두어 장을 펼쳐보며 어금니를 힘주어 깨물었다. 입꼬리가 움찔했다.



한국기공의 재무개선은 은행이 바라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열한 개 시중은행으로 구성된 채권단은 결국 특단의 조치를 내렸다.

“사람을 꽂자. 직접 붙어 앉아서, 눈앞에서 보자.”

그 말이 떨어진 뒤로, 각 은행에서 한 명씩 파견되어 회사에 상주하기 시작했다.

‘감시’라는 말 대신 ‘관리’라 불렀지만, 현장은 달랐다. 결재 한 장 올리려면 마지막엔 은행 담당자의 도장까지 받아야 했다. 그들의 임시사무실 앞에는 매일, 결재판을 든 팀장들의 줄이 길게 늘어섰다. 마치 고개 숙인 순례자들처럼.



[일요일 27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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