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도둑이 떠났는데, 왜 이렇게 불안하지?

다들 힘만 가지려 하고 책임은 나 몰라라 한다.

by 부라퀴버스터

- 믿을 수 없겠지만 등장인물들과 회사명을 제외한 대부분의 주요 내용은 현실에 기반한 이야기입니다.

* 부라퀴 : 자신에게 이로운 일이면 기를 쓰고 덤비는 자들을 일컫는 우리말입니다.



날이 밝으려면 아직이었다. 하지만 다시 잠 들기는 이미 글렀다.

배정오는 서재로 갔다. 미리, 반드시 정리해둘 게 있었다. 이미 드러난 건 어쩔 수 없었다.

물 밝으로 드러난 빙하가 전부라고 믿는 놈들에겐 그만큼만 던져버리면 그만. 물 속에 있는 건 숨겨야 했다. 회사 놈들에게도 검찰 놈들에게도.

'새끼들 뛰어봤자 벼룩이지. 많이 밝혔다고 생각하겠지만, 과연 그럴까?'

날이 밝을 때까지 배정오는 자료도 계좌도 마음도 정리했다. 형기는 줄이고 주머니는 불리는 길.


진규는 밤새 서류를 뒤적였다.

어디서 새는지, 어디서 막아야 하는지. 이건 단순한 손실이 아니다. 터지면, 끝이다.

책상 위엔 전화기 하나. 전화기 너머엔 단 한 사람, 믿을 수 있는 김성운이 있었다.

“상무님, 저축은행 건이 심상치 않습니다. 검찰 쪽에서 배 부회장 이름이 계속 나옵니다.”

“…….”

“만약 이게 기사로 나오면, 한국기공은 버티기 어렵습니다.”

“그래. 우리, 이제 진짜 전쟁이 시작되는 것 같다.”

그날 새벽, 진규는 창 밖을 봤다.

어둡고, 고요하고, 하지만 바람은 이상하게 따뜻했다. 그건 폭풍 전의 바람이었다.

포위망이 점점 좁혀 들어오고 있었다.



노을이 유리창을 핏빛으로 물들였다.

그 빛 속에서 김성운이 천천히 문을 열고 사무실로 들어왔다. 굳게 앙다문 입술에 심각한 표정으로. 심상찮은 분위기에 진규가 김성운 옆으로 다가갔다.

"상무님, 무슨 일이라도?"

진규는 아무도 듣지 못하게 속삭였다. 대답 대신 김성운의 손끝이 책상 밑, 맨 아래 서랍을 가리켰다.

"......?"

거긴 진규도 알만한 것이 있었다. 봉투. 하지만 무슨 상황인지 알 수 없는 상황의 연속. 진규는 눈만 껌뻑거렸다.

“이제 … 그거, 필요 없겠어.”

김성운은 넥타이를 풀며 의자에 털썩 주저 앉았고, 한숨 같은 한 마디를 뱉어냈다.

“예? 왜요? 혹시, 누가 찔렀습니까?”

진규가 눈을 들었다.

“부회장실 임원회의 끝나고 왔어. 완전히 예상 밖이야.”

김성운의 목소리는 낮았고, 이상하게 평온했다. 마치 김이 빠져버린 압력솥처럼.

“……?”

“부회장이 … 퇴임하신대. 본인 입으로 직접 말했어.”

진규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이건 퇴임이 아냐. 잔뜩 챙겼으니 튀는 거야. 이대로 도망가면 끝인데.'

배정오의 선수에 허를 찔렸다. 진규는 온몸에 힘이 빠졌다. 지붕만 쳐다보는 똥개처럼.

배정오가 붙어 있다고 해서 자신이 직접 단죄할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연판장으로 몰아붙이고 오너가와 임원들이 합세해 나서면 무슨 수를 낼 법도 했다. 최소한 불명예 제대 정도로 걸어놓고 다음을 생각할 수 있다고 봤다. 그런데 그 바람도 물거품이라는 말이었다.

“예? 스스로요?”

김성운은 짧게 웃었다.

“그래. 스스로. 검찰 수사도 계속되고 있고 … 이제 버티기 힘든 거겠지.”

잠시 침묵. 진규의 눈동자가 흔들리더니, 묘한 씁쓸함이 번졌다.

“도망가는 거군요.”

“그래 보였어. 챙길 건 다 챙겼으니까.”

“결국, 그런 결말이네요.”

김성운은 어깨를 으쓱였다.

고양이를 잡은 건 생쥐 떼가 아니었다. 태풍이 몰아칠게 두려워 성가신 쥐떼를 떼어놓을 참이었다.

“이달 말로 정리하신댔어. 회사는 조용히 퇴임식 준비하래. 시간이 많지 않아.”

“…… 퇴임식이요? 아니 그럼, 그냥 가게 두래요?”

“...응. 조용히, 깔끔하게.”

듣는 진규도 김성운도 입맛이 썼다.



불 꺼진 대회의실. 스크린이 켜졌다.

“끼익—”

어둠 속에서 아스라이 기억을 일깨우는 음향.

오래되어 낡은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화면이 조금씩 밝아졌다.

하얗게 눈 덮인 조그만 학교. 배정오가 나온 국민학교였다.

폐교된 운동장의 모습이 멀리 풍경 속에 섞여 있었다. 이어 중, 고등학교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연신대 정문, 본관 그리고 상과대.

연신대 백주년기념관. 페이드아웃.


다시 밝아진 화면, 한국기공 공장.

벌건 쇳물에 불꽃이 튀고, 땀방울이 번쩍이며, 회사의 역사가 오버랩된다. 처음엔 다들 고개를 갸웃했지만, 이내 조용히 화면에 집중했다.

심장을 두드리는 배경음악과 함께 숨 가쁘게 펼쳐지는 한국기공 성장의 역사가 화면을 가득 채웠다.

- 그가 걸어온 33년. 그 길 위로, ‘세계 1등을 향한 도전’이란 자막이 천천히 스쳐갔다. 그리고 ……


“훌쩍, 훌쩍.”

처음엔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반복되는 그 소리는 흐느끼는 울음.

불 꺼진 대회의실에서 누군가가 터져 나오는 걸 손으로 틀어막고 꺽꺽대고 있었다.

‘누구지? 누가 이렇게.’

진규는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스크린 불빛 속에서, 맨 안쪽 자리의 주인공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배정오가 손으로 입을 막고 있었다. 눈물, 콧물, 티슈. 그의 어깨가 흔들렸다.

아무도 할 사람이 없었기에 진규가 억지로 준비할 수 밖에.

퇴임행사에서 하이라이트가 될 동영상. 배정오를 위해 멋지게 만들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 퀄리티 떨어지는 허접한 결과에 손가락질 받기는 더더욱 싫었다.

그런 동영상에 배정오가 눈물을 뚝뚝 흘렸다.

33년간 몸담았던 곳을 떠난다는 게 그의 눈물샘을 찔렀을 것이지만, 그 눈물이 터진 것이 하필 진규가 만든 동영상이었다. 어둠 속에서 흐느끼는 배정오를 바라보는 진규는 자기도 모르게 어금니에 힘이 들어갔고 입술이 일그러졌다.

'이런, 씨발. 결국 도둑놈의 새끼 감동하라고 이걸 만들다니!'

아무도 그를 위로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멀리, 아주 멀리 있는 벽을 바라봤다. 다들 그의 눈에서 흐르는 것이 악어의 눈물임을 모르지 않았다.


“제가 … 서른 세 해 동안 몸 담았던 이곳을 떠납니다.”

“…….”

퇴임인사말에서 배정오의 목소리는 떨렸다.

하지만 진규는 알았다. 그 떨림이 슬픔 때문만은 아니라는 걸. 그 자리에 앉은 임원들의 표정은 석고처럼 굳었다.

어제까지 고개 숙이던 사람들이, 오늘은 그를 보지 않았다. 그들은 마치, 누가 아직 배정오의 피를 묻히고 있는지 확인하는 표정이었다.

영상의 잔상이 사라지고 눈물을 닦아내자, 임원들의 시큰둥한 표정들이 배정오의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만원이면 불쌍히 여겨 혀를 찬다. 천만원에는 분노하고 손가락질 하지만, 백억원이면 부러워서 미칠 것이고, 천억원이 넘는다면 두려워하며 조아린다.

'니놈들, 한동안 날 몇 번이고 부인하겠지. 하지만 결국 내 발 밑에서 조아릴 하찮은 것들일뿐이야.'

눈물을 찍어냈던 휴지뭉치에 배정오는 시원하게 코를 풀었다. 그리고 손아귀에 뭉쳐 쥐고 힘을 주었다.

이어진 마지막 순서를 위해 참석자 모두 함께 식당으로 이동했다. 회사 뒤에 있는 2층짜리 중국집. 진규는 가지 않았다. 퇴임행사 준비는 진규가 해야 할 일이었지만, 굳이 식사까지야.

그의 가슴엔 껄끄러운 찜찜함이 남았다.


‘도둑이 떠났는데, 왜 이렇게 불안하지?’

한참 뒤, 문준용 총무팀장과 오준기 인사팀장이 들어왔다. 표정이 미묘했다. 문준용이 조심스럽게 진규를 회의실로 끌었다.

“중국집 분위기 … 장난 아니었습니다.”

“무슨 일 있었습니까?”

진규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문했다. 문준용은 잠시 숨을 골랐다.

“부회장이, 상무님한테 굳이 안 해도 될 말을. 이거 참.”

“뭐라 하셨는데요?”

“식사를 마무리하면서 부회장님이 인사한 것까지는 괜찮았어요.”

진규는 침을 꼴깍 삼켰다.

“그런데 그냥 인사를 끝낸 것이 아니라, 다 들으라는 듯이 김성운 상무님께만 따로 인사를 하셨어요.”

“예? 김 상무님만 따로 인사를요? 뭐라 하셨는데요?”

“김 상무, 그동안 나 때문에 정말 고생 많았어. 미안하고, 너무 고마웠어라고.”

진규의 입술이 굳었다.

“…….”

문준용이 말을 이었다.

“그 말에 … 다들 눈빛이 바뀌더라고요.”

진규는 한참을 말이 없었다가, 낮게 중얼거렸다.

“부회장이 마지막까지 폭탄을 던졌네요. 다들 먹잇감을 잡았다고 생각하겠네요.”

“예?”

“몰라도 돼요.”

그는 고개를 들어 창 밖을 봤다. 노을은 사라지고, 회색빛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다.

뒤치다꺼리까지 다 하고 사무실로 들어서는 김성운의 표정이 묘했다. 배정오가 투척한 폭탄 발언 때문인지 마지못해 들었던 이별주 때문이었는지 불콰한 얼굴로 말이 없었다.

그렇게 배정오는 떠나갔다. 돈 많은 한국기공그룹을 한 손에 쥐었던 미다스의 손, 샐러리맨들의 우상이자 롤모델로 빛나던 그였지만 꼬리를 감춘 건 한 순간이었다.


그로부터 얼마 뒤, 회사 옆 흡연장.

우연히 마주친 법무실 엄경식 과장이 담배를 피우다 진규를 보고 슬며시 다가왔다.

상무급이지만 사십 대 한철우 변호사의 후배인 엄경식. 사시에 실패하고 법무팀장으로 있지만 늘 해박한 법률지식을 뽐냈다. 머리가 아닌 발로 뛰는 직원이었다.

“엇 엄 팀장. 오랜만이네요.”

“예. 안 그래도 정 팀장님 만나서 상의드릴 게 있었습니다.”

“예? 법무가 그렇게 말하면 꼭 험한 게 있던데, 설마?”

“…….”

바로 답을 하지 못하는 엄경식을 바라보며, 진규는 철렁했다. 오른손에 있던 담배에서 재가 툭 떨어졌다.

“심각한 거군요. 요 며칠 좀 잠잠하더니만…..”

“잠시 저쪽으로.”



[수요일 26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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