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면 복이 오는 것이 아니라, 참다 보면 죄인으로 몰리게 된다.
- 믿을 수 없겠지만 등장인물들과 회사명을 제외한 대부분의 주요 내용은 현실에 기반한 이야기입니다.
* 부라퀴 : 자신에게 이로운 일이면 기를 쓰고 덤비는 자들을 일컫는 우리말입니다.
배정오는 ‘미다스의 손’이라 불렸다.
신입사원에서 그룹의 실질적인 총수까지. 기적을 일구는 경영자. 경제지가, 종합일간지가 배정오는 마치 신화 속 영웅인 듯 찬사를 보냈다.
- "차나 한잔 하시죠. 저희가 알아서 다 써 드리겠습니다."
배정오는 거의 입을 열 필요도 없었다. 어쩌다 인터뷰라는 그의 간택을 받은 언론은 두툼한 봉투를 안주머니에 챙겨 넣으며 감읍했고, 신문은 용비어천가인양 대서특필했다.
처음엔 존경이었다.
모든 월급쟁이의 꿈이자, 진규의 롤모델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나고 나니, 헛웃음이었다. 돈의 힘이었다. 대한민국 역사상 단 한 번뿐일 행운. 창업회장 조일영이 그룹을 일구고 금고가 터져나가도록 쌓아놓고 느닷없이 사망했다.
한국기공은 ‘기계설비의 절대적인 강자’였다. 조일영 회장 때. 2위 대원기공은 까마득했다. 사업구조의 특성상 수익률은 고작 2~3 퍼센트. 신제품 개발이라는 앞바퀴와 기존제품 유지라는 뒷바퀴가 쉼 없이 돌아가야 쓰러지지 않는 자전거처럼. 전 직원이 1년 내내 피땀으로 버텨야 숨 쉬는 구조였다. 하지만 조일영부터 현장 직원까지 똘똘 뭉쳐 그 어려운 걸 해냈다.
엄청난 인프라가 필요했기에 진입장벽이 높았다. 돈 많은 대기업도 탐낼만한 사업이 아니었다. 새로 들어오는 이도, 쉽게 무너지는 이도 없었다. 고여 있는 물이었다. 그 고인 물에, 배정오라는 돌멩이가 던져졌다. 그 이후 모든 게 달라졌다.
시작은 우연이었다.
조일영 회장이 세상을 떠나며 넘겨준 막대한 자금. 그 돈을 그저 쌓아두고 지내던 어느 날, 동탄신도시 아파트 프로젝트 이야기가 귀에 들어왔다. 돈이 많으면 친구가 많듯, 금고가 빵빵한 사업가에겐 솔깃한 투자 제안이 끊이지 않았다.
"부회장님, 돈 놓고 돈 먹기. 돈이 돈을 부릅니다."
"절대 손해 보시는 일 없을 겁니다. 남들이 채가기 전에."
처음엔 흘려 들었지만, 계속 듣다 보면 귀가 열리기 마련. 누이 좋고 매부 좋다는 사탕발림에 배정오는 주판알부터 튕겼다.
“부회장님, 부동산 채권입니다. 후순위지만 지금 부동산시장에서는 황금 기횝니다. 수익률이 … 기가 막힙니다.”
단돈 삼백억 원.
그 정도면 한국기공의 태평양 같은 금고에선 한 바가지 수준도 아니었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별 티 나지 않는 한 꼬집 정도랄까. 그는 별 기대도 없이 투자했다. 심심풀이 삼아.
그런데 8개월 뒤, 삼백억 원은 새끼를 쳐도 단단히 쳤다. 구백억 원이 되어 돌아왔다. 순수익 육백억 원이면 한국기공 수천 명이 일 년 내내 생고생해야 생기는 수익규모. 순간 배정오는 눈이 돌아갔다.
'겨우 한 바가지로 이 정도 땡겼는데, 내 손엔 태평양이 있잖아.'
세상이 돈짝만 하게 보였다.
큰돈 버는 길을 알게 됐다. 그 순간, 배정오는 신이 되었다. 돈이 말을 걸어왔다.
‘넌 될 놈이야.’
그날 이후, 그는 본업 따윈 돌아보지 않았다.
“니들 수백 명이 머리 싸매고 일해서 고작 뭐가 남냐? 어휴, 답답한 놈들.”
그의 목소리는 회사 공기를 부쉈다. 기계 설비, 부품, 연구. 그 모든 게 그에겐 하찮았다.
“내가 한 방에 벌어들이는 거, 니들이 1년 벌어도 못 따라와. 머리를 써야지, 대체 왜 회사가 이 모양이야?”
누군가 작게 말했다.
“업의 특성상, 수익률이 낮을 수밖에 ….”
“그니까 돌대가리란 거야!”
책상이 쾅하고 울렸다.
“돈 안 되면 다 버려! 왜 붙잡고 있어? 머리는 장식이야? 그거 붙들고 있으면 밥이 나오냐?”
영업부 문봉식 전무가 말 한마디 붙이려다 입을 닫았다. 괜히 나섰다간 다음 표적은 자신이었다. 회의실 안, 누구도 눈을 들지 않았다.
밖에 나와서야 욕이 터졌다.
“씨발. 본업이 살아 있어야 자금이 돌지. 자기가 기계공장 덕에 자리 잡은 걸 까먹은 거야, 저 인간.”
“이젠 사람도 돈으로 보나 봐.”
누구도 큰 소리로 말하지 않았다. 다들 속으로만 끓였다. 배정오는 마치 하늘에서 떨어진 사람처럼 굴었다. 기름때 묻은 손을 귀히 여기던 조일영 회장과 달리, 그는 깨끗한 손으로 돈만 셌다.
“공장? 직원? 하 … 밥벌레들이지 뭐.”
다음 회의에서도 그는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나가 봐. 쓸모없는 인간들. 또 나 혼자 벌어야지. 니들이 M&A를 알아? 부동산을 알아?”
문봉식이 문을 닫으려는 찰나, 배정오가 중얼거렸다.
“한 번만 잘하면 수백, 수천억이야. 그걸 왜 몰라. 니들 같으면 평생 노가다지.”
문이 닫혔다. 그리고 정적. 누구 하나 숨을 쉬지 않았다.
진규는 그날 밤 혼자 사무실 불을 끄며 생각했다.
‘미다스의 손? 아니지. 그건 … 독이 묻은 손일 뿐이야.’
배정오가 전권을 쥔 뒤로, 한국기공은 멈췄다. 누가 봐도 잘 나가야 할 시점이었는데, 이상하게 본업은 늘 제자리였다. 푼돈 버는 본업은 등한시하고 한 방에 큰돈 벌 생각뿐이었다.
부동산, M&A, 증권, 채권 그리고 이자 높은 돈놀이까지. 이빨만 잘 털면 돈이 돈을 물어왔다.
본업과는 상관없는 계열사들은 우후죽순처럼 늘었다. 대부분 밑 빠진 독이었다. 한국기공그룹은 비만이었다. 제대로 설 수 없을 정도로 다리가 부실한 비만. 그래서 찾은 다리가 피벨리기공이었다.
'본업? 이 바닥에서 젤 잘 나가는 똘똘한 놈, 돈으로 사 버리면 게임 끝이야.'
본업을 키울 생각보다는 이미 커 있는 회사를 돈으로 살 생각이니 모든 게 뒷전으로 밀렸다. 그러는 사이에 국내와 해외 경쟁사들은 날개를 달았다.
침체된 일본경제 상황에서 글로벌 선두권 일본업체들이 이합집산으로 살길을 찾는 사이 경쟁사 대원기공 순위가 그 위로 올라섰다. 그런데 한국기공은 숨을 헐떡였다.
“이익률? 뭐 그런 건 나중 문제야. 한방에 1등 되면 다 끝나.”
배정오의 머릿속엔 늘 ‘피벨리기공’이 있었다. 글로벌 2위. 독일 회사.
그걸 사면 단숨에 세계 1위라며 눈을 반짝였다. 그가 믿은 건 기술이 아니라 돈이었다. 부회장실은 냄새가 났다. 돈 냄새. 그리고 그 냄새에 몰려든 자들.
재무실 김재석, 구조본 장재민, 전략실 우기남, 법무실 한철우. ‘자칭’ 전문가들. ‘타칭’ 충견들. 그들은 숫자를 짰고, 보고서를 포장했고, 배정오 앞에서는 언제나 고개를 45도 각도로 숙였다.
배정오는 조일영 회장의 절대적 신임을 받았다. 조일영이 키웠고, 믿었고, 내세웠다. 그런데 등잔 밑이 어두웠다. 회장의 부름을 받기 전 공장 재무담당 시절, 그는 이미 길을 알아버렸다. 돈이 흐르는 길. 그리고, 새는 길. 쥐도 새도 모르게 자기 호주머니를 채우는.
'이 정도쯤이야. 아무도 모르겠지.'
처음엔 아주 조금이었다. 하지만 그건 마약이었다. 자신의 계좌에 동그라미가 늘어나는 희열.
조일영이 눈치챘을 땐 이미 늦었다. 그리고 하필이면 책임을 물으려던 바로 그날 조일영은 심장마비로 쓰러졌다.
장례식 내내, 일인자가 사라진 자리에서 이인자 배정오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미망인은 경영을 몰랐고, 장자는 학업 중. 그의 입가엔 잔잔한 미소가 가득했다.
‘이제, 내 시대다.’
그의 머릿속엔 숫자 대신 지도가 있었다. 생선가게를 통으로 맡은 고양이.
“피벨리 인수로 1위 간다. 그 다음은 그룹이다.”
그는 부동산에 손댔다. 채권에 손댔다. 저축은행, M&A, 증권 닥치는 대로였다.
“부회장님, 리스크가 큽니다.”
“리스크? 돈 앞에 리스크가 어딨어? 돈은, 겁 많은 놈을 싫어하거든.”
그의 말에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한숨을 삼켰다.
문제는 그 돈이 ‘회사 돈’이었다는 것. 손실은 회사가 떠안았고 이익은 배정오 개인 금고로도 흘렀다. 사람들은 모른 척했다. 아니, 모를 수밖에 없었다. 그래야 눈먼 콩고물이라도 떨어졌다.
검찰이 처음 움직인 건 동명저축은행 때문이었다. 손정열 회장. 금융권의 큰손. 그를 겨냥한 수사였다. 그런데 조사 도중 튀어나온 이름 하나. 배정오. 그였다.
“이거, 배정오 부회장 쪽이 더 냄새가 나는데요.”
“그 사람, 손 회장이랑 엮여 있대요. 돈은 그쪽이 먹고, 손실은 … 한국기공이 떠안았답니다.”
검찰 내부의 대화가 속속 새어 나왔다. 기자들이 술렁였고, 시장도 눈치를 챘다.
‘내가 왜? 내가 왜?’
배정오는 소스라치게 놀라서 잠에서 깼다. 온몸이 가위눌린 채 손가락 하나 꼼짝할 수가 없어 용을 얼마나 썼던지 온몸이 땀에 절어 있었다.
깨긴 했지만 아직도 꿈인지 생신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덜덜 떨리는 손을 뻗었다. 침대 옆 협탁 위의 컵은 두고 물병의 뚜껑을 열고 벌컥벌컥 들이켰다.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는 법이 아니라 했는데, 결국 이쪽이나 저쪽이나 배은망덕한 것들!’
그날 검찰에서 두 번째로 불려 가 조사받던 장면이 떠올랐다.
아침 일찍 불러놓고 오전 내내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 취급이었다. 그러다가 새파란 검사가 와선 양아치스럽게 비아냥댔다. 다음엔 나이가 조금 있어 보이는 놈이 살살 웃으며 달래줬다.
"배 고프시죠? 설렁탕 기 막히게 잘하는 집이 있습니다."
그 순간 멘털이 박살났다. 검찰의 손 끝에서 놀아날 수밖에 없었다. 빨리 끝내고 싶은 맘뿐이었다. 조사를 마치고 기진맥진해서 나오며 생각하니 양아치 검사보다 웃어줬던 그놈의 얼굴에 더 치가 떨렸다.
“부회장님, 지금 이런 말씀드리기 좀 그렇지만, 내부 임원들이 연판장을 돌리고 있습니다.”
“그…래?”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내부 기류가 아무래도 …..”
“….. 알았어.”
전화기를 대고 있는 관자놀이에 혈관이 불거졌지만, 화를 낼 힘이 없었다. 은밀한 목소리에 송구함이 뚝뚝 흘렀다. 배정오의 충실한 개를 자처하던 임원들이 언제부턴가 달라졌다. 어느새 궁지에 몰린 자신이었다.
‘생각 좀 하자. 생각 좀.’
글로벌 금융위기 때문에 피벨리기공 인수 건은 날아갔다. 손정열에 대한 검찰 조사가 시작되면서 그 불이 배정오에게 옮겨 붙었다.
거기에 앞에선 눈 깔고 머리 처박고 있던 임원 놈들이 연판장을 돌려서 자신을 몰아내려 하고 있었다.
‘근데 앵앵대는 검찰 놈들이 파악한 액수는 절반도 되지 않아.’
그건 다행이었다.
‘그런데 만약에 대가리 쳐들고 대들려는 임원 놈들이 참고인으로 조사받거나, 검찰 새끼들이랑 연결되면?’
생각이 거기에 이르자 얼굴이 화끈했다. 마른세수를 하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최대한 싼 티켓 끊는 게 최선이구나. 그동안 계좌엔 이자도 제법 쌓일 거고.’
더 버티다간 죽도 밥도 안 된다는 게 결론.
회사에선 모양새 좋게 마무리하고 검찰엔 싼 티켓을 구걸해야 했다. 그게 배정오가 깊숙이 숨겨놓은 계좌를 보존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룹 회장 놀이 그 정도 했으면 됐고, 학교 갔다 오면 그 돈엔 누구도 뭐라 못하지.’
[일요일 25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