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방울도 못 달 쥐새끼가 올가미를 걸려고?

참으면 복이 오는 것이 아니라, 계속 참다 보면 죄인으로 몰리게 된다.

by 부라퀴버스터

- 믿을 수 없겠지만 등장인물들과 회사명을 제외한 대부분의 주요 내용은 현실에 기반한 이야기입니다.

* 부라퀴 : 자신에게 이로운 일이면 기를 쓰고 덤비는 자들을 일컫는 우리말입니다.



그 말을 듣는 직원들 얼굴엔 감탄도, 존경도 없었다. 그저 ‘한숨’ 하나만 빼곡했다. 진규는 가슴이 먹먹했다. 공허한 말은 메아리만 남기고, 책임은 언제나 아래로 흘렀다.

회사 안은 흉흉했다. 복도마다 소문이 돌았고, 사람들은 뱀눈이 되었다. 구내식당 메뉴는 하루가 다르게 초라해졌다. 오늘 나온 미역국이나, 어제 먹은 만둣국이나 그저께 먹은 된장국이 신기하게도 비슷했다. 초라한 건더기는 달라졌지만 국물맛은 그게 그거였다.

해외 출장이나 접대도 끊겼다. 영업팀은 컴퓨터 앞에서만 매출을 상상했다. 다들 서로 물었다.

‘월급은 … 나오겠지?’

다들 살기 위해 엎드렸고, 숨기 위해 웃었다. 누구도 회사 얘길 먼저 꺼내지 않았다. 고개를 드는 순간, 표적이 되니까.

진규는 그런 공기 속에서도 하루하루를 붙잡았다. ‘괜찮다’는 말로만 버티는 회사, 그 ‘괜찮다’의 문안을 쓰는 게 그의 일이었다. 실적이 공시로 발표될 때마다.


실적이 나가고, 내부용 발표자료를 준비하면 장재민 구조조정본부 부사장은 그걸 손에 쥐고 나가 기계처럼 읽었다. 써서 손에 쥐어줬으면 말하듯 해야지, 읽기만 했다.

'매출이 꾸준해서 ...... 좋아지고 있습니다.'

'영업이익도 흑자인데 ..... 좋아지고 있습니다.'

'계열사 팔아서 ...... 재무상태도 좋아지고 있습니다.'

'부동산 팔아서 ...... 재무상태도 좋아지고 있습니다.'

'유증도 잘 끝나서, BW도 발행해서 .......'

'............... 좋아지고 있습니다. 좋아지고 있습니다.'

불안에 떨고 있을 직원들 마음을 다독여야 한다는 발표의 목적은 흔적도 없었다. 행여 누가 의심하고 불충하고 건방진 태도인지 장재민은 연단 위에서 스캔했고 직원들은 그 눈길을 피했다.

그가 말하는 ‘좋아지고 있다’는 직원들을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사람들에 대한 공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이 습관적인 말더듬이 낭독에 직원들 표정은 굳어져만 갔다.


“다음 달에 우리 월급은 나오는 거죠?”
복도에서, 회의실 앞에서, 누구라도 똑같은 질문이었다.

“나옵니다. 걱정 마세요.”

"정 팀장님이 그렇게 얘기하니 안심이 되네요."

진규는 늘 그 말로 끝냈다. 진짜 믿어서가 아니라, 누군간 믿어야 했으니까. 대회의실은 오늘도 꽉 찼다. 영업 3부 안성훈 팀장이 진규 옆에 앉으며 속삭였다.

“또 괜찮다, 좋아진다, 그 말 들으러 온 거죠?”

“들어보세요. 그래도 부사장님이 발표하셔야 하니까.”

“그분이 괜찮다고 하면 더 불안해요.”

“그래도 실적은 버티고 있잖아요.”

그가 껄껄 웃었다.

“여유 있네. 정 팀장은 우리 사주 벌써 정리했죠?”

“아뇨. 아직 그대로입니다. 거기 신경 쓸 겨를이.....”

“용감하네. 난 지난주에 다 팔았어요. 퇴직금 중간 정산까지 했습니다.”

“부럽네요. 저는 정산할 퇴직금 같은 것도 없어요.”

그 말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웃음은 났지만, 다들 마음 속엔 숫자가 있었다. 마이너스 몇 천, 그리고 월급날까지 며칠 남았는지.


예상대로 진규가 쓴 발표문안은 장재민의 입에서 형체를 잃었다. 말 더듬음에, 엉킨 억양에, ‘괜찮다’는 말이 더 불안하게 들렸다. 발표가 끝나자 사람들은 박수 대신 한숨을 쏟아냈다. 누군가는 ‘괜찮다더라’ 했고, 누군가는 ‘큰일 났다더라’ 했다.

발표 이후, 회사 안의 공기는 더 차가워졌다. 사람들은 남을 살피기만 했다. 누가 불만을 말하면, 누가 가장 먼저 보고할지 눈빛으로 계산했다.

고자질이 충성의 증거가 되었고, 침묵이 생존의 기술이 됐다. 윗사람들은 눈치 보는 걸 ‘성실함’이라 착각했다. 아랫사람들은 비위를 맞추며 ‘살아남음’을 배웠다. 그렇게 한국기공이라는 배는 소리 없이 기울어가고 있었다. 겉으론 멀쩡했다. 속은 이미 물이 차오르고 있었지만.

진규는 책상 위에 놓인 커피잔을 바라봤다. 잔잔한 표면에, 흔들림이 있었다. 그게 회사 같았다. 멀쩡해 보이지만, 이미 흔들리고 있는. 그리고 그 안에서 그는 여전히 버티고 있었다. 누군가는 그래야 했으니까.



김성운 상무가 잰걸음으로 들어왔다. 셔츠 목 깃을 만지작거리는 손끝이 심상찮았다. 평소엔 절대 그런 식으로 옷깃을 만지는 사람이 아니었다. 진규는 그걸 보는 순간 직감했다. 뭔가 터졌다.

“정 팀장.”

낮고도 짧았다. 이름 부르는 그 한마디에, 이미 대화의 방향은 정해져 있었다.

“예, 상무님.”

김성운은 주변을 한 번 훑었다. 누구도 귀 기울이지 않는 걸 확인하곤 의자 앞으로 몸을 숙였다. 품 안에서 꺼낸 건 반으로 접힌 누런 봉투였다. 테이프 자국이 거칠게 겹쳐 있었다.

“이게… 뭡니까?”

“보다시피. 근데 일단, 혼자만 봐.”

진규는 봉투를 열었다. A4 서류 몇 장. 한 장 넘기자, 문장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한국기공의 임원 일동은 ~~~~~ 이기에 배정오 부회장의 리더십에 중대한 문제가 있음을 밝힙니다.”

진규의 눈썹이 미세하게 떨렸다. 연판장.

‘그 배정오를 몰아내자는?’

누가, 감히. 그 아래엔 소속, 직책, 이름, 그리고 싸인 칸. 손이 잠시 굳었다. 종이의 무게가 이상하게 무거웠다. 핵폭탄.

천둥 번개를 동반한 태풍이 조용히 다가오고 있었다.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고양이 목에 방울 달 엄두도 못 내는 생쥐들인데, 방울도 아닌 올가미를 씌워 끌어내려한다.’

숫자가 제아무리 많아도 쥐새끼들일 뿐. 고양이 앞의 쥐새끼이긴 마찬가지.

“놀랐지?”

“예… 솔직히, 다들 겉으론 조용해서 아무 생각 없는 줄 알았습니다.”

“봤으면 이리 줘. 누구한테도 말하지 마. 정 팀장은 알아야 하니까 보여준 거야.”

“이걸… 언제까지 숨기실 건가요?”

“아직 다 모으지 못했어. 때 되면 써야지. 그때 가면 부회장도 어쩔 수 없을 거야.”

진규는 잠시 말이 막혔다.

“부회장님이 그걸 가만히 두실 리가 없을 텐데요. 오히려… 역공당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걸 막으려고 하는 거지. 임원들끼리 손 맞잡고, 딱 그 타이밍을 기다리고 있어.”

“상무님, 다치실까 걱정됩니다.”

“그건 나중에 걱정하고. 지금은 아무도 모르게.”

그날 이후, 그 이야기는 둘 사이에서 완전히 봉인됐다. 말 한마디 잘못했다간 산통 깨지는 세상이었다.


며칠 뒤 회사 근처 커피숍. 하얀 와이셔츠만 입은 두 남자. 회사 사람 만나면 끝장이었다.

“여기, 앉으시죠.”

진규가 낮은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요즘 기사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동명저축은행 손정열 회장 수사 건요.”

김성운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그거, 나도 봤어. 불똥이 안 튀어야 할 텐데.”

“검찰 쪽에서 손 회장 조사하다가 배 부회장이 튀어 나왔다고 합니다.”

“…….”

커피 향이 희미하게 섞여 있었다. 그런데 공기엔 쇠 냄새가 섞여 있었다. 진규가 말을 이었다.

“검찰이 아는 건 700억이라는데, 제가 본 자료로는 천억이 넘습니다.”
“그럴지도.”

“이게 터지면, 한국기공도 같이 엮입니다.”

“배 부회장은 그거 손 못 떼지. 손 회장이랑 오래됐거든.”

진규는 씁쓸하게 웃었다.

“욕심이 많으신 분이죠. 스톡옵션도 챙기고, 저축은행도 손대고.”

“그땐 잘 나가던 시절이니까. 백만 주 중 절반은 임원 나눠주고, 절반은 본인 거였어.”

“결국 백억 넘게 챙기셨던데요. 돈 많다고 하루 네끼 먹는 것도 아닐 텐데.”

김성운은 말없이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그땐 다들 고개 숙였지. 받은 사람도, 안 받은 사람도.”

진규가 다시 조심스레 물었다.

“상무님은 안 받으셨어요?”

“난 해당 없었어.”

“그럼 누가 받았을까요? 다들 ‘그들만의 리그’였겠네요.”

“눈치로 밥 먹는 세상이잖아.”

잠시 침묵. 둘 다 커피를 마시며 고개를 떨궜다. 진규가 마지막으로 조심스레 말했다.

“제가 들은 얘긴데요 … 공장에 빨대가 꽂혀 있었다고.”

김성운이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진규가 이직한 이후로 김성운의 얼굴엔 잔주름이 부쩍 늘었다.

“그 얘기, 나도 알아. 근데 구체적으로 딱 잡질 못했어.”

“무섭네요. 스톡옵션으로 백억, 공장에 빨대 꽂아서 다 빨아먹고, 거기다 저축은행 딜까지.”

“…….”

“이건 경영이 아니라, 약탈 아닙니까?”

“쉿. 누가 들을라. 그래서 연판장 돌리고 있는 거야.”

바람이 불었다. 담배 연기가 길게 흩어졌다.

'자신에게 득이 된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

진규는 상상이 되지 않았다. 공과 사의 구분이라는 말이 우스웠다. 모든 걸 갈아서 자신의 호주머니 채우기만 급급한데, 세상은 미다스의 손이라며 환호를 보냈다.

“정 팀장.”

“예.”

“고생이 많아. 이제 곧 끝이 보일 거야.”

김성운은 어금니에 힘을 줬다. 둘은 동시에 새 담배를 꺼내 들었다. 불꽃이 두 개, 조용히 어둠 속에서 붙었다.



[수요일 24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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