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면 복이 오는 것이 아니라, 계속 참다 보면 죄인으로 몰리게 된다.
- 믿을 수 없겠지만 등장인물들과 회사명을 제외한 대부분의 주요 내용은 현실에 기반한 이야기입니다.
* 부라퀴 : 자신에게 이로운 일이면 기를 쓰고 덤비는 자들을 일컫는 우리말입니다.
사무실의 모든 소리가 멈춘 것처럼. 그 말은, 진짜 같았다. 진규는 잠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칼 들고 오더라도 사람들 많은데 설마 찌르기야 하겠어? 진짜 오는지 어디 한번 보자.'
그리고, 아주 평온하게 말했다.
“칼 들고 오고 싶으면, 칼 들고 오세요.”
“뭐?”
“대신에 퇴근이 여섯 시라… 그전에 오세요.”
정적. 그 말에 상대방이 멈췄다. 이어서 수화기를 통해 전해져 오는 긴 한숨 소리.
“……….. 내가 진짜 칼 들고 오라면, 칼 들고 갈 줄 알았어?”
“저도 그렇게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보통 이쯤 되면 누구라도 전화를 끊는다. 그게 매뉴얼이다. 하지만 진규는 끊지 않았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욕설과 협박으로 가득하던 목소리가 점점 낮아졌다.
“… 거 뉘신 지는 모르지만, 만약에 내가 진짜 찾아가면 어쩌려고 했어요?”
“오죽 답답하셨으면 그러시겠습니까. 저도 회사 주식 있습니다. 똑같은 심정입니다. 오시면 차라도 한잔 대접해드리려 했습니다.”
긴 정적. 그 정적 속에서 두 사람의 체온이 아주 조금 가까워졌다.
“……그래요. 차는 마신 셈 치고, 하나만 물어봅시다.”
“예.”
“회사… 망하지는 않죠?”
“당연하죠. 본업은 건강합니다. 문제는 투자와 유동성입니다. 그걸 바로잡는 중입니다.”
“… 그래요. 잘 좀 해주세요. 부탁합니다.”
“네. 감사합니다.”
뚝 --.
전화가 끊겼다. 진규는 숨을 내쉬었다. 내색은 안 했지만 수화기 든 손은 덜덜 떨고 있었다.
‘진짜 왔으면 어쩔 뻔했나?’
웃음이 새어 나왔다. 사실은 책상 아래 다리까지 후들후들, 온 몸을 떨고 있었다.
재무실과 IR팀 전화가 불이 났다.
'밤길 조심하라'는 협박, '휘발유통 들고 간다'는 협박. 별의별 말이 다 있었다. 그럴 때마다 진규가 나섰다. 그는 말했다.
“휘발유통 들고 오라니까요.”
사람들이 그를 보고 말했다.
“무섭다.”
하지만 진규는 알고 있었다. 그건 ‘무서움’이 아니라 책임이었다. 누군가가 쏘면 맞아야 할 총알, 그게 자기 몫이라고 믿었으니까.
또 한 번 이번엔, 대성통곡. 수화기 너머 울부짖는 중년여인의 숨 넘어가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한기고이 와 이리 됐는교?”
직원들이 다 놀랐다. 울음인지, 고함인지, 거기다 억센 경상도 사투리가 섞이니 알아들을 수도 없었다. 결국 또 진규를 찾았다. 진규가 받았을 때 그녀의 울음은 파도처럼 거칠고 진했다.
“울 아이씨한테 쫓기납니더. 퇴직금 받아논 거, 쪼매 불라 볼라켔는데, 와 이카는교…?”
진규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녀의 울음 속에서 어딘가 익숙한 냄새가 났다. 비린 바다냄새, 젓갈냄새, 부산의 냄새.
“재무 개선이 하루아침엔 어렵습니다. 그래도 본업엔 문제가 없습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하나만 물어보입시더.”
그녀는 여전히 코끝이 막힌 목소리였다.
“한기고이… 좋은 데 아입니꺼? 다들 괘안타 캐싸튼데.”
진규는 미소 지었다.
“좋은 회사 맞습니다. …. 부산이시죠?”
“맞십니더.”
“저도 부산 사람입니다.”
그 한마디에, 팽팽한 전선 같은 울음이 느슨해졌다.
“하이고마. 부산서 서울 그 회사로 갔는 갑네예. 그래 좋은 회사가 한기고이라 카데예.”
목소리가 달라졌다. 얘기가 엉뚱한 곳으로 튀었다. 울음 대신 믿음이 묻어났다. 그녀는 사실, 위로받고 싶었던 게 아니었다.
‘내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
확인받고 싶었던 거다. 간절하게.
“한국기공은, 국내에서도 해외에서도 인정받는 회사입니다. 다만, 너무 잘해보려다… 투자가 좀 지나쳤죠. 그래서 지금은 잠시 고비를 넘는 중입니다.”
“지가 엉터리로 알고 있는 건 아이지예?”
‘한기고이’ 사투리 속의 회사 이름은 그렇게 따뜻하게 들렸다.
“아닙니다. 잘 알고 계십니다.”
그 말에 그녀의 울음은 완전히 잦아들었다.
“울 아이씨 퇴직금 나뚜는 기 아까버서 투자했는데, 멍청한 짓 했다꼬 난리 날 거 같아서예. 그란데 하이고마, 부산서 공부해가꼬 그래 좋은 회사 들어갔으모, 억쑤로 공부 잘하싰겠네예.”
진규는 조용히 웃었다.
“과찬이십니다.”
“힘 내시고예. 우짜든동, 잘 쫌 해주이소.”
“예. 감사합니다.”
그렇게 끝났다. 울음으로 시작해, 응원으로 끝난 통화였다. 전화를 끊자 사무실엔 이상한 정적이 흘렀다. 직원들이 전부 진규를 바라봤다.
칼 들고 온다고 협박하는 사람, 휘발유통 들고 온다 외치는 사람, 통곡하며 사투리로 쏟아내는 사람까지, 그 어떤 폭풍도, 그 앞에선 고요해졌다.
재무실 남용석 팀장이 담배를 문 채 툭 내뱉었다.
“참 희한해요. 그런 전화 받고 괜찮아요? 난 몇 마디만 들어도 손이 벌벌 떨리던데.”
진규는 피식 웃었다.
“사실 나도 간이 철렁하죠. 내가 무슨 철면피나 사이코패스도 아닌데.”
“우리 팀은 진짜 죽을 맛이에요. 나한테 돌리지 말라니까, 전화 받기 싫어서 다 도망가요.”
“하소연 들어달라는 겁니다. 들어주는 사람 하나만 있으면 욕이 기도로 바뀝니다.”
“그건 정 팀장이니까 그렇죠. 우린 못해요.”
“그럼 저한테 돌리세요. 제가 있을 땐 언제든 받겠습니다.”
남용석이 그를 쳐다봤다. 담배 연기 너머로, 묘하게 단단한 얼굴. 진규는 회사를 지키는 해결사였다. 누군가는 말로 총을 쏘고, 누군가는 그 총알을 몸으로 막았다. 그는 늘 후자였다.
큰 전쟁은 안팎의 작은 전쟁들의 합이었다. 오해투성이 숫자의 속사정을 두고 재무실과 수시로 부딪혔다. 문고리 권력인 재무실과의 신경전, 사내정치에서는 득 보다 실이 컸다. 다들 문고리를 쥔 재무를 피했다. 하지만 진규는 숫자 뒤의 속사정을 알아야 했다.
조직은 오해투성이 숫자 앞에서 무너지기 일쑤다. 그들은 늘 숫자에만 신경 썼고, 숫자 뒤에 숨었다. 오해를 푸는 건 자신들이 아니었다.
‘한 글자 틀리면 신뢰가 무너지는거야.’
그게 진규의 원칙이었다. 이정수가 공시 초안을 들고 와도, 진규는 수십 번을 곱씹으며 수정했다. 윽박지르기도 했고, 남용석과 신경전을 벌이기도 여러 번이었다. 오해를 풀어야 조직이 살 수 있었다.
한 번은, 진짜 폭발했다. 진규 몰래 급하게 공시를 내보내려던 걸 알아채고 진규가 재무실로 돌진했다.
“이게 지금 장난입니까?”
“그럼 급한 데 어떻게 해요? 나간 뒤에 설명하면 되잖아요.”
“나가고 나면 숫자는 바꿔도 여론은 뒤집기는 불가능해요. 문안을 제대로 해야 처음부터 오해가 없죠.”
“내가 보기엔 그 말이 그 말인데, 뭐가 문제라는 건지. 숫자는 그대로잖아요.”
“그 수치가 오해를 낳잖아요.”
사무실이 뒤집혔다. 남용석과 대판 싸움이 벌어졌다. 책상 위 서류가 날아다녔다. 하마터면 멱살까지 잡을 뻔 했다. 팀원들이 숨을 죽였다. 결국 김재석 재무부사장이 나섰다. 양쪽 말을 다 듣고, 짧게 결론 냈다.
“정 팀장 말대로 해. 한두 문장만 더 넣으면 되는 걸.”
그 한마디에 끝났다. 진규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내내 조마조마했다. 문고리 권력에 찍힌 것. 공시가 나가고 여론도 잠잠해진 퇴근 직전, 슬며시 일어나 남용석을 찾았다.
“아까는 정말 죄송했습니다. 급한 마음에 저도 모르게 욱해서는.”
팽 --.
남용석은 대답 대신 코를 풀고 휴지를 통으로 던졌다.
“커피에 담배 한 대 하시죠?”
“사주신다면야. 그래도 공시 그렇게 나가니 잠잠하네요.”
“문안 다듬기 힘드시죠? 언제든지 내가 해줄게요. 가시죠.”
남용석은 웃지 않았다. 그의 신입시절부터 누가 재무실을 뒤집은 건 처음이었다. 한국기공이 잘 나갈 때야 여론은 숫자가 어떻든 간에 딴지 걸지 않았다. 하지만 세상이 바뀌었다. 여론 앞에서 알아서 기어야 살 수 있었다.
집으로 가는 길, 진규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세상은 강자의 말은 헤아려 듣지만, 약자의 말은 흘려들을 뿐이야.’
그의 눈빛엔 살아남고자 하는 자의 단단함과 사람 냄새가 동시에 묻어 있었다.
갈수록 숨이 막혔다. 입단속이 일상이 되고, 침묵이 미덕이 됐다. 말 한마디가 흉기로 돌아오는 세상, 그게 지금의 한국기공이었다.
진규는 생각했다. 회사가 이렇게까지 될 줄은 정말 몰랐다. 배정오 부회장을 처음 만난 날을 떠올렸다. 언론의 스포트라이트 한가운데, 세상을 다 아는 얼굴로 앉아 있던 남자.
“스스로 판단해서 해 봐.”
“예, 알겠습니다. 그런데… 질문 하나 드려도 될까요?”
“뭔데?”
“혹시, 주가 매일 보십니까?”
배정오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주가? 그딴 거에 휘둘리는 게 제대로 된 경영자야? 오르면 오르는 대로, 내리면 내리는 대로. 시장이 알아서 하는 거야. 난 그런 거에 일희일비 안 해.”
그땐 안심했다.
‘아, 쿨한 사람이구나.’
그런데, 진짜 쿨한 사람은 다음날 아침부터 불벼락을 내리지 않는다.
“니들 밥 먹고 하는 일이 뭐 있어? 내가 밤새 자금 조달해 오면 뭐 해. 주가라도 좀 받쳐 주란 말이야!”
그는 그렇게 매일같이 핏대를 세웠다. 말로는 ‘주가 따위’라 했지만, 실은 주가 한 칸에 목숨을 걸었다.
재무개선이라면 명분이 있어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아무 생각 없이 팔았다. 좋은 자산부터, 알짜배기부터. 욕은 욕대로 먹고, 돈은 구멍처럼 새어 나갔다. 증권사, 자문사, 이상한 외부업체들. 누군가의 배만 불렀다. 그 와중에도 배정오는 말했다.
“나 정도 되니까 이게 가능하지. 웬만한 회사는 꿈도 못 꿀 일 아냐?”
[일요일 23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