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뭐? 최선? 칼 들고 간다. 딱 기다려.

인간관계란 넓혀 가는 것보다 좁혀가는 것이 더 중요한 법이다.

by 부라퀴버스터

- 믿을 수 없겠지만 등장인물들과 회사명을 제외한 대부분의 주요 내용은 현실에 기반한 이야기입니다.

* 부라퀴 : 자신에게 이로운 일이면 기를 쓰고 덤비는 자들을 일컫는 우리말입니다.



휙 --, 권진영이 앞으로 급하게 끼어들었다.

택시 뒷문 손잡이를 낚아채듯 쥐었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뒷좌석에 잽싸게 올라탔다.


진규와 김성운이 동시에 벙찐 얼굴로 멈춰 섰다.

“곽 선배는 제가 만날게요. 팀장님이 그 사람한테 당하는 거, 제가 도저히 두고 볼 수가 없습니다. 제가 해결하고 연락드릴게요.”

“예? 권 기자님, 그게…..”

'이게 무슨 말이야?'

진규도 그렇지만 김성운도 선뜻 권진영의 말이 무슨 뜻인지 와닿지가 않았다.


탁-.

택시 뒷문이 닫혔다. 권진영은 택시 안에서 정면을 바라보며 단호한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다음 순간, 택시는 조용히 미끄러져 좌회전 차선으로 들어서며 차량의 물결 속에 섞여 들었다. 진규는 멍하니 그 뒷모습을 바라봤다.

'이럴 수가? 권 기자가 왜?'

김성운은 정진규를 대신해 자신의 선배이자 상관에게 대립하려는 권진영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바람 한 줄기가 스쳐갔다.

‘도대체 이 사람 기자들한테 뭘 한 거야….’

김성운은 한참 뒤에야 입을 뗐다.

“정 팀장, … 대체 사람들한테 어떻게 한 거야? 권 기자가 저렇게까지 하는 거야?”

진규는 웃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게요. 저도… 이런 건 처음이라.”


사무실로 돌아온 뒤, 시간은 더디게 흘렀다.

한 시, 두 시 그리고 세 시. 아무 연락이 없었다. 컴퓨터 모니터는 멍하니 깜빡이고, 진규의 속은 새까맣게 타 들어갔다. 오후 세 시 이십 분. 모니터 하단이 번쩍였다. 메신저 알람.

‘권진영.’

진규는 침을 삼켰다. 마우스를 쥔 손이 덜덜 떨렸다. 천천히 커서를 옮겨서 메신저 창을 열었다.


– 어휴, 부장한테 엄청 깨졌네요.

진규는 눈을 크게 떴다. 눈 밑이 그냥 떨리고 손끝이 저려왔다. 하지만 이건… 살았다는 뜻이었다.

– 권 기자님, 너무 감사합니다.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 팀장님이 더 고생하셨죠. 제가 뭘요. ㅎㅎ

– 아닙니다. 그 결정,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압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손이 풀렸다. 심장이 뛰었다. 그제야 피가 돌며 얼굴색이 돌아왔다.

‘지훈아. 이게 너 태어난 덕분이야. 지훈이가 아빠 회사를 구했다. 너 없었으면 어쩔뻔 했니? 우리 집 소띠, 고맙다. 정말 고맙다.’

진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김성운에게 달려갔다.

“상무님, 됐습니다! 권 기자 연락 왔습니다. 됐답니다.”

“그래? 정말?!”
“예. 끝났습니다.”

김성운도 그제야 긴장이 풀리며 온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갔다. 잠시 말없이 진규를 보다가, 천천히 미소를 지었다.

“오늘 같은 날 술 안 마시면 인생 모독이야. 코가 삐뚤어지게 마셔야지.”


그날 밤. 여의도 지하 한식집. 술상 위엔 굴 보쌈, 파전, 그리고 동동주 한 항아리.

진규가 잔을 들었다.

“오랫동안 공들인 특종이었을 텐데… 펜을 꺾는 게 어떤 건지 압니다. 감사합니다.”

권진영은 웃었다.

“그럴 때도 있는 거죠. 인생, 그런 날도 있잖아요. 그냥 마시죠?”

잔이 부딪혔다. 동동주가 넘실거렸다. 그 뒤엔 소맥, 또 소맥. 그리고 새벽까지 단란주점 불빛도.


다음 날 아침, 진규는 반쯤 감긴 눈으로 출근했다. 김성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살아서 돌아온 것만으로도 기뻤다. 꾸벅꾸벅 조는 진규의 정수리마저 미더웠다.

책상 위 모니터에서 메신저가 깜빡였다.

– 찜질방에서 눈 좀 붙이고 겨우 기자실로 나왔어요. 속 쓰려 죽겠네요. ㅎㅎ

진규가 웃으며 답했다. 주고 받는 짧은 메시지 문장에서도 술냄새가 물씬 났다. 둘 다 반쯤 감긴 눈으로 자판을 헤매는 힘없는 손가락은 연신 오타를 만들어냈지만, 상관없었다.

– 나도 죽겠어요. 점심에 해장 잘하시고요.

그는 고개를 숙였다. 눈을 감았다.


"경훈아 고기만 먹지 말고 된장찌개와 야채도 같이 먹어. 모처럼만에 엄마가 끓였잖아."

"아까 두 번이나 먹었어."

할머니까지 함께 온 가족이 둘러앉은 식탁이 신기한 지, 큰 애 경훈이 눈을 반짝거렸다. 진규가 일찍 온다는 연락에 아내 윤현숙이 복대를 매고 운동 삼아 찌개를 준비했다. 의사도 빠른 회복을 위해선 살살 움직이라는 권유도 있었다. 윤현숙 맞은편 진규의 등 뒤 거실에선 갓난쟁이 지훈이가 자면서도 입술을 오물거렸다.

"지훈이가 아무래도 수상한데, 우리 밥 먹는 거 알고 옆에서 공사 중인 거 같아."

문득 윤현숙이 밥을 먹다 말고 꼬물거리는 지훈이를 계속 쳐다봤다.

"오줌 누는 거 아냐? 아까 쌌는데."

장모 없는 자리를 메꾸며 산모를 돌보던 시어머니가 경훈이 숟가락에 반찬을 올려주며 한 마디 거들었다.

"밥 거의 다 먹었으니까. 내가 살펴볼게."

진규가 숟가락을 재게 놀리며 마지막 남은 밥을 꾹꾹 눌러 입에 넣고 일어섰다.

"어디 보자. 우리 지훈이, 무슨 공사를 벌였나요? 1번일까요, 2번일까요?"

애보기가 서툰 남자 아니랄까 봐, 진규는 포대기 한쪽을 풀고선 오른손을 지훈이 사타구니 쪽으로 살짝 밀어 넣었다. 1번 오줌이면 두어 번 더 싸도 되니까.

"어,,, 이게 뭐야? 이런 이런 한 무더기 쌌네 쌌어."

흠칫 놀란 진규는 똥 칠갑을 한 오른손 검지와 중지를 보이며 호들갑을 떨었다.

"아 참. 지금 밥 먹는데, 똥 묻은 손을 흔들고 그래?"

"아냐 아냐. 우리 지훈이 똥은 냄새도 좋아. 더럽지 않아. 손 씻고 와서 기저귀 갈아줄 테니, 밥 먹어."

진규는 재빨리 화장실로 가 흐르는 수돗물에 손을 가져갔다. 손에서 떨어져나온 똥찌꺼기가 배수관으로 빨려 들어가는 걸 지켜봤다. 밥 먹으며 재잘대는 가족들의 웃음소리가 정겨웠다.

'살았다!'

엉덩이가 찝찝했는지 지훈이가 울음보를 터뜨렸다. 진규는 얼른 손의 물기를 털어내며 돌아섰다.

"어, 그래 그래. 아빠가 금방 갈아줄게."



한국기공 주가는, 그야말로 추락의 연속이었다.

끝이 어딘지 모를 낙하. 조용한 강자였던 회사가 이제는 하루하루 파란색 차트 속에서 숨이 끊어지고 있었다. 계열사 매각, 부동산 매각, 뉴스라도 나가면 찔끔 반등이라는 걸 하기도 했다. 하지만 장 마감 무렵엔 어김없이 힘없이 내려앉았다.

백 원, 이백 원. 희망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초라한 금액이었다. 글로벌 증시가 박살 난 뒤로는 국내 증시도 망가졌다. 해외 사업이든 국내 사업이든 다 무너지고 있었다.

진규가 오기 전만 해도 한국기공 주가는 이만 원대. 피벨리기공 투자 얘기가 처음 나왔을 때만 해도 괜찮았다. 하지만 금융위기의 직격탄은 잔인했다. 만원선이 무너진 이후론 끝없는 추락뿐이었다.

“한국기공 재무 개선? 그게 수습이 가능하기나 하겠어?”

“재무개선 생각을 하고는 있는 거야?”

흉흉한 말들이 떠 다녔다. 언제 끝날 지 가늠조차 어려운 영역. 유상증자, 부채 탕감, 자산 매각까지, 무엇을 해도 ‘기적’이라 부르기엔 모자랐다. 투자자들은 분노했고, 화면 속 파란 그래프는 그들의 피처럼 진규의 시야를 물들였다.


오후의 공기가 느리게 흘러가던 그때, 전화 한 통이 왔다. 공시 담당 재무실 이정수 대리였다. 숨 넘어갈 듯 매달렸다.

“팀장님, 전화 좀…. 주주라는데… 감당이 안 됩니다.”

“돌려주세요. 요즘 주주들 예민하죠?”

“예민 정도가 아니라… 꼭 조폭 같습니다.”

진규는 피식 웃었다. 주가가 오를 때는 아무도 전화하지 않는다. 그럴 땐 ‘내가 잘해서’라고 말하는 게 사람이다. 그런데 떨어지면? 모두가 회사를 향해 총구를 겨눈다.

“여보세요.”

“이놈의 회사는 왜 전화를 자꾸 돌리고 지랄이야? 지금 이게 몇 번째야?”

목소리는 날이 서 있었다. 거친 숨, 빠른 리듬, 한계까지 밀려난 사람의 언성.

“죄송합니다. 본의 아니게 귀찮게 해 드렸네요. 저한테 말씀하십시오.”

“이 회사는 주가 신경 안 써? 우리 같은 주주가 얼마나 죽어나가는 줄 알아?”

“신경 쓰고 있습니다만, 여러 상황이 있어서…”

“그게 신경 쓰는 거야? 회사 망할 판이지!”

“아닙니다. 본업은 안정적이고, 매출도 꾸준하게 유지하는 중입니다.”

진규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단단했다. 폭풍 속에서도, 감정에 휩쓸리지 않았다.

“영업을 잘한다는 게 이 모양이야? 주가는 언제 올라가?”

“저희도 조바심이 납니다. 하지만 재무구조 개선엔 시간이 필요합니다.”

“시간? 지금 주인들이 죽어 나가는데, 니들은 자리 지키며 전화나 받냐?”

“저희도 나름 최선을 …”

“뭐? 최선? 이 새끼들, 칼 들고 간다. 딱 기다려.”

순간, 공기가 식었다.



[수요일 22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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