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별이 아니다. 누군가에게 길을 밝히고 꿈이 되어야 진짜 별이다.
- 믿을 수 없겠지만 등장인물들과 회사명을 제외한 대부분의 주요 내용은 현실에 기반한 이야기입니다.
* 부라퀴 : 자신에게 이로운 일이면 기를 쓰고 덤비는 자들을 일컫는 우리말입니다.
11시 5분 전, 진규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용히 재킷을 걸치고, 숨을 내쉬었다. 김성운도 말없이 따라 일어섰다. 눈빛 하나. 그걸로 충분했다.
‘이제 가자.’
을지로. 평일 오전의 명동 거리는 북적였다. 햇살은 쨍했지만 진규의 마음은 먹구름 그 자체였다.
11시 20분, 예정보다 조금 일찍 도착했다. 로비에 들어서며 전화를 걸자, 권진영이 금세 내려왔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그가 모습을 드러냈다. 정장보다 더 깔끔한 눈빛. 그가 이런 사람이었지.
“아이고, 상무님까지 오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무슨 말씀을. 일 있을 때만 보게 되네요.”
“아닙니다. 저 정 팀장님이랑은 자주 봅니다.”
형식적인 인사였다. 그러나 세 사람 모두 그 말속의 긴장감을 읽었다.
건물 뒤편 골목 안, 식당은 조용했다. 작은 퓨전 일식집. 점심 피크 전이라 손님 하나 없었다. 진규는 조심스레 주문을 하고, 구두를 벗었다.
그 순간 모든 게 한꺼번에 밀려왔다. 불안, 절박함, 두려움, 그리고… 책임. 펜을 쥔 힘 앞에서 절박함은 진규의 온 몸을 짓눌렀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권진영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진규도 그런 자신을 발견하고선 흠칫 놀랐다. 전혀 계산에 없는 행동이었다.
“권 기자님. 저희, 정말 단 한 번만 도와주십시오.”
그 말에 식당 안 공기가 멎었다.
“어, 팀장님. 왜 이러세요.”
놀란 권진영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편히 앉으세요. 그런 말씀 마시고요.”
진규는 아무 말도 못 했다. 그저 고개를 숙였다. 그 절박함이, 말보다 더 크고 선명하게 보였다.
“오늘 이렇게 뵙자고 한 건…”
김성운도 말을 잇다 멈췄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때, 식사가 나왔다. 어묵탕, 생선구이, 밥 한 그릇. 하지만 아무도 수저를 들지 못했다. 진규가 물 한 모금 삼키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권 기자님, 며칠 밤을 새우며 취재하셨을 거 압니다. 그 열정, 존중합니다. 하지만 그 기사가 나가면… 수천 명이, 아니, 수만 명이 무너집니다.”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공장직원 5천 명이 연봉 털어서 유증에 참여했습니다. 그 가족, 협력사까지 합치면 한 도시가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그걸 한 줄 기사로 끝내 버리면…”
진규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한푼이라도 더 긁어모으기 위해 이럴 때 경영진은 관리직 생산직 구분없이 호주머니를 털었다. 그 돈은 수천억원 목표금액에서 개미 오줌만큼도 되지 않았지만, 진규는 알고 있었다. 투자자의 금고에서 나온 돈은 이자 수익이면 족했지만, 직원들 호주머니에서 나온 개미 오줌은 그들의 과거요 현재이자 미래였다. 수 많은 삶이 볼모로 잡혀 있었다.
“....그냥, .... 한 번만 생각해 주세요. 공장에서 .... 땀 흘리는 그 사람들. .... 아무것도 모르는 그 얼굴들 말입니다.”
목이 메었다. 식당 안이 고요했다. 밥 냄새 대신 묵직한 침묵이 가득 찼다. 권진영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팀장님 말씀.... 이해합니다.”
그의 눈빛이 흔들렸다. 취재 당시의 자신이 떠올랐다. 특종이라 믿었던 그 순간의 전율. 하지만 지금, 눈앞의 현실이 너무나 생생했다. 그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진규의 절박함이, 그 어떤 단어보다 진했다.
권진영은 기사를 거의 완성해놓고 있었다. 하지만 마지막 변수는, 늘 그렇듯 예상치 못한 순간에 찾아왔다. 남은 건 관계자 멘트 하나.
그리고 정진규 팀장. 딱 그 이름에서 마음이 걸렸다. 이상했다. 다른 사람이라면 그냥 전화 한 통으로 끝냈을 일인데, 정진규는 달랐다.
'왜 싸우고 그래, 사이좋게 지내.'
별것 아닌 일로 싸우고 파혼을 고민했을 땐, 모두가 훈수만 뒀다. 그런데 정진규는 달랐다. 퇴근무렵 평소 잘 가지도 않던 식당을 잡고선 여자들이 좋아할 것들만 잔뜩 골라 주문하고선 여친에게 전화하라고 성화였다.
"여친이 이 근처에서 일 하잖아요."
여친이 도착할 무렵 정진규는 화장실을 핑계로 음식값을 치르고 사라졌다. 그날 권진영은 여친과 한참을 얘기했고, 자신의 속좁았음을 반성했다. 결혼 후 임신도 쉽잖았다. 몇 번의 시험관시술 끝에 쌍둥이를 가졌지만 하늘은 뱃속의 하나를 가져갔다.
그는, 쌍둥이 중 하나를 잃고 세상이 무너졌던 자신을 묵묵히 위로해 준 유일한 사람이었다.
'둘 낳아봐야 고생만 해. 결혼 못한 사람이 수두룩한데, 하나 없어진 거 가지고 유난 떨기는.'
한참 뒤 알게 된 주변에선 철없는 농담 뿐이었다.
정진규라는 인물은 ‘인간 대 인간’으로 마주했던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마음이, 자꾸만 무거워졌다.
“홍보 많이 만났지만 죄다 회장님 타령인데, 팀장님처럼 직원들 삶을 얘기하는 사람은 처음이에요.”
“그래도… 권 기자님도 제 입장, 이해는 해주시잖아요.”
“이해하죠. 하지만 결정은 제가 아니라, 데스크가 합니다.”
그 한마디에 진규의 눈빛이 번쩍였다. 드디어, 틈이 생겼다.
‘좋아, 그 말이 듣고 싶었어.’
권진영이 ‘데스크가 결정한다’고 말해 주길 바랐다. 그건 이미 마음 한편이 흔들렸다는 뜻이었다. 진규에게 주어진 단 하나의 기회였다. 특종에 대한 기자의 갈망이 돈을 바라는 데스크 욕심보다 더 꺾기가 어려운 법이었다.
“물론입니다. 그럼, 권 기자님이 이해만 해주신다면 제가 직접 곽 부장님을 뵙겠습니다.”
“예? 우리 부… 부장을요?”
권진영은 당황했다. 정진규가 곽형진 부장을 직접 만나겠다는 건 언론판에서 말 그대로 ‘불 속으로 뛰어드는 짓’이었다. 데스크를 달았다는 건 성격이 더러워졌다는 말이었다. 언론의 사명보다 돈벌이가 우선이기에.
“당장 가서 바짓가랑이라도 붙잡고 읍소하겠습니다. 권 기자님이 양해해 주셨다고 말씀드릴게요.”
수백 번의 시물레이션. 절망 속에서도 진규는 권진영을 비빌 언덕으로 삼아야 했다. 데스크 앞에서 내밀 기자의 허락.
“아… 팀장님, 그건…”
권진영은 말끝을 흐렸다. 정진규라는 인간이 맨바닥에 무릎 꿇고 엎드린 그림이 그려졌다.
‘진짜 그럴 수도 있겠다.’
그가 알던 정진규는 그런 사람이었다. 조직을 위한 일에 한 번 마음을 먹으면 끝까지 밀어붙이는.
“곽 선배는… 쉽지 않을 겁니다. 후배들도 꺼릴 정도로 워낙 성격이 좀…”
“잘 압니다. 그래도 방법이 없잖아요?”
그때 옆에서 김성운이 입을 열었다.
“저도 가서 같이 뵙겠습니다.”
짧은 순간, 공기가 바뀌었다. 결국 권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알겠습니다. 부장님 결정에 맡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 말 한마디로 충분합니다.”
진규는 비로소 숨을 내쉬었다. 폭풍에서 살아남기 위해 폭풍의 눈으로 기어 들어온 기분이었다. 식사는 의미가 없었다. 세 사람 모두 밥을 씹는 둥 마는 둥, 그냥 젓가락만 옮겼다. 진규는 계산을 마치고 서둘러 밖으로 나왔다.
하늘은 밝았지만 마음은 여전히 먹구름. 그때, 빨간 불빛을 켠 택시 한 대가 다가왔다.
진규가 손을 들어 신호를 보내고, 손잡이를 잡으려던 찰나.
“팀장님.”
뒤에서 권진영이 진규를 불렀다.
[일요일 21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