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별이 아니다. 누군가에게 길을 밝히고 꿈이 되어야 진짜 별이다.
- 믿을 수 없겠지만 등장인물들과 회사명을 제외한 대부분의 주요 내용은 현실에 기반한 이야기입니다.
* 부라퀴 : 자신에게 이로운 일이면 기를 쓰고 덤비는 자들을 일컫는 우리말입니다.
진규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지만 떨림을 숨길 수 없었다. 목소리를 제대로 낸다고 했지만 전화기를 건너간 목소리는 이미 갈라져 있었다.
진규는 스스로가 내뱉은 말이 젖었음에 멈칫했다. 빗물엔 젖을 수 없고 절망에 젖은 목소리. 머뭇머뭇 말을 이었다.
“취재 내용, 맞을 겁니다. 구구절절 듣지 않아도요.”
“….”
“기사 나가면 전 회사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아내가 수술 후 이제 막 깨어났습니다. 금요일 저녁에요. 조금만, 시간 좀 주시겠습니까? 월요일에 나가도 세상 안 바뀌잖아요. 아직 … 아기 얼굴도 못 봤습니다.”
한참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그리고 들려온 권진영의 한마디.
“팀장님… 정말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미안함이 묻어 있었다. 진규는 숨을 고르며 마지막 카드를 꺼냈다.
“한 가지만 부탁드려도 될까요?”
“예, 말씀하세요.”
“그 투자는 2조가 훨씬 넘는 규모입니다. 그걸 대충 전화로 풀어선 안 됩니다. 월요일 오전에 차 한잔 하시죠. 민국은행 기자실에 계시죠?”
“차 한잔이요?”
“차라리 점심이 낫겠네요. 상무님도 모시겠습니다. 그날 직접 말씀드리겠습니다.”
잠시 침묵. 그리고 권진영의 대답.
“점심요… 약속이 있긴 한데요. 알겠습니다.”
진규는 그제야 아주 조금 숨을 쉬었다.
“감사합니다. 월요일 아침에 바로 연락드리겠습니다. 그전에 다른 매체 취재 움직임 있으면 바로 연락드리겠습니다.”
전화를 끊는 순간, 어둠 속에서 희미한 빛이 보였다.
‘그래, 아직 끝은 아니야.’
출산이 이렇게 절묘한 구원줄이 될 줄이야. 문득 오래전 어머니의 말이 떠올랐다.
‘이 집에는 소띠가 태어나야 집안이 제대로 돌아간다.’
진규는 온몸을 떨며 담뱃불을 붙였다. 연기가 빗속으로 흩어졌다.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김성운에게 전화를 걸었다.
“상무님. 오늘 기사 나가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래? 정말?”
김성운의 목소리는 놀람과 안도의 사이였다. 잠시 후, 그제야 조심스레 물었다.
“산모랑 아기는… 괜찮지?”
“예. 이제 깨어났습니다. 월요일 점심 같이 하자고 했습니다. 상무님과요.”
“그래. 시간 번 것만 해도 어디냐. 고생했다, 정 팀장. 주말엔 전화하지 말자. 제수씨랑 아기 옆에 있어. 난 부회장님께 바로 보고하러 간다.”
“예. 상무님… 감사합니다.”
전화가 끊기자, 진규는 그제야 모든 긴장이 풀렸다. 몸이 무거웠다. 온몸이 젖은 듯 축 늘어졌다. 병실로 돌아오니, 현숙이 깨어나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비몽사몽을 오가는 그 가운데에서도 그녀도 본능적으로 알았다. 뭔가가 있다는 걸.
창백한 얼굴, 흐릿한 눈빛. 그 시선이 진규를 붙잡았다. 그는 천천히 다가가 침대 머리를 올려주었다. 수액줄이 팔에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편하게 앉아. 괜찮아?”
그녀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기 얼굴 좀 보고 올게.”
진규는 그렇게 말하고 병실을 나섰다. 신생아실 유리창 너머로, 작은 생명이 꼬물거리고 있었다.
‘지훈아!’
그 순간, 진규는 모든 게 무너져도 이 한 생명만큼은 지켜야겠다고 생각했다. 눈물이 고였다. 비에 젖은 얼굴 위로, 뜨거운 눈물이 섞여 흘렀다.
다행히, 주말엔 아무 일도 없었다. 권진영도 자신이 내뱉은 말을 지키기 위해 주말 내내 참았다. 세상이 잠시 멈춘 듯 고요했다. 하지만 진규의 머릿속은 단 한순간도 쉰 적이 없었다. 눈은 감아도 생각은 달라지지 않았다.
‘어떻게 막을까?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버틸까?’
수백 번의 시뮬레이션. 그렇게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월요일 아침이 되었다. 새벽 공기가 싸늘했다. 그는 문을 나서며 자신에게 중얼거렸다.
‘오늘은… 버텨야 한다.’
권진영. 이매일뉴스의 ‘칼끝’. 공시자료 주석 하나도 그냥 넘기지 않는 남자. 진규는 그가 어떤 기자인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두려웠다.
그들의 인연은 짧지 않았다. 권진영이 결혼을 약속했던 여자친구와 싸웠을 때, 화해 자리를 만들어준 게 진규였다. 결혼식장엔 사회 대신 축배를 들었고, 쌍둥이 임신 소식에 둘이 코가 삐뚤어지게 마신 날도 있었다.
그러다 뱃속에서 쌍둥이 중 하나를 잃고, 권진영이 울먹이던 그 밤, 진규는 술잔을 권하며 아무 말도 없이 곁을 지켜줬다. 그런 기억들이, 지금은 고통처럼 되살아났다.
‘그렇게 공을 들였는데, 막상 일이 터지니 방법이 ….’
진규의 가슴이 먹먹했다.
“몇 시에 나가면 될까?”
김성운도 긴장하긴 마찬가지였다. 출근해서부터 계속 시계만 쳐다봤다.
“을지로 민국은행, 11시 반 약속입니다.”
“그 데스크는 누구지?”
“곽형진 부장이라고… 좀, 깐족거립니다.”
“하필 그 인간이냐?”
“예. 불편할 겁니다.”
“부회장님까지 보고했어. 이제 터질 준비는 해야지.”
“예.”
“그래도 시간 번 게 어디야. 마음의 준비는 했고, 주말 동안은 살았잖아.”
둘 다 아무 말이 없었다. 그저 시계 초침만 귀에 박혔다.
[수요일 20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