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별이 아니다. 누군가에게 길을 밝히고 꿈이 되어야 진짜 별이다.
- 믿을 수 없겠지만 등장인물들과 회사명을 제외한 대부분의 주요 내용은 현실에 기반한 이야기입니다.
* 부라퀴 : 자신에게 이로운 일이면 기를 쓰고 덤비는 자들을 일컫는 우리말입니다.
작은 진동이었는데, 심장이 같이 떨렸다. 불길했다. 아주. 화면을 들여다보는 순간, 피가 쏙 가셨다.
‘이매일뉴스 권진영 기자’.
그 이름 세 글자에 진규의 얼굴빛이 변했다. 그는 안다. 이매일뉴스, 퇴직 기자들이 만든, 그러나 현직보다 더 무서운 매체. 빠르고, 집요하고, 정확하다. 그 안에서도 권진영은 에이스였다.
신문사에서 ‘그 친구는 기자가 아니라 기관총이야’라던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었다. 진규는 잠시 고민했다.
‘받지 말까? 그냥 무시할까?’
하지만 이미 늦었다. 전화는 여전히 진동 중이었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는 본능적으로 계산했다. 지금 이 타이밍, 둘째 출산, 병원, 금요일 오후. 이 모든 게 그를 인간으로 보이게 할 완벽한 장치였다.
“어이구, 권 기자님. 오랜만이네요.”
그는 일부러 목소리를 높였다.
“지금 병원이에요. 방금 둘째가 태어나서요. 아내는 아직 마취 중이라 정신도 못 차렸어요.”
억지로 웃음소리를 섞었다. 하하, 라는 소리가 공허하게 흩어졌다.
“아, 하필 이런 날에 전화를 드렸네요. 죄송합니다. 형수님과 아이는 괜찮으시죠?”
“제왕절개라 아직 깨어나질 않았어요. 병실에선 통화가 좀 그래서요. 밖으로 나갈게요. 끊지 마세요.”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동안, 그는 깊게 숨을 들이켰다. 이건 단순한 취재 전화가 아니다. 감이 왔다.
“홍콩금융 쪽에 아는 사람이 있어서요. 피벨리기공 투자 건, 이상하더라고요.”
그 두 단어. ‘홍콩’, ‘피벨리기공’.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손바닥에 식은땀이 맺혔다.
‘다 끝났다.’
그는 직감했다. 도망칠 수 없다. 비가 쏟아졌다. 그는 헐레벌떡 병동 문을 나섰다.
“엇, 비 오네요. 잠깐만요. 요 앞에 주차장 지붕 밑으로 좀 갈게요.”
1초라도 더.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주차장으로 향하는 길,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라이터 불이 젖은 공기 속에서 번쩍였다. 담배 연기가 아니라, 숨이었다.
가쁜 숨, 억눌린 공포, 그리고 체념. 2조 원 넘던 돈에 추가된 자금까지 합치면 3조 원이었다. 홍콩, 독일, 페이퍼컴퍼니. 진규의 혼돈의 머릿속을 빨리 정리했다. 권진영의 목소리가 귓속에서 울렸다. 냉정하고, 부드럽고, 확신에 찬 톤.
“확인차 여쭤본 거예요, 팀장님.”
그는 담배를 깊게 빨았다. 빗방울이 얼굴을 때렸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았다. 그저 현실이었다.
골드맨식스. 결국, 그들에게 좋은 일만 시켜준 셈이었다. ‘글로벌 1등’이라는 허망한 욕심 하나로, 그 거금을 던져 넣었다. 안전판 따위는 없었다. 그리고 폭락한 피벨리기공 주가를 보며 또다시 파생상품에 수천억을 퍼부었다.
진규는 알았다. 이건 언론이 물 만난 고기 되는 순간이라는 걸. 탄로 나면 끝이었다. 한국기공의 미래도, 자신의 자리도. 그래서 그는 몸을 던져 막았다. 매일, 매 순간, 부서지고 부서지도록.
“팀장님, 정말 죄송합니다만… 이미 보고가 올라갔습니다. 급해서요. 확인하고 멘트 좀 부탁드립니다.”
진규는 이성을 붙잡았다.
“잠시만요. 끊지 마세요. 비가 들이쳐서요. 담배도 한대 더. 흐흐.”
그 웃음, 공허했다. 비에 섞인 건 눈물인지 빗물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기대라곤 이제 없었다. 그저, 버틸 수 있을 만큼만 버티는 게 전부였다.
‘기사는 이미 완성 단계.’
그 말의 의미는 너무 분명했다. 거짓말로 빠져나가면, 더 깊은 구덩이에 빠질 뿐이었다. 그는 머리를 쥐어짜듯 생각했다. 아무 말이나 내뱉지 않으면, 그대로 끝이었다.
“아이고, 권 기자님. 오늘은 정말… 참 타이밍이 그렇네요. 아내가 수술한 날이라, 병실에 갇혀서 아무 자료도 볼 수가 없습니다. 머릿속에 다 들어있는 것도 아니라서요. 하하하.”
“하필 이런 날 전화를 드렸네요. 죄송합니다.”
그는 억지로 웃었다. 입꼬리만 올랐을 뿐, 얼굴은 이미 다 젖어 있었다. 비 때문인지, 절망 때문인지는 몰랐다. 권진영은 미안해했지만, 전화를 끊을 생각은 없었다. 진규는 알았다. 이건 기자의 본능이었다. 마음을 지탱해 주던 굵은 기둥이 무너져 내렸다. 절망적이었다.
그리고 그는 기자의 본능보다 더 절실했다. 담배 한 개비를 더 꺼내 물었다.
‘정면 돌파 밖에 다른 길은 없다.’
불을 붙이며 스스로에게 말했다.
“권 기자님.”
목소리가 낮아졌다. 차분했지만 단단했다.
“금요일 이 시간에 멘트를 달라는 건… 이미 기사 다 써 놓으셨다는 뜻 아닙니까? 멘트만 받아서 바로 쏘겠다는 거죠?”
“역시 정 팀장님이세요. 예, 맞습니다.”
권진영이 잠시 말을 멈췄다. 그는 놀랐다. 지금 이 상황을 정확히 꿰뚫은 사람, 그게 정진규였다. 산전수전 다 겪은 남자. 진규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권 기자님, 죄송한 말씀드리겠습니다. 홍콩까지 취재하셨다니, 변명할 생각 없습니다. 하지만 그 기사 나가면… 수천 명이 피땀으로 쌓은 게 무너집니다. 그걸 하필 지금 제가 함부로 말할 순 없습니다.”
“예… 그렇긴 하죠.”
“회사에 보고할 시간만 주세요. 금요일 오후, 아무도 모르는 상황에서 터지면… 회사는 뒤집힙니다. 조금만, 시간을 주세요.”
“알겠습니다. 팀장님. 통화하시고 다시 연락 주세요.”
통화가 끊기자 진규는 그제야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겨우, 십여 분을 벌었다. 그는 바로 김성운 상무에게 전화를 걸었다.
“상무님, 큰일입니다. 권진영 기자가 움직였습니다. 홍콩 얘기까지 다 알고 있습니다.”
전화기 너머로, 정적. 숨소리만 들렸다. 잠시 후 들려온 김성운의 목소리는 이미 체념에 가까웠다.
“… 이건 끝이네. 부회장님께 보고해야겠어.”
진규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끝없이. 그때 문득, 병실 생각이 났다. 아내와, 막 태어난 아이. 그는 전화를 끊고 병실로 뛰었다.
아내 유현숙은 깨어 있었다. 창백한 얼굴, 힘없는 눈동자. 그 시선이 진규를 붙잡았다. 그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냥, 그 눈을 바라봤다. 모든 게 무너져도, 가족들만은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깐만, 다녀올게.”
그 한마디만 남기고 병실을 다시 나섰다. 창 밖에는 비가 아까보다 더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진규가 한숨 돌릴 틈도 없이, 휴대폰이 다시 떨렸다. 그 짧은 새도 못 참고 또 걸려온 전화.
‘권진영’.
진규는 눈을 질끈 감았다. 마감이란 이름의 시한폭탄이, 저쪽에서도 째깍거리고 있었다. 진규는 진동하는 전화기를 꼭 쥐었다. 그리고 병실 문을 꼭 닫으며 받았다.
“권 기자님, 집사람이 이제야 깨어났습니다. 잠깐만요, 병실이라…”
“예, 알겠습니다. 팀장님. 정말 거듭 죄송합니다.”
진규는 말없이 다시 밖으로 나갔다. 비는 아까보다 더 세졌다. 하늘이 무너지고 있었다. 그의 마음도 그랬다.
전화기 너머 권진영의 목소리는 조금 누그러져 있었다. 그도 안다. 이 남자가 어떤 상황인지, 어떤 사람인지. 한때 기자 생활이 버거워 술로 버티던 시절, 그를 찾아와 '밥 먹어요. 그냥 밥이요.' 하며 웃던 사람이 정진규였다. 그 따뜻한 미소가 문득 떠올랐다.
“권 기자님.”
[일요일 19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