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별이 아니다. 누군가에게 길을 밝히고 꿈이 되어야 진짜 별이다.
- 믿을 수 없겠지만 등장인물들과 회사명을 제외한 대부분의 주요 내용은 현실에 기반한 이야기입니다.
* 부라퀴 : 자신에게 이로운 일이면 기를 쓰고 덤비는 자들을 일컫는 우리말입니다.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그래? 무슨 일인데?”
김성운이 입술을 달싹였다.
“혹시… 한민일보 인터뷰 하신다는 말씀을….”
“응. 최 기자 만났는데, 내가 먼저 하겠다고 했어.”
“아… 예.”
“왜? 문제 있어?”
순간, 공기가 얼어붙었다. 진규는 숨도 쉬지 못했다.
“그게… 지금 회사 사정이… 좋지 않습니다. 조금 시기를 미루시는 게 어떨까 해서요.”
긴 정적. 이진희의 시선이 천천히 그들을 훑었다. 한없이 느린 눈빛. 살짝, 입꼬리가 움직였다.
“……그래? 알았어.”
그 한마디에 두 사람은 동시에 허리를 숙였다.
‘살았다.’
둘은 천천히 소리 없이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둘은 문이 닫히자마자 동시에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다. 김성운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아… 진짜 오늘 죽는 줄 알았다.”
“이제 진짜가 남았습니다. 최 기잡니다.”
진규는 떨리는 손으로 전화를 걸었다.
“지금 이 시간에 취소라뇨? 우리 한민일보가 아주 졸로 보이는 모양이네.”
“죄송합니다. 저희도 난감해서요.”
“그럼 대타 찾아요. 아니면 내가 직접 찾아갑니다.”
최경연의 목소리는 칼날이었다. 진규는 침을 삼켰다.
“잠시만 시간을 좀 주십시오.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전화를 끊자마자, 그는 숨을 몰아쉬었다.
‘방법이… 어디 있어? 지금 당장.’
홍보실, 비서진. 알고 있는 모든 인맥을 총동원했다. 그러다, 구원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이진희의 비서 유지영.
“혹시 한영그룹 윤재명 회장님 어떨까요?”
진규의 눈이 번쩍 빛났다. 한영 윤 회장의 비서는 유지영과 동문이었다. 비서학과 졸업생 커뮤니티 알림이 기적을 일으켰다.
‘기자들 대하듯 비서들에게도 정성을 다 해라.’
막연한 진규의 평소 바람과 행동이 결과를 보여줬다.
“와… 그분이라면! 저도 오케이. 유지영 씨 너무 고마워.”
진규의 귀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비서한테 무슨 고기냐며 옆에서 깐족대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한민일보라면 인터뷰 수락하신답니다.”
몇 분 뒤, 윤 회장 측 비서의 답이 왔다. 진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전화를 걸었다.
“최 기자님, 혹시 한영그룹 윤재명 회장님 어떠세요?”
“예? 윤재명 회장님이요?”
“네. 인터뷰 가능하시답니다.”
“아니, 그분이라면 제가 감사하죠. 지금 난린데!”
“회장님 비서 연락처 보내드리겠습니다.”
“정 팀장님, 이건 오히려 내가 밥이라도 한 끼 사드려야겠네요.”
통화가 끝나고 나서야 진규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맡겼다. 긴장이 풀리자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그제야 뱃속이 텅 빈 것을 알았다.
늦은 저녁 식당, 소주잔이 부딪쳤다. 김성운은 붉어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정 팀장, 오늘 진짜 사람 하나 살렸어.”
“살리긴요. 명예회장님은 여전히 그룹 내부 사정을 전혀 모르시나 보네요. 지금 한민에 인터뷰라니, 생각만 해도 살 떨립니다.”
그때, 김 상무의 폰이 울렸다. 문자 한 통. 그는 화면을 보여줬다.
- “내가 나서서 ‘괜찮다’고 하면, 세상이 ‘괜찮다’고 믿었을 텐데. 김 상무, 그게 그렇게 못마땅해?”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젓가락질 소리만 식탁 위를 맴돌았다. 진규는 천천히 소주를 들이켰다. 그리고 속으로 되뇌었다.
‘이 회사의 진짜 위기는, 언제나 안 되는 말을 못 하는 사람들이 만든다.’
세상은 언제나 목소리 큰 사람의 편에 선다. 하지만 그 목소리를 대신 막아내는 사람, 그게 진짜 권력의 그림자다.
둘째의 임신 소식을 들었던 게 한국기공으로 막 이직했을 무렵이었다. 첫 애 경훈이가 다섯 살이 넘었으니 불혹의 노산이 걱정이었다.
하지만 아내 윤현숙이 불러오는 배를 움켜쥐고 병원을 들락거릴 때도 진규는 오직 회사 일에만 매달렸다. 연줄이나 배경이 없는 진규가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기도 했지만 위기상황에 대처해 나갈 사람이 진규 외엔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어느 목요일 오후, 윤현숙은 제왕절개수술을 앞두고 홀로 입원 수속을 밟았다.
“여보, 내일 정오에 수술이래.”
“그래? 일찍 마치고 병원으로 갈게.”
진규의 목소리는 떨렸다. 둘째 출산이 내일로 잡혔다는 것과 동시에 회사를 하루 비울 수밖에 없다는 불안감이었다.
김성운 상무의 얼굴이 대번에 굳어졌다. 진규가 잠시만 자리를 비워도 회사는 불안에 떨었다. 김성운부터 구조본 임원 그리고 명색이 대표이사인 강원병 사장까지 긴장했다.
“폰은 계속 켜 두고 있겠습니다.”
“그래, 이번 일은 어쩔 수가 없지.”
김성운은 애써 웃음을 보였지만 얼굴엔 불안감이 한가득이었다.
새벽이었다. 눈을 뜨자마자 기도부터 했다. 하느님, 예수님, 부처님… 그리고 오래전 세상을 떠난 할머니까지. 믿을 건 뭐든 다 붙잡고 싶었다. 이제 태어날 아이와 오늘 하루 회사도 제발 아무 일이 없기를 되뇌었다.
낯선 병원 침대는 생각보다 딱딱했고, 온몸이 두드려 맞은 것처럼 결렸다. 수술 전이라 물 한 모금, 밥 한 숟갈도 금지였다. 그 때문에 옆에서 제대로 먹지도 못해 속은 텅 비었는데 마음은 잔뜩 차올라 있었다.
한참 뒤, 간호사 셋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흰색 복장, 분주한 손, 익숙한 움직임. 잠이 덜 깬 산모는 이동 침대로 옮겨져 흔들거리며 밀려 나갔다. 진규는 본능처럼 따라나섰다.
수술실 앞, 전광판에 ‘대기 중’이라는 붉은 글씨가 떴다. 잠시 후 ‘수술 중’. 그 두 글자 사이에서, 진규는 수십 번 숨을 삼켰다.
오랜 시간이 지나 ‘회복 중’으로 바뀌는 순간, 그는 거의 뛰다시피 수술실 앞으로 달려갔다. 문이 열렸다. 흰 천에 싸인 작은 생명이 나왔다. 손가락, 발가락, 눈, 코, 입.
“지훈아…”
떨리는 목소리로 아이의 이름을 불렀다. 임신 소식을 듣자마자 6개월간 고심해 선택한 둘째 이름. 대답은 없었다. 그래도 들리는 듯했다.
‘나 여기 있어요, 아빠.’
그제야 공복이 밀려왔다. 하지만 배고픔보다 먼저 그리운 건 담배였다. 병원 앞 긴 복도를 따라 잰걸음으로 밖으로 나서자마자 담배 두 개비를 연달아 피웠다. 하얀 연기가 허공으로 흩어질 때마다, 마음속 두려움도 조금씩 흩어지는 듯했다.
편의점에서 삼각김밥과 사발면을 사서 허겁지겁 먹었다. 그제야 현실이 입 안으로 들어왔다. 짜고, 뜨겁고, 살았다.
오랜 기다림 끝에 수술실에서 나온 윤현숙은 수액을 주렁주렁 달고 힘겹게 숨을 쉬었다. 진규는 말없이 그녀의 팅팅 부어버린 얼굴을 내려다봤다.
‘혼자서 고생했어. 미안해.’
그 한마디가 목구멍에 걸려 나오지 않았다. 대신 시선으로 말했다.
‘미안하고, 고맙고, 사랑한다고.’
그때였다. 안주머니 속 휴대폰이 부르르 떨렸다.
[수요일 18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