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열이 사고를 낳다 / 선악·이분법적 세계관의 형성
2는 갈라짐의 숫자다.
하나가 스스로를 설명하지 못할 때
인간은 둘로 나눈다.
빛과 어둠, 하늘과 땅, 선과 악
2는 세계를 단순화하려는 욕망이자
사고가 작동하기 시작하는 최소 조건이다.
자연은 연속이지만 인간의 인식은 구분을 요구한다.
낮과 밤을 나누고 안과 밖을 가르며
안전과 위험을 분리한다.
이때 2는 생존의 기술이다.
구분은 판단을 낳고 판단은 행동을 가능하게 한다.
2는 세계를 둘로 찢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해하기 위해 가른 첫 선이다.
도덕의 언어는 대부분 이분법으로 시작한다.
옳음과 그름, 허용과 금지
이런 구조를 가장 분명히 제시한 전통 가운데 하나가
조로아스터교의 선악 이원론이다.
조로아스터의 사유에서
선(아후라 마즈다)과 악(앙그라 마이뉴)은
우주를 관통하는 두 원리로 대립한다.
이 대립은 숙명이 아니라 선택을 요구한다.
인간은 중립적 존재가 아니라
둘 중 하나에 가담해야 하는 행위자다.
2는 윤리를 결단의 문제로 바꾼다.
서양 철학은 오래도록 둘을 통해 사유했다.
감각과 이성, 현상과 본질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는
보이는 세계와 참된 세계를 분리함으로써
진리에 이르는 길을 제시한다.
이분법은 단순화이지만 동시에 깊어진다.
둘로 나누어야
사이의 긴장이 생기고
긴장 속에서 사유는 전진한다.
2는 공동체를 만들기도, 깨뜨리기도 한다.
신자와 이교도, 우리와 그들
경계는 내부를 결속시키는 가장 빠른 방법이다.
정치는 종종 이분법을 호출해
복잡한 현실을 단순한 구도로 바꾼다.
그러나 이런 단순함은 위험하다.
중간의 목소리는 사라지고
회색지대는 배제된다.
2는 이해의 도구이자
동원의 장치가 된다.
동양의 사유는 2를 다르게 다룬다.
음과 양은 적이 아니라 상호 의존이다.
낮은 밤을 낳고, 밤은 낮을 준비 한다.
이분은 대립이 아니라 순환이다.
이 관점에서 2는
싸우는 두 힘이 아니라
균형을 이루는 두 극이다.
분열은 곧 조화의 전제다.
2는 완성의 숫자가 아니다.
그러나 사유의 출발점이다.
구분하지 않으면 질문할 수 없고
대립이 없으면 선택도 없다.
다만 인간은
둘로 나눈 뒤 다시 묻는다.
둘은 정말 전부인가.
사이에는 무엇이 있는가.
2는 질문을 열어두는 숫자다.
2는 갈라짐이 아니라, 생각의 시동이다.
2는 세계를 찢어 놓기 위해 등장하지 않았다.
세계를 생각 가능하게 만들기 위해 나타났다.
선과 악, 참과 거짓, 나와 너
이 구분 위에서
윤리와 철학, 정치와 종교가 자라났다.
그러나 2의 마지막 과제는 언제나 같다.
둘로 나눈 뒤 다시 어떻게 만날 것인가
사고는 분열에서 시작하지만
성숙은 분열을 넘어서는 데서 완성된다.
Hen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