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 타이거
나는 지금 닭장 안에 있다. 몇 번이고 탈출을 시도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닭장이 주는 안락함에 중독되었거나, 선을 넘을 용기가 부족했기 때문일 것이다. 평소에는 이 삶이 답답하거나 이상하다고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문득 내가 갇혀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면, 숨 쉬는 공간조차 옥죄어 오는 듯하다. 마치 무의식적으로 삼키던 침이 의식하는 순간 갑자기 불편해지는 것처럼 말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불편함은 금세 사라지고, 나는 다시 아무렇지 않게 닭장 안의 삶을 이어간다.
책상에 앉아 설계 도면과 씨름할 때면, 머리는 지끈거려도 가슴이 답답하지는 않다. 물론 나의 부족함에 자책할 때는 있지만, 그것은 '닭장'이 주는 답답함과는 결이 다르다. 내가 느끼는 진짜 질식감은 이 일을 평생의 업으로 삼아야 한다는 압박감, 그리고 곧 다가올 계약 만료 후의 막막함에서 온다. "좋아하지도 않는 일을 위해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라는 회의감이 들 때면 숨이 턱 막힌다. 하지만 당장 이 일을 그만두면 생계를 이어갈 수단이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 하필이면 내가 가장 기피했던 '설계'뿐이라는 사실. 이것이 나를 닭장 안에 가두는 진짜 쇠창살이다. 모두가 겪는 통과의례인지, 아니면 나만 유독 나약한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줄어드는 시간을 보며 조바심이 나는 건 어쩔 수 없다.
어릴 적엔 취업에 목매며 아득바득 사는 이들을 비웃었다. 인생은 긴데 왜 그리 직업을 가볍게 선택하느냐며, 신중하지 못한 그들을 얕잡아봤다. 하지만 정작 어리석은 건 나였다. 성과 없는 노력은 세상이 인정해주지 않는다. 헤밍웨이는 《노인과 바다》를 통해 '노력은 그 자체로 실재하며 인간을 숭고하게 만든다'고 했지만, 적어도 한국 사회에서 이 말은 공허하다. 로또 1등과 '노력하는 성질' 중 하나를 고르라면 누구나 전자를 택할 테니까. 우리가 믿는 노력의 가치란 딱 그 정도다. 이것은 내가 사회에 나와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현실이다.
영화 속 주인공 발람은 성공하기 위해 기꺼이 도덕적 선을 넘었다. 가족은 족쇄였고, 그의 계급은 사회적 천형이었다. 그가 닭장을 탈출하는 유일한 방법은 주인을 물어뜯는 것뿐이었다. 발람이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한 계기는 복합적이었다. 자유분방한 핑키 부인이 인도의 계급 사회를 견디지 못하고 떠나는 모습, 손자를 돈 몇 푼에 팔아버린 할머니의 착취에 대한 분노, 그리고 다른 운전기사를 고용하려는 주인 아쇽의 배신까지. 이 모든 것이 도화선이 되었다. 중요한 선택은 결코 가볍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발람은 주인 아쇽을 죽인 뒤, 스스로 아쇽이 되어 살아간다. 과거의 하인 발람을 지워버림으로써 비로소 자유를 완성한 것이다.
발람은 인도를 두 가지로 정의한다. '빛의 인도'와 '어둠의 인도'. 빛의 인도는 아쇽 같은 상류층이 샹들리에 아래서 누리는 삶이고, 어둠의 인도는 60년을 꾸역꾸역 버텨도 고작 허름한 판잣집 하나 겨우 얻는 삶이다. 한국이 인도만큼은 아니겠지만, 계층 이동의 사다리가 끊어진 것은 분명해 보인다. 부모님 세대만 하더라도 성실히 일하면 집을 넓혀가며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불가능에 가깝다. 부모보다 가난한 첫 번째 세대가 된 한국의 청년들에게 현실은 가혹하다. 복지나 문화 수준은 비교할 수 없이 좋아졌다지만, 땡전 한 푼 쥘 수 없는 젊은이의 입장에서 이런 사회 구조는 야속하기만 하다.
자신을 죽여야만 얻을 수 있는 그 자유가 안타까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사무치게 부러웠다. 단 한 번 선을 넘는 것으로 얻을 수 있는 자유라니. 현실에서는 그런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비열한 방법으로 성공하려면 수십 번, 수백 번 비열해져야 하고 그 과정에서 인간성은 서서히 마모된다. 나는 그걸 잘 안다. 나 역시 오랫동안, 어쩌면 지금도 현실과 타협하며 비열한 인간으로 살고 있기 때문이다.
노력과 도덕에 대해 자조 섞인 말을 뱉었지만, 사실 나는 여전히 노력하는 삶을, 도덕적인 삶을 살고 싶다. 그것이 어릴 적 꿈꿨던 '좋은 어른'의 태도이자, 훗날 나의 조카나 자식들에게 물려주고 싶은 유산이기 때문이다. 공든 탑은 절대 혼자 쌓을 수 없다. 수많은 사람의 수고와 열정이 필요하다. 비록 시간은 오래 걸리고 비바람에 쉽게 무너질지라도, 함께 탑을 쌓았던 사람들과의 추억과 노력 진실로 남는다. AI가 무엇이든 해내는 세상이라지만,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결국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