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은 마치, 내가 너를 사랑하게 된 것처럼 시작한다
어린 시절 친구와 나눈 대화 속의 이야기를 꺼내본다.
"언젠가 뉴욕에 갈 날이 오면, mp3에 Jay-Z의 Empire State of Mind를 들으면서 뉴욕의 거리를 걷고 싶고, 홍콩에 가면 중경삼림(重庆森林,Chungking Express)의 주제가인 몽중인(梦中人)을 들으며 홍콩을 떠돌고 싶어."
물론 이렇게 정제된 단어로 우리의 대화가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그냥 우스갯소리처럼 장난 삼아 막 군대에서 전역한 남자 놈들끼리 나누는 영양가 없는 대화의 한 단락이었을 뿐이다.
2025년 홍콩 센트럴 역에 내려서 밖에 나왔을 때, 그 후덥지근한 공기 속 따라오는 희미한 소금짠내가 코를 스치는 순간. 2011년에 분당 미금역 사거리에 한참 눈 내리던 그날밤의 대화가 떠오르는 건 왜였을까? 그리고 자연스레 이제는 멜론보다 더 익숙한 중국의 QQ Music의 플레이리스트를 누른다.
아쉽지만, 나의 선곡은 중경삼림의 몽중인이 아닌, 홍콩 가수이자 배우인 미리엄 양(양천화, Miriam Yeung, 杨千嬅)의 소성대실(작은 도시, 커다란 일 小城大事). 아마 2017년부터 2020년까지 내가 머물던 디자인 스튜디오를 매일 가득 채우던 - 필자는 홍콩인근 광동성 출신 친구들과 약 3년 이상 디자인스튜디오에서 먹고 자고 하면서 지냈다 - 그녀의 노래를 틀어본다.
"청춘은 마치, 내가 너를 사랑하게 된 것처럼 시작한다(青春仿佛因我爱你开始) 그렇지만, 오히려 그것 때문에 사랑(爱)이란 것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但却令我看破爱这个字)"
내가 유일하게 따라 부를 수 있는 광동어이면서도, 가장 좋아하는 노래의 첫 소절과 함께. 홍콩행을 떠올리고, 기억하고, 기록한다.
청춘, 푸를 청(青) 자와 봄 춘(春)이 합쳐진 글자. 동아시아에서는 예로부터 인생의 가장 불완전하면서도, 생명력 넘치는 그런 모순 속에서 아름다움을 준비하는 시기를 의미하곤 했다. 흔히들 과거에는 20대에 청춘이 끝난다고 표현했는데, 요즘은 그래도 사회가 많이 발전했으니까 한 30대 중반까지는 청춘으로 봐야 하지 않나 싶다. 그렇다면 2025년 서른 중반의 나나, 중경삼림 속 왕페이가 양조위의 집을 훔쳐보던 홍콩의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Mid-levels Escalator)의 종착지는 결국 청춘의 출구가 아니었을까?
나에게 홍콩은 참 신기한 도시다. 내가 어릴 때, 미국 회사에서 근무하신 어머니는 종종 홍콩으로 출장 겸 출근을 하시곤 하였다. 그때는 홍콩이 어딘지도 모르고, 그저 그냥 조금 멀리 위치한 느끼한 음식들 많이 파는 곳이라고 생각했다. 95년도인가 97년도인가 부모님을 따라 ‘빈탄’이라는 곳을 방문했는데, 그때 당시에는 빈탄을 직항하는 비행기가 없어 홍콩에 들렀다. 아마 당시에 어머니 회사의 어떤 분이 우리 가족을 정말 딱 원형 식탁 크기의 초대형 선반에, 춘권과 각종 딤섬을 과장 없이 수백 개 정도 주는 식당에 데려갔는데, 그걸 먹고 정말 며칠 동안 속이 메스꺼워 빈탄여행에서 과일만 먹은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지금은 없어서 못 먹지만, 그때는 그 기름냄새가 얼마나 강렬했던지, 2000년 초반까진 기름에 튀긴 음식을 거의 먹지 않았다.
뭐 여하튼 나한테 90년대의 홍콩은 느끼한 음식들을 많이 파는 곳이었다. 2000년대에 들어서는 한참 김용 선생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 의천도룡기 같은 홍콩 만화책들에 빠져서. 실제로는 뭐 대륙이랑은 굉장한 거리가 있지만, 홍콩 = 무협지 속의 중국 정도로 인식했던 것 같다.
그리고 2023년부터 코로나가 끝나고, 운 좋게 매년 계속 홍콩 쪽에 일이 생겨 방문을 한다. 2025년은 주홍콩한국문화원 Open Call에 《앨리스·거북, 문 속 토끼들》(Alice·The Turtle, Rabbits beyond the Door)이라는 기획으로 당선되어 전시오프닝 및 전시철수로 두 번 홍콩을 방문하였다.
올해 두 번이나 방문한 홍콩은 유독 독특한 느낌을 주었는데, 전시오프닝 참석차 방문했을 때는 이상하게 매일 오전 새벽 4시 30분에서 5시 사이에 눈이 떠졌다. 폭우경보가 내린 날에도 운이 좋아, 비를 맞지 않고 오전에 조깅도 하고 산책도 하며 성완에서부터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를 지나 센트럴, 어드미럴티 그리고 완차이를 걸어 다녔다. 그런 와중,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의 상단부에서 센트럴로 넘어가는 그 길에서 구름에 둘러싸인 빅토리아 피크를 바라보았는데, 조금 기분이 묘했다.
아마 어린 시절의 기름진 홍콩에서, 청소년기의 낭만과 호기심의 도시를 지나 이제 마흔을 향해 가는 나이에 바라본 홍콩은, 더 이상 기름 냄새도 낭만도, 그리고 호기심도 조금은 구름 낀 빅토리아 파크처럼 옅어져 잘 보이지 않는 듯한 인상을 남겼다. 돌이켜보자면 이때 내가 한참 '향상(向上)'이라는 것에 많은 생각을 했던 때인데, 그 막막함이 저 구름에 겹쳐 보인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그렇게 전시 오픈을 잘 마무리하고, 9월 말 다시금 전시철수를 위해 홍콩을 방문하였다. 이때는 나의 가장 애정(?)하는 학생이자, 중국 최고의 명문미술학교에서 조각을 전공 중인 재형이와 함께 하였다. 사실은 여러 가지 이유로 폐기할 것들이 있어, 일손이 부족하기도 하였고. 일 잘 마치고, 둘이 같이 마카오나 가서 마카오에서 하던 대형 예술전시(마카오 비엔날레였나?)도 보는 게 목적이었지만. 오프닝의 폭우경보에 이어서 철수의 태풍경보를 맞이한 두 사람은 그냥 홍콩에서.. 럭셔리한 호캉스와 태풍으로 인해 아주 제한적인 상황의 맛집투어를 이어갔다.
그 과정에서 옥토퍼스와 신용카드를 둘 다 안 받는 카우키 누들(Kau Kee Restaurant) - 다시는 한국 인터넷상에 추천하는 맛집리스트들은 믿지 않겠다 - 에 재형이를 담보로 맡기고 은행에 현금을 찾으러 가는 해프닝도 있었고. 또 원래는 너무 맛집이어서 줄을 서야 하는데, 태풍으로 인해서 텅 비어버린 식당 차오디 라시에(Under Bridge Spicy Crab, 桥底辣蟹)에 가서 그 고요함 속에서 새우를 먹기도 했다.(스파이시 크랩이지만, 크랩은 까먹기가 귀찮아서 잘 안 먹고. 사실 저 식당이 후난/사천요리 전문점인데, 태풍이 아니었으면 갈 일이 없지 않았을까 싶다)
뭐 그래도 가장 만족하는 건, 홍콩섬을 배회하다 둘이 들어간 빙싯(冰室, 레트로 홍콩 마카오 감성의 상징, 차찬팅의 전신이라고 볼 수 있다)에서 너무나도 로컬하게 직접 메뉴를 하나하나 추천해서 주문을 넣어주는 주인장 아저씨의 감성과 그 밍밍한 국물에 마카로니를 풀어서 먹는 港澳(항오, 홍콩과 마카오)의 - 사실 마카오에 가깝지만 - 의 추억. 그리고 홍콩섬 어디 건물 2층에 위치한 딤섬집에서 새우단화밥(蛋花饭, 달걀밥? 달걀덮밥)을 먹으며 본 수조 속 동성반(东星斑, 자주바리)의 모습이지 않을까.
그래, 나열하자면 그렇다. 가장 기뻤어야 할 오프닝은 정체 모를 먹먹함과 뿌연 구름처럼 다가왔다면, 사실은 섭섭하면서도 슬펐어야 할 전시의 철수는 짭짤한 소금기를 머금은 채 무던히 우리가 머물던 호텔벽을 흔들던 태풍과 함께 먹먹함을 날리고, 그 자리를 새로운 추억으로 메운다.
미리엄 양은 청춘은 사랑을 하는 것과 같이 시작한다고 한다. 그러면서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고. 사랑이란 것은 인연의 연장선이라 우리가 통제 못할 기쁨과 우연한 슬픔의 변주로 가득하다. 결국 그녀의 노래는 사랑을 시작하는 것과 같이 우리의 예측불가능한 청춘이 시작되고, 사랑을 알게 된다는 것은 청춘이 지고 그 청춘을 통해 인생에 대해서 배워간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었을까? 어떤 일이 앞으로 일어날 것 같은 느낌을 미리 감지하는 것을 예감(预感)이라고 한다. 내가 홍콩 센트럴 역에 내려서 짠내 나는 공기를 맡으며 미리엄 양의 소성대실을 듣게 된 것이 어쩌면 청춘의 끝을 알리는 예감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든다.(2025.12.06 마음속 큰 고마움으로 남을 재형이에게 글은 남기며)
추가적으로 오프닝 때, 준비했던 작품소개글을 남깁니다.
(오프닝 작품소개 - 몽영극장, 유불도 찬팅)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별주부전. 우리는 무언가를 통하는 '문'을 통해 다른 세계를 대면하고자 하는 이상을 꿈꿉니다. 혼자 있는 집에서 굳게 닫힌 방문을 바라보며, 문득 저기서 뭔가 나올 것 같다거나. 매일 보던 문이 그날따라 유독 이질적으로 다가올 때. 우리의 사고는 현실과 몽환의 세계의 중간 어느 지점에 잠깐 머뭅니다. 그렇게 조심스레 한 걸음, 또 한 발짝 다가서서 숨죽이며 문고리에 손을 올린 그 순간. 사실 우리는 문고리에서 전해지는 차가운 재질감 속에서 이상향에 대한 기대와 낯섦을 상상합니다.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몽영극장'과 각기 유교, 불교, 도교를 상징하는 상징하는 세계의 글자가 적힌 네온사인. 유불도 찬팅(식당) 시리즈는, 우리가 마주한 순간의 이상향 그 이후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 작품입니다.
사실 우리는 문고리에 손을 올린 그 순간, 그 순간의 두근거림과 긴장 때문에. 그 이후의 순간에 대해서 기대합니다. 그러나 집에서 방문을 열면 마주하는 것은 우리가 항상 바라봤던 보편적인 우리 집의 일면입니다. 우리는 현실 속에 있습니다. 변한 건 없는 것이죠. 다만, 그걸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이 잠깐 다른 곳에 갔다 왔을 뿐입니다.
요즘날 사람들은, 이 문고리가 가져다주는 이상향적인 감각을 추종하는 듯 보입니다. 두근거리고, 감각적이고, 빠르고, 화려한. 그러나 항상 그 이상향 뒤편에, 이상향이라는 곳이 현실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과거에 아메리칸드림처럼, 수많은 대륙인들이 홍콩으로 이주하여 그들만의 '홍콩드림'을, 또 많은 홍콩인들이 사자산 아래서 lion rock spirit을 자신의 이정표로 삼은 이유는. 결코 홍콩이라는 지역이 가진 이상향적인 면모가 아니라, 그들이 자신의 현실에서 마음속 확고한 이상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현실을 살아야 하고, 그 현실을 바라봐야 하고, 현실 속에서 이상향을 찾아야 합니다.
저는 무대가 존재하지 않는 극장, 간판만 존재하는 식당에 대한 이야기로 여러분들께 이런 이야기를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제 부족한 작품이 여러분들께, 이런 이야기를 전달해 드릴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