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사는 삶이란 대체 무엇일까?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
— 『시지프 신화』, 알베르 카뮈
다시 원래의 질문으로 돌아와 봅시다. 당신은 대체 어떻게 살 건가요? 앞선 글에서 소개한 설계 방법론의 5단계를 이 거대하고도 막막한 질문에 적용하기 위해 가장 먼저 수행해야 할 공정은 문제를 객관적으로 정의하고, 그 문제를 풀 때 어떤 도구를 사용할지 결정하는 것입니다. 공학적인 방법론이 다루는 모든 문제는 해결해야 할 구체적인 사양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건축 사무소에 집을 지어달라고 의뢰할 때 단순히 "살기 좋은 멋진 집을 지어주세요"라고 말하는 의뢰인은 없습니다. 대신 가용 예산은 어느 정도인지, 어떤 공간과 편의 시설이 우선되어야 하는지, 채광과 단열 성능은 어느 수준까지 보장되어야 하는지 등 만족되어야 할 사양들을 명확히 제시합니다. 이처럼 해결해야 할 문제의 범주와 요구 사항들이 확정되어야만 설계자는 비로소 어떤 재료를 고르고 어떻게 도면을 그려낼지 결정할 수 있습니다. 우리 삶의 문제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어떻게 잘 살 것인가?"라는 질문은 설계의 관점으로는 도무지 풀 수 없는 불분명한 입력 데이터입니다. '잘 산다'는 추상적인 말속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모호한 욕망과 형이상학적인 가치들이 잔뜩 뒤엉켜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첫 번째 단계로 ‘잘 산다’라는 지극히 주관적인 지표를 누가 보아도 동일하게 인식할 수 있는 객관적인 지표로 번역해내야만 합니다.
주관적인 지표를 객관적인 지표로 번역하는 것, 사실 이 작업조차도 우리가 풀어내야 할 또 하나의 문제입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이 막막한 사유의 들판을 맨손으로 개척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휘둘러볼 수 있는 유용한 도구들은 이미 인류의 지성사 도처에 널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인간의 삶과 이 난해한 세상에 대해 우리보다 앞서 고민하고 밝혀낸 선구적인 학문인 철학입니다. 도서관이나 서점에 찾아가 책 몇 권만 집어 들어도, 이미 수많은 철학자들이 수천 년 동안 고찰하여 정립해 둔 심오한 이론들이 우수수 쏟아집니다. 특히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존재할 것인가"라는 물음은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수세기 동안 치열하게 분석해 온 주제들입니다. 그들이 남긴 수많은 고전과 기록들은 우리가 저 밑바닥부터 사유의 고통을 겪으며 오랜 기간 연구해내지 않더라도, 이미 검증된 논리 체계를 즉시 가져다 쓸 수 있게 해 줍니다. 우리는 그저 이 지독한 인생 선배들이 남긴 방대한 사유의 기록들을 오픈 소스 라이브러리처럼 가져와 효과적으로 활용하기만 하면 됩니다.
심리학 또한 주관을 객관으로 치환해 주는 훌륭한 정밀 분석 도구가 됩니다. 심리학은 인간의 심리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를 기반으로 개인의 삶의 질을 개선할 수 있는 방법을 과학적으로 탐구해 온 학문입니다. 우리가 잘 모르는 나라는 개인의 고유한 행동 패턴부터 타인과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복잡한 심리적 메커니즘까지, 심리학은 방대한 데이터를 통해 이를 규명하고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정의해 왔습니다. 예를 들어, 심리학자는 반복되는 우울의 원인을 인지적 오류라는 개념을 통해 사고 과정의 오류에서 찾아내거나, 타인과의 관계에서 오는 피로도를 애착 유형과 같은 심리학적 지표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우리는 심리학의 대상이 되는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또 어떻게 더 나아지게 할 수 있는지, 명확히 알 수 있게 됩니다. 이처럼 심리학은 인간을 실제로 ‘잘 살게’ 만드는 구체적인 방안들을 이미 수많은 임상과 데이터를 통해 제시해 왔습니다. 이제 우리는 철학이 짚어낸 실존의 이유를 나침반으로 삼고, 심리학이 정리한 개념과 방법론들을 망원경으로 삼아보려 합니다. 그렇다면 이전까지는 시야가 닿지 않아 도무지 보이지 않던 우리네 인생 여정의 목적지가 대체 어디인지 비로소 찾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우선 철학의 세계를 들여다보며 “어떻게 잘 살 것인가”라는 문제를 어떤 식으로 구체화할 수 있을지 그 방향을 잡아봅시다. 철학자들이 제시하는 이론은 저마다 다르지만, 여러 학설을 둘러보다 보면 공통되는 지점을 하나 찾을 수 있습니다. 바로 “인생에는 고통이 있다”라는 전제입니다. 삶의 태도를 결정할 때 고통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요소이기에, 당연하게도 많은 철학자들은 삶에서 마주하는 고통을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이며 다룰지 고민해 왔습니다. 그중 어떤 이들은 고통이 이 세상의 전부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앞선 글에서도 소개했듯이, 인류의 스승이라 불리는 부처는 삶을 고통의 바다인 고해(苦海)로 정의하였고, 철학의 거장 '쇼펜하우어'는 인간의 욕망이 결코 채워질 수 없기에 삶은 본질적으로 고통과 권태 사이를 오가는 시계추와 같다는 비관론을 내세웠습니다. 좀 더 극단적인 예로는 현대 철학에서 가장 도발적인 비관론으로 꼽히는 '데이비드 베나타'의 반출생주의가 있습니다. 그는 '쾌락의 부재는 누릴 주체가 없다면 나쁜 게 아니지만, 고통의 부재는 겪을 주체가 없더라도 그 자체로 좋은 것'이라는 비대칭성 원리를 내세우며,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라고 주장합니다.
이 관점을 삶의 문제를 객관화해 보는 시작점으로 삼아봅시다. 만약 인생이 고통뿐이라면, “어떻게 잘 살 것인가”라는 질문은 “어떻게 고통을 줄일 수 있는가”라는 구체적인 질문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질문이 이토록 명쾌해진다면, 우리는 이제 고통을 줄이는 데 알맞은 도구를 가져와 마음껏 사용해 보면 됩니다. 이때 도출되는 가장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최적화 해답은 의외로 간단해 보입니다. 바로 시스템 종료, 즉 자살입니다. 고통을 원천 차단하는 대책으로서 자살이 가장 논리적인 정답이 아니냐는 극단적인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동작시킬수록 손실만 발생하는 시스템은 가동을 중단하는 것이 공학적으로 가장 타당한 결론입니다. 만약 죽음이라는 과정의 고통이 너무 커서 도리어 고통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약물의 힘에 의존하여 안락한 죽음을 맞이하는 방법도 불가능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이런 방식의 해결책은 논리적으로는 맞을지 몰라도, 우리의 감정으로는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무엇이 잘못된 걸까요? 이 지점에서 또 다른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의 이야기를 들어봅시다.
삶은 고통일 뿐이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거짓말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대들은 더 이상 살지 않도록 하라! 고통일 뿐인 삶을 사는 것을 그만두도록 하라!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프리드리히 니체
위 이야기는 얼핏 들어보면, 우리에게 그만 살라고 종용하는 것처럼 느껴져, 철학자들은 왜 죄다 이 모양인가 싶기도 합니다. 하지만 사실 니체의 이 외침은 결코 자살을 권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앞서 설정했던 “인생은 고통뿐이다”라는 문제 정의를 겨냥하여 역설적인 조롱을 던지는 것입니다. 삶은 오직 고통으로 가득 찼을 뿐이라고 비관하면서도, 정작 꾸역꾸역 생을 이어가는 이들의 위선과 논리적 모순을 날카롭게 지적하는 것입니다.
흥미로운 지점은, 탄생을 해악이라 규정했던 베나타조차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 하지만 이미 태어났다면 자살은 정답이 아니다”라고 선을 긋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존재하지 않는 상태가 고통이 없는 더 나은 상태인 것은 맞지만, 이미 가동 중인 시스템을 강제로 멈추는 행위는 그 자체로 죽음의 해악이라는 또 다른 막대한 비용이 발생한다고 보았습니다. 물론 이 지점에서 그의 주장은 논리적으로 모순이라는 수많은 비판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논리적인 검증 과정을 세세히 들여다보는 것은 우리의 목적과 맞지 않습니다. 대신 우리가 집중해야 할 지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세상은 고통으로 가득 차 해악뿐이라는 주장, 그렇기에 고통을 줄이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문제 정의, 그리고 자살이라는 해결책까지. 이 일련의 흐름을 모두 받아들이기에는, 엄밀함을 조금 덜 추구할 여지가 있는 공학의 관점으로 보아도 지나치게 위험해 보인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삶을 포기하지 않고 기어이 하루를 더 살아내는 이유는 단순히 죽음이 두려운 생물학적 본능 때문만은 아닙니다. 물론 모든 생명체에게는 포식자를 피하고 생존을 도모하는 본능적인 기제가 각인되어 있지만, 인간은 그 본능마저도 자신의 의지로 꺾을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 고단한 생의 무게를 기어이 짊어지고 나아가는 것일까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역설적으로 '인간은 왜 스스로 삶을 등지는가'라는 아픈 질문을 먼저 던져보아야 합니다. 삶을 포기하는 이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존재의 소멸 그 자체가 아닙니다. 그들이 간절히 바라는 것은 끝나지 않는 고통의 정지입니다. 현재 나를 짓누르는 절망과 고통의 무게가 너무나 압도적이어서,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 대한 어떤 희망도 이 고통을 상쇄할 수 없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 때 인간은 마침내 삶의 끈을 놓게 됩니다. 즉, 자살은 삶에 대한 증오가 아니라, 고통을 멈출 수 있는 다른 방법이 보이지 않을 때 선택하는 최후의 비극적인 탈출구인 셈입니다. 우리가 오늘을 살아내고 있다는 것은, 아직은 우리 마음속에서 고통보다 살아야 할 이유가 단 1그램이라도 더 무겁게 남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인류의 지성사는 이러한 절망의 순간마다 우리를 붙잡아줄 수 있는 강력한 방어 논리들을 구축해 왔습니다. 인류가 쌓아온 거대한 종교와 철학의 가르침들은 사실 우리가 삶을 포기하지 않고 기어이 유지해야만 하는 필연적인 이유들을 알려줍니다. 불교는 자살을 고통의 종결이 아니라, 오히려 해결하지 못한 업(業)이라는 무거운 짐을 품은 채 문제를 회피하려는 행위로 규정합니다. 지금 이 생의 고통을 피해 도망치듯 생을 마감한다면, 결국 다음 생이라는 새로운 환경에서 훨씬 더 가혹하고 참혹한 고통의 굴레에 빠져 다시 태어날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통을 키워 다음 단계로 전가하는 일입니다. 불교가 말하는 진정한 자유는 세상을 등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비워내어 세상을 있는 그대로 투명하게 바라볼 때 찾아오는 오롯한 평온에 닿는 일입니다. 결국 죽지 말고 살아서 수행하라는 조언은, 삶을 유지하며 내면을 닦았을 때 비로소 도달할 수 있는 해방이 그 어떤 고통보다 귀함을 뜻을 가집니다.
기독교의 논리에도 이와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기독교는 인간의 생명을 창조주로부터 잠시 위탁받은 거룩한 선물로 정의하며, 자살을 신이 인간을 창조한 권한을 침해하는 오만이자 돌이킬 수 없는 잘못으로 규정합니다. 그렇기에,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선택 뒤에는 지옥이라는 영원하고도 더 거대한 형벌이 예고되어 있습니다. 이는 인간이 지켜야 할 최소한의 도리를 어겼을 때 가해지는 가장 강력한 처벌입니다. 동시에 기독교는 고통이라는 필수적인 시련을 인내한다면, 그 끝에는 영원한 안식이라는 절대적인 가치를 약속합니다. 나를 만든 존재가 내게 부여한 책임이 있다는 믿음, 그리고 그 소명을 완수함으로써 도달하게 될 낙원이라는 개념이 우리를 살게 하는 힘이 됩니다.
철학의 영역에서 ‘알베르 카뮈’는 또 다른 방식으로 이 문제를 돌파합니다. 그는 삶이 본질적으로 부조리하고 무의미하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자살이야말로 그 부조리에 굴복하는 가장 비겁한 방식이라고 말했습니다. 산 정상에 돌을 올려놓더라도 그새 다시 굴러 떨어질 것을 알면서도 끊임없이 바위를 밀어 올리는 시지프처럼, 무의미한 고통에 정면으로 맞서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아가는 투쟁 그 자체에 인간의 존엄이 있다고 역설했습니다. 운명에 저항하며 바위를 밀어 올리는 그 찰나의 기개야말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가장 뜨거운 반항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나의 운명보다 더 강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그 기개가 우리 삶을 지탱하는 강력한 버팀목이 되는 것이죠.
자, 이제 이 흩어진 사례들을 모아 다시 한번 들여다봅시다. 불교의 준엄한 꾸짖음, 기독교의 서늘한 경고, 그리고 카뮈의 처절한 저항의 목소리까지. 이 모든 외침이 가리키는 것은 바로 고통으로만 가득 찬 것 같았던 이 세상이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에 대한 무시무시한 경고들은, 사실 인간이 그 고통을 감수하면서까지 추구해야 할 어떤 가치가 이 세상엔 존재한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증명합니다. 창조주에 대한 책임을 다했을 때의 성취감, 세상을 오롯이 느끼는 해탈의 평온, 그리고 비겁함을 이겨내고 운명과 투쟁하여 쟁취하는 승리의 희열까지. 인류가 자살을 금기시하며 세워둔 그 거대한 장벽들의 이면에는, 고통을 상쇄하고도 남을 어떤 가치에 대한 확신이 숨어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죽지 마라"는 모든 명령은 "너에게는 아직 발견하지 못한 기적의 영토가 남아있다"는 가장 강력한 희망의 선언이었습니다.
왜(Why)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how) 상황도 견뎌낼 수 있다.
—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에서 인용된 프리드리히 니체의 말
그렇다면 이번에는 심리학의 도움을 받아 고통을 상쇄하는 이 가치가 무엇인지를 구체화해 봅시다. 고통이 가득한 세상 속에서도 인간이 기어이 삶을 지속해야 할 이유를 찾으려는 시도에 대해, 현대 심리학이 내놓은 대답은 바로 의미라는 키워드입니다. 신경정신과 의사 ‘빅터 프랭클’은 이러한 실존적 가치가 극한의 상황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 임상적으로 실증해 냈습니다. 그는 나치의 아우슈비츠 수용소라는 인간의 존엄성이 처절히 짓밟히는 생지옥에서 3년을 견뎌내며 정신과 의사로서의 냉철한 분석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프랭클은 그곳에서 1944년 성탄절부터 새해 사이, 외부적 요인의 변화가 없었음에도 사망률이 급격히 치솟았다는 기이한 통계에 주목했습니다. 수많은 수감자가 "크리스마스에는 집에 갈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품었으나, 약속된 날이 지나고 차가운 현실의 벽에 부딪히자 삶의 의지가 꺾이며 면역 체계가 동시에 붕괴된 것이 원인이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1945년 3월 30일에 전쟁이 끝날 것이라는 꿈속 예언을 믿었던 한 동료 수감자가, 약속된 날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자 단 이틀 만에 고열로 사망한 사례로도 극명히 드러납니다.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순간 육체가 생존 자체를 포기해 버린 것입니다.
프랭클은 이처럼 가혹한 환경에서의 경험과 데이터를 바탕으로, 인간을 움직이는 근본적인 동력이 쾌락이나 권력이 아닌 의미에 대한 의지에 있다는 로고테라피 이론을 정립합니다. 이 이론에 따르면 인간은 세 가지 경로를 통해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무엇인가를 창조하거나 과업을 완수하는 창조적 가치, 누군가를 사랑하거나 자연과 예술을 체험하는 경험적 가치, 그리고 바꿀 수 없는 시련 앞에서 고통을 대하는 태도를 결정하는 태도적 가치가 그것입니다. 프랭클은 이러한 가치들을 달성하기 위한 구체적인 정신적 기제로 두 가지를 제시합니다. 나 자신과 나의 고통을 객관적으로 분리해서 바라보는 자기 분리와, 나라는 감옥을 벗어나 외부의 가치나 타인을 향하는 자기 초월입니다. 로고테라피는 이 기제들을 실제 임상에 적용하여, 두려워하는 대상을 오히려 의도적으로 갈망하게 함으로써 불안의 회로를 끊어버리는 역설적 의도나, 고통스러운 자아 대신 외부의 과업에 집중하게 만드는 탈집중 같은 구체적인 기법들을 활용합니다. 프랭클은 이런 개념들을 통해 우리의 행동과 고통에 능동적인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수많은 사람들을 회복으로 이끌어냈습니다.
의미라는 것은 프랭클 자신에게도 삶을 지탱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유일한 힘이었습니다. 그는 수용소에 갇혀 오랫동안 집필한 원고를 빼앗기는 절망을 겪었지만, 그 상실의 구덩이 속에서도 원고를 다시 완성해야 한다는 학문적 소명과 어디선가 살아있을 아내에 대한 사랑을 동력 삼아 버텼습니다. 그는 굶주림과 구타 속에서도 아내와 함께하는 순간을 떠올려보고, 훗날 따뜻한 강단에 서서 수용소에서의 경험을 강의하는 자신의 모습을 끊임없이 상상하였습니다. 그는 이를 통해 인간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갈 수 있어도,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기만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최후의 자유만은 결코 빼앗을 수 없다는 위대한 결론을 도출합니다. 결국 고통 그 자체는 삶을 완전히 무너뜨리지 못합니다. 하지만 고통에서 의미가 사라져 무의미한 고통이 되는 순간 삶은 멈추게 됩니다. 반대로 아주 미약한 의미라도 발견할 수 있다면, 이는 무한대의 고통조차 상쇄하며 삶을 지속하게 만드는 강력한 에너지가 됩니다.
이렇게 우리는 온 세상이 고통으로 가득 차 있을지라도, 우리가 살아남으려는 이유는 결국 의미에 있다는 결론에 다다릅니다. “왜 삶을 포기하지 않는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에 대해 일단 실존적인 해답은 얻은 셈입니다. 하지만 설계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이 의미라는 변수는 상당히 주관적이고 가변적이라는 치명적인 결함을 안고 있습니다. 프랭클에게는 그것이 학문적 소명이었지만 누군가에게는 소박한 일상의 평화일 수도 있으며, 심지어 한 개인 안에서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시시각각 변합니다. 물론 “어떻게 의미를 찾고 추구하며 살 것인가”라는 물음은 “어떻게 잘 살 것인가”라는 질문보다 구체적이고 객관적입니다. 또한 “어떻게 고통을 줄이며 살 것인가”라는 물음에 비해서도 해결책이 훨씬 합리적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이 의미라는 개념은 개인별로 다르게 해석될 수 있는 주관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 주관성이 가진 가장 위험한 지점은 바로 왜곡된 신념의 문제입니다. 프랭클이 수용소에서 성스러운 의미를 찾을 때 그를 가두었던 나치 전범들 또한 나름의 의미를 쫓고 있었습니다. ‘아돌프 아이히만’처럼 국가에 대한 충성을 절대적 가치로 믿었던 이들에게 학살은 양심의 가책이 아닌 투철한 사명감의 실현이었습니다. 객관적 기준이 거세된 주관적 의미는 때로 이처럼 광기로 변질될 수 있는 위태로운 칼날과 같습니다. 더욱이 프랭클이 보여주는 의미의 숭고함은 주관적인 기준에 의해 잘못 받아들여질 경우, 고통받는 이들에게 더 치명적인 독이 되기도 합니다. 모든 삶과 고통에는 의미가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는, 정작 의미를 발견하지 못한 채 침잠해 있는 이들에게 부당한 죄책감을 덧씌웁니다. 비극 속에서도 숭고한 의미를 찾지 못하는 자신을 보며, 도리어 자신의 의지가 박약하거나 영적으로 미성숙하다는 자책의 늪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고통 그 자체보다 고통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는 무능함에 더 절망하게 되는 역설이 발생하는 셈입니다.
결국 아무리 훌륭한 이론이라도 주관적으로 해석될 여지가 남아 있다면 그 효율성이 저하될 수밖에 없습니다. 손에 잡히지 않는 연기처럼 흐릿한 의미를 입력값 삼아 정교한 인생의 설계도를 그리는 것은 불가능해 보입니다. 도대체 이 변화무쌍한 의미라는 개념을 어떻게 해야 좀 더 객관적인 지표로 번역해 낼 수 있을까요? 다행히도 철학과 심리학에서 이런 고민을 했던 선례들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의미라는 목표에 객관성을 덧씌워줄 개념들을 활용하여, 길었던 문제 정의 과정을 완료해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