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재택근무라 집에서 일하다가 집중력이 떨어지면 백팩 메고 집 근처 공공도서관으로 간다. 도서관 건물에 들어가자마자 숨을 참아야 하는데 멀리 떨어져 있어도 강하게 몰려오는 노숙자 냄새 때문이다. 도서관이 샌프란시스코 시내에 있어서 인근 노숙자들이 1층의 화장실을 애용한다. 화장실 벽에는 "목욕금지", "빨래금지"라는 표지가 붙어있고 화장실 관리 알바생이 늘 안쪽 의자에 앉아서 감시하고 있다.
노숙자가 있다 해도 아주 조용한 도서관을 상상하겠지만 대다수 미국 도서관은 한국과 다르게 다소 시끄럽다. 전화를 무음으로 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 전화벨소리나 문자알림음이 종종 들리고 아무 때나 대화하고 토론해도 뭐라 하는 사람이 없다. 미국 학생들은 카페에서 공부를 하고 공공도서관은 지역 주민들이나 어린이들이 주로 이용하니 당연한 건지도 모르겠다.
요즘 난 이 시끄러운 도서관에서 침묵의 전쟁 중이다. 이 작은 전쟁은 동양신간서적 서가에서 벌어진다. 가끔 들어오는 한국, 중국, 일본의 신간서적들은 신간서적책장 위 거치대에 전시되는데 주로 자서전이나 번역서라서 무심하게 지나갔다. 우연히 특정 정치인의 자서전을 보기 전까지는.
두어 달 전이다. 어느 날 거치대 한가운데에서 나를 쳐다보고 있는 한동훈의 얼굴을 보고 말았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한가운데의 공공도서관 3층 신간서적코너에서! 나도 모르게 그 앞에 멈춰 서서 한참을 들여다본 것 같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재빨리 서가를 훑어 눈에 띄는 다른 정치인의 책을 꺼내 그 자서전과 바꿔 놓고 자서전은 책장 구석에 안 보이게 꽂아 두었다.
그러나 그다음번에 갔을 때에도 한동훈이 같은 자리에서 나를 보고 있었다. 이번엔 주저 없이 손에 잡히는 번역서로 교체했는데 다음에 가니 또 같은 얼굴이 등장했다. 이젠 전쟁이다 싶었다. 그 얼굴이 등장하면 다른 책으로 바꾸는 일을 석 달째하고 있다. 한동훈을 애정하시는 분의 취향에 맞기를 바라며 소설책도 올려 보고 자산관리서적도 올려 보고 신경 써서 장르도 매번 다르게 올리지만 그분은 참으로 지조가 있다.
우리는 서로를 알지 못하면서 책 바꾸기에 꽤나 진지하다. 난 그 얼굴이 꼴 보기 싫고 그분은 그를 너무 사랑해서 말이다. 이 전쟁이 언제 끝날지 정말 모르겠다. 혹시 끝나면 여기에 제일 먼저 알리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