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션, 미국에서 바닐라라떼 주문하기

by 류지

2003년 미국에서 대학원 첫 학기가 시작되고 몇 주 후, 처음으로 딱 한 시간의 여유가 생겼을 때 망설임 없이 강의실 건물 앞 커피차로 달려갔다. 늘 서두르던 평소와 달리 여유 있게 메뉴를 읽어보니 맨 밑에 '초콜릿, 바닐라, 캐러멜향 추가가 무료'라고 쓰여 있었다. 신나게 외쳤다, "바닐라 라떼 주세요!"


커피차 사장님이 "뭐라고요?"라고 했고, 난 '바닐라 라떼'를 두 번 반복했다. 사장님이 커피차 창밖으로 머리를 쭈욱 빼며 다시 물었다, "뭐라고요?" 난 천천히 "바-닐-라향 추가해 주세요"라고 했는데 사장님은 내가 무슨 외계어라도 한 듯이 빤히 쳐다봤다. 결국 나는 메뉴판을 가리키며, "바닐라향 추가해 달라고요"라고 했고 사장님은 그제야, "오, 붜니을라 라테!"라고 하며 재빨리 라떼를 만들어 바닐라 시럽을 쓱 둘러서 주는 것이다.


내 영어 발음이 문제인가 싶어 과 친구들에게 개인교습까지 받으며 '붜니을라'를 열심히 연습하고 도전했으나 두 번째도 세 번째도 심지어 다른 커피숍에서도 내 '바닐라' 발음을 전혀 못 알아들었다. 초콜릿, 바닐라, 캐러멜 발음이 비슷한 것도 아니고 향도 세 개 밖에 없는데 왜 그들은 내 말을 못 알아들었을까?


사회 언어학에서 유명한 블라인드 테스트가 있다. 실험 참여자들의 눈앞 스크린에 동양인 사진을 펼쳐 놓은 채 백인 영어 원어민의 녹음을 들려준 후, 참여자들에게 말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설명해 보라는 실험이다. 참여자 대다수는 화자가 이민자거나 외국인이며 영어를 외국어로 배운 사람이라고 답했고, 심지어 아시아 악센트가 강하다고 답하는 참여자들도 있었다.


커피숍 종업원 눈에 보인 나는 딱 봐도 아시아인 유학생이니 내가 주문도 하기 전에 이미 미숙한 영어를 기대했을 것이다. 실제 내 말에 강한 외국인 악센트가 있으니 이미 귀를 반은 막고 주문을 들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추가할 수 있는 향이 세 개 밖에 없는데도 선입견이 추측까지 완전히 막은 거다. 그만큼 시각적 입력은 판단에 엄청난 방해가 된다.


내 바닐라 라떼 주문 미션은 스무 번가량의 실패 후 한 달 만에 간신히 성공했고, 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지금 여전히 바닐라 라떼 사건과 같은 경험을 가끔 한다. 지난주 도서관에서 잃어버린 필통을 찾느라 경비아저씨한테 물어보는데 내가 발음하는 '필통'을 전혀 못 알아듣는 거다. 그러나 이번에는 20여 년의 짬이 내게 여유를 주었다. "제 발음이 그렇게 이상해요?"라고 옆에 있는 다른 경비아저씨에게 물었고 그 아저씨는 귓속말로, "저 친구 귀가 안 좋아요."라고 하며 웃었다.


사람들은 보이는 거, 믿고 싶은 거만 믿는 경향이 있고 언어를 듣고 말하는 데는 그런 경향이 그대로 반영된다. 외국에서의 삶은 그런 언어적 환경 속에서 끝없는 도전에 맞서는 삶이다. 오해도 많고 억울한 일도 많다. 그러나 지낸 시간과 함께 쌓이는 짬, 거기서 오는 여유를 느낄 때마다 또 하나의 미션을 완료한 기분이 든다. 이런 작은 성취감들이 끝없이 소소한 기쁨을 가져오니 꽤 괜찮은 하루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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