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정사정 볼 거 없다'의 미학적 프리퀄: 지독한 사랑

상징 디코딩 #004: 지독한 영화의 지독한 나르시시즘

by 나인테일드울프

감독의 입장에서 영화가 아름다워야 함을 말하는 방법은 많다. 인터뷰를 할 수도 있고, 책을 쓸 수도 있다. 때론 술자리에서 그 당위를 설파하는 일도 가능하다. 하지만 무릇 감독이라면, 영화가 아름다워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저 영상만으로 그 이유를 말할 수 있어야 할지도 모른다. 적어도 한 감독이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여기 『지독한 사랑(1996)』이라는 많이 알려지지 않은 영화가 한 편 있다. 하지만 감독의 이름 석자는 누구나 다 안다. 이명세.


이 영화는 불륜이라는 비루한 사랑에 자신의 아름다움을 얹어 관객에게 전한다. 그리고 관객은 그 아름다워야 할 이유에 설득당하고, 기꺼이 동의하고, 각인한다. 지독하게 아름다운 영화. 잊히지 않는 아름다움을 지금부터 들춰보자.


사랑의 비루함

image.png 이렇게 못난 커플도 참 드물다.


이야기의 뼈대는 앙상하다. 시인이자 교수인 영민(김갑수)과, 그의 시를 평론한 기자 영희(강수연)가 사랑에 빠진다. 횟집에서의 첫 만남, 이유는 모르겠고 아무튼 눈이 맞았다. 문제는 영민이 애 둘 딸린 유부남이라는 것, 그리고 두 사람 다 '쿨함'과는 거리가 먼 인간 군상이라는 것이다.


영민을 볼까? 여자에게 손찌검하는 건 기본이고, 연애엔 젬병이라 상대가 조금만 애를 태워도 안절부절못하는 꼴이 가관이다. 시인으로서의 자질? 글쎄. 『폭싹 속았수다』의 오애순의 시가 그 자체로 캐릭터에 엄청난 개연성을 불어넣는다면, 영민이 쓰다가 지우는 것들은 인간의 지리멸렬함을 완성한다. 영희라고 다를까? 그런 영민에게 빠져 허우적대는 그녀 역시, 영화 내내 구질구질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이 불륜 이야기, 비슷한 시기에 방영한 『애인(1996)』만큼 아름답지도, 애틋하지도 않다. 그냥 찌질한 연인들이 만나 비루함을 원 없이 펼쳐낸다. 그래서 입에 달고 사는 말, "지긋지긋해". 도대체 왜 헤어지지 않는가? 도대체 감독은 이런 이야기 무엇이 재밌을까 싶어서 영화를 만든 걸까?


빛과 영화

image.png 어둠 속에서 비치는 빛이 극장 안 영사기를 떠오르게 한다.


영화는 등대와 함께 시작된다.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쏘아지는 그 한 줄기 빛. 그것은 영락없는 극장의 영사기다. 이 빛이 닿는 곳에서 비로소 '세상'이 열리고 '이야기'가 생성된다. 그것이 바로 영화다.


흥미로운 건 그 빛의 짓궂은 경로다. 등대의 빛은 처음에 바다 위 오물을 훑더니, 이내 허름한 건물 뒤편의 뜬금없는 액션 활극을 비춘다. 관객은 순간 당황한다. 상영관을 잘못 찾아 들어왔나? 영사기사가 필름을 잘못 끼웠나? 아니면 낡은 동시 상영관에 대한 은유인가?


하지만 이내 등대, 아니 영사기는 초점을 고쳐 잡는다. 혼란스러운 장르의 파편들을 지나, 빛은 비로소 이 비루한 사랑의 시작을 '올바르게' 비추기 시작한다. 이렇게 해서 관객의 시선은 등 뒤의 영사기가 아니라, 영화 안에서 비춰주는 또 다른 영화로 진입한다.


오물

image.png 더러운 현실을 보여주고, 곧바로 환상으로 도망친다. 이 벽은 두 세계를 가르는 차단막이다.


영화는 시작과 동시에 바다 위를 부유하는 오물을 비췄다. 흥미로운 건 이 불쾌한 이미지가 이야기의 맥락과 상관없이 한 번 더 반복된다는 점이다. 두 남녀가 새로운 보금자리에 도착하기 직전, 카메라는 폐건물에 고인 썩은 물웅덩이를 응시한다. 그리고 바로 직후, 뭔가 쓸쓸해 보이는 풍경화처럼 둘이 머물 곳을 비춘다.


왼쪽의 그림자는 여전히 페건물의 벽 일부, 관객의 시선을 '더러운 현실'에서 '그림 같은 환상'으로 넘기기 위한 '경계선'이다. 감독은 오물을 보여줌으로써 현실의 비루함을 환기하고, 곧이어 그 경계선을 확실하게 비추며 장소를 이동시킨다. 즉, 폐건물의 벽은 영화 속 '현실의 층(Layer)''환상의 층'을 구분 짓는 강력한 차단막인 셈이다.


이명세는 이런 방식으로 영화 안에 여러 개의 겹을 쌓아 올린다. 현실과 영화를 구분하고, 다시 섞고, 때로는 접어 넣는다. 두 사람이 또다시 도피처를 떠날 때 화면이 돌연 '흑백'으로 전환되는 것 또한 같은 맥락이다. 두 사람의 도피와 여행이 중첩되듯, 영화는 다시 색을 지우고 흑백이라는 또 다른 층위의 몽환을 겹겹이 포개어 놓는다.


창을 통하는 것

image.png 현실로 사라진 여자, 영화 속에 남겨진 남자. 이 영화에서 창은 스크린이다.


이 영화에서 '창(Window)'은 단순한 통로가 아니다. 그것은 현실과 영화를 가르는 냉정한 경계선이자, 제2의 스크린이다. 두 사람이 보금자리에서 맞는 아침을 보자. 영희는 문을 열고 '출근'이라는 현실의 세계로 떠나지만, 영민은 집 안에 남아 홀로 시간을 보낸다.


여자가 현실로 걸어 나갈 때, 남자는 여전히 프레임 안에 있다. 이때 창문은 명백한 스크린의 역할을 수행한다. 창틀이라는 프레임 너머로 비치는 바깥세상이 '현실'이라면, 그 안쪽이 '영화'다. 사랑의 도피와 함께 시작된 현실과 가상의 침탈, 혹은 위태로운 교류. 그 경계에서 영민은 영화 속에 남아 있다.


이제 창을 사이에 두고 벌어지는 이 위태로운 '교류', 혹은 '침탈'의 양상을 보자. 둘이 아무리 애틋하고 아름다운 사랑을 속삭인들 무엇하랴. 영희는 바깥세상에서 들은 비난, 즉 '떳떳하지 못한 사랑'이라는 현실의 낙인을 기어이 이 집 안(영화)으로 끌고 들어와 분란을 만든다. 반면, 영민은 이 도피처에서 얻은 '최 씨'라는 가짜 배역(Persona)을 뒤집어쓰고 밖으로 나가, 영희를 괴롭히던 꼰대 상사를 응징한다.


이 지독한 사랑의 메커니즘은 명확하다. 현실은 기어코 아름답고자 하는 영화를 찾아와 오염시키고, 영화는 비루하게 굴러가는 현실을 기습적으로 타격한다. 서로가 서로를 용납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괴롭히는 것. 그것이 이 영화가 보여주는 지독한 간섭이다.


고고함

image.png 창을 통해 보이는 달빛, 스크린 속 세상에서 현실의 영화관은 아마 저렇게 보일 것이다.


하지만 이 지독한 현실과 환상의 간섭이 누군가를 괴롭힌다면, 괴로운 건 감독과 캐릭터들뿐이다. '영화' 그 자체는 놀라울 만큼 태연하다. 서사가 진흙탕을 구르든 말든, 영화는 아랑곳하지 않고 고고하게 자신의 아름다움을 뽐내는 데에만 열중한다.


그 뻔뻔한 탐미주의의 증거가 바로 '창(Window)'과 '달(Moon)'이다. 영화에서는 자주 등장하는 창문, 그리고 밤에는 보름달이든 초승달이든 떠있다. 하다 못해 오징어 배의 불빛이라도 보인다. 이 구도는 정확히 '극장의 구조'를 뒤집어 놓은 것이다.


생각해 보자. 극장에서는 뒤편의 영사기가 빛을 쏘아 앞쪽 스크린에 '가짜 세상(영화)'을 펼쳐낸다. 하지만 이 영화 속 방 안에서는 정반대의 일이 벌어진다. 주인공들이 머무는 이 좁은 방이 곧 '영화(가짜)'이고, 창문은 스크린이며, 저 너머에서 빛나는 달은 현실의 영사기다. 즉, 영화가 스크린(창)을 통해 바깥세상의 빛(달)을 바라보는 기묘한 도치. 이 영화에서 창은 스크린이다. 그리고 이 창에 비치는 것은 영화 내내 아름답다.


image.png 나(영화)는 너희의 이 꼴사나운 짓거리를 내 스크린(창)에 담기 싫어!


작정하고 아름답기로 결심한 이 영화의 고집은 정말 집요하다. 영민과 영희가 서로를 비난하고, 심지어 목을 조르며 식칼을 들고 설치는 가장 지저분한 아수라장을 보라.


이 순간, 영화는 기묘한 선택을 한다. 방 안의 '창'을 커튼으로 굳게 가려버린다. 마치 이 꼴사나운 현실 따위는 나의 스크린에 투영할 가치도 없다는 듯, 혹은 이 비루함이 아름다운 영화의 세계(창밖)로 새어 나가지 못하도록 황급히 무대의 막을 내려버린 듯한 모습이다. 스크린을 가려놓고, 밀폐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찌질한 육탄전. 그렇게 커튼까지 쳐놓고도 방 안의 조명만큼은 여전히 연극 무대처럼 아늑하고 온화하다. 캐릭터가 바닥을 기며 발악을 해도, 미장센은 끝까지 고고하게 침묵하며 자신의 품위를 유지한다.


길고, 지루하고, 민망한...

image.png 아름답기를 포기한 영화가 보여주는 민낯. 지루하고 노동 같은 사랑의 실체


하지만 영희의 떳떳하지 못함과 영민의 가정이라는 현실의 개입을 영화는 끝내 참아주지 않는다. 그래서 영화는 돌연 색을 지워버린다. 갑작스러운 흑백으로의 전환. 이것은 영화가 아름다움을 유지하는 데 실패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지독한 사랑의 끝에서, 더 이상은 아름답게 꾸며내지 않겠다는 영화의 '선언'이자 스스로에 대한 '거부'다. 이건 "내가 아름답지 못하면 그게 어떤 꼴인지 보여줄게"라는 항변이다.


이 무채색의 선언 뒤에 이어지는 정사신을 보라. 창문이라는 프레임은 여전하다. 하지만 '색채'라는 환상의 필터가 제거된 그곳에서 사랑은 철저히 발가벗겨진다. 그 길고, 지루하고, 민망하리만치 적나라한 몸부림. 그것뿐이다. 이건 간간이 보여줬던 오물과 같다.


남은 건 영화

이명세 감독은 마지막에 이르러 선언한다. 지금까지의 모든 몸부림은 사랑 타령이 아니라, 관객과 영화의 직접적인 대면이었다고. 영민의 마지막 대사는 그 자백과도 같다.


아마 우리 사랑은 이미 영화가 끝난 줄을 알면서도,
그렇게 앉아서 기다리는 관객들이었는지도 모른다.


이 한 마디로 감독은 스크린 속 비루한 커플을 끌어내려 우리 옆자리, 즉 '관객석'에 앉혀버린다. 주인공들 마저 관객이 되어버린 순간, 우리 눈앞에 남는 실체는 오직 하나. '영화 그 자체'뿐이다. 우리는 지난 100여 분 동안, 한 감독의 치열한 '증명'을 목격했다. 영화의 아름다움과 그 마법을 거두었을 때, 발가벗겨진 현실이 얼마나 꼴사나운지를.


그렇게 『지독한 사랑』은 가장 영화적인 방식으로, 영화의 존재 이유를 증명하고 막을 내린다.


그래서...

만약 영화감독인 아는 형이 술자리마다 "영화는 무조건 아름다워야 해!"라고 일장 연설을 늘어놓는다고 상상해 보자. 처음엔 "그래, 형 말이 맞아" 하다가도, 똑같은 소리를 100번쯤 들으면 이런 말이 목구멍까지 차오를 거다. "알았어 형! 제발 이제 그만해. 귀에서 피나겠어."


『지독한 사랑』은 관객에게 그런 인내심을 요구한다. 이야기는 고여있고, 화면은 숨이 막힐 듯 탐미적이기만 하니까. 인내의 보상은 이 영화 안에서는 끝내 찾아오지 않는다. 뭔가 시원하게 풀리지 않고 맺힌 채로 끝나는 영화. 그 답답함을 온몸으로 견뎌낸 관객만이, 온전하게 느낄 수 있는 감정의 소용돌이가 1999년에 찾아온다.


이거였구나!
image.png 극장에서 이 장면을 보는 순간 비명을 지르지 않기 위해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지독한 사랑』에서 그토록 정적이고, 갑갑하고, 지독하게 웅축되었던 그 '아름다움에 대한 강박'이, 빗방울 하나하나와 주먹의 궤적을 타고 폭발하듯 터져 나온다. 영민과 영희의 별 재밌지도 않은 비루한 사랑을 묵묵히 견뎌낸 자에게만 허락된 특별한 카타르시스.


"와... 감독님! 이걸 보여주려고 나를 그렇게 괴롭혔던 거였어요?"



image.png 『지독한 사랑(1996)』


수, 토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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