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징 디코딩 #005: 침묵과 생성으로 빚어낸 n+1의 진실
드니 빌뇌브의 『그을린 사랑(Incendies, 2010)』은 전쟁과 학살 속에서 펼쳐진 여인의 비극을 다룬다. 색조마저 처연하고 슬픈 영화. 하지만 희생된 어머니, 비참한 여성에 초점을 맞추면, 읽을 수 있는 틀은 하나뿐이다.
전형적인 틀, 오이디푸스. 얕다. 우린 도대체 소포클레스 이후 2,500년 동안 새로이 쌓아 올린 게 아무것도 없단 말인가? 아니면 우린 모두 정신분석학자여서 아버지, 어머니의 삼각 구도와 그 비극성이 우리 정신활동의 근본적 동인이라고 진짜 믿는 것인가? 그 빈약한 이해와 상상을 우리가 따를 필요는 없다.
이 영화는 가족이라는 좁은 울타리 안에서 벌어진 치정극이 아니다. 이것은 역사와 전쟁이라는 거대한 사건이 인간의 신체를 어떻게 분쇄하고, 그 파편들이 어떤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내는가에 대한 보고서다.
이제 우리는 프로이트의 낡은 소파를 치우고, 질 들뢰즈의 거친 고원 위로 나아가야 한다. 그곳에는 박제된 비극 대신, 끊임없이 변이하고 탈주하는 생성의 현장이 기다리고 있다.
영화의 오프닝, 카메라는 소년의 얼굴이 무섭다는 생각이 들 때까지 길게 응시한다. 여기서 소년의 피부는 증오의 기호들이 새겨질 '하얀 벽'이며, 그 중심에서 번뜩이는 눈동자는 모든 인간성을 삼켜버리는 검은 구멍이다. 들뢰즈가 말한 얼굴성 기계는 소년에게서 개별적인 머리를 앗아가고, 그 자리에 전쟁의 부품으로써의 얼굴을 박아 넣는다. 아부 타렉이라는 괴물은 그 하얀 벽 위에서 탄생한다.
소년의 얼굴에 박힌 얼굴성의 낙인은 화면이 전환되자마자 공증인의 서류 창고라는 거대한 수목(tree) 모델*로 전이된다. 수직과 수평으로 결벽증적이게 분류된 서류 칸들은, 들뢰즈가 말한 국가 장치가 개별적 삶을 어떻게 코드화하고 포착하는지를 시각적으로 증명한다.
"태초부터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라는 공증인의 말처럼, 이 질서와 체계는 언제나 사후적인 포획에 불과하다. 그렇기 때문에 그 지층 아래에서 요동치는 포착 불가능한 분자적 흐름을 어쩌진 못한다. 체계가 아무리 법, 도덕, 윤리와 금기로 근친상간을 죄악시하고 선을 그으려 해도, 생물학적 결합이라는 맹목적인 흐름을 막을 순 없다. 시스템의 코드가 미처 닿지 않는 지하의 격돌과 물리적 작동 앞에서, 서류창고는 무력하다.
그래서 이 정적이고 위계적인 시스템의 한복판에서 나왈 마르완의 유언장이 꺼내지는 순간, 견고해 보였던 수목형 체계의 질서는 균열을 일으킨다. 시스템에 의해 죽은 기록으로 분류되었던 그녀는, 유언이라는 탈주선을 통해 쌍둥이 남매를 서류 창고 밖, 즉 규정할 수 없는 증오와 사랑이 소용돌이치는 고른 판(Plane)** 위로 끌어들인다.
* 나무는 뿌리(기원)에서 시작해 줄기, 가지로 뻗어나가는 '위계(Hierarchy)'와 '질서'의 상징
** 모든 사물이나 존재가 고정된 형체(개체)를 갖기 전, 끊임없이 변화하고 소통하는 순수한 흐름의 평면
영화는 배경이 레바논임을 굳이 숨기려 하지 않지만, 끝내 그 이름을 부르지도 않는다. 이는 특정 역사의 재현에 머무르지 않고, 인간을 갈아버리는 전쟁이라는 거대한 기계의 작동 원리를 보여주기 위함이다. 레바논이라는 구체적 좌표가 사라진 자리에는, 오직 증오와 사랑이 뒤섞인 황량한 고른 판만이 남는다.
그리고 이 고른 판 위에서 나왈 마르완은 기관 없는 신체*이다. 아들에 대한 사랑도, 딸이라 부른 아이를 잃는 충격과 슬픔, 증오가 모두 그녀를 통과한다. 버스에 오르기 위해 목에 건 십자가를 떼고, 머플러를 히잡처럼 둘러 무슬림이 되는 그녀. 한때 평화와 자선을 위한 작은 신문사의 직원이었지만, 분노를 풀기 위해 무슬림을 찾는 것도 꺼리지 않고 암살자가 된다. 그녀에겐 종교와 민족이라는 이념, 수목형 체계가 작용하지 않는다.
나왈 마르완은 기독교인, 무슬림, 암살자, 죄수번호 72번이라는 고정된 기관들의 합이 아니다. 그녀는 종교와 이념이라는 수목형 체계가 강요하는 정상적 기능을 정지시킨 채, 오로지 고통과 연민의 강렬도에 따라 스스로를 재편하는 기관 없는 신체가 된다. 그녀의 목에서 떼어진 십자가와 머리에 둘러진 히잡은 배신이 아니라, 경계를 가로지르는 리좀**적 탈주이다
* 고정된 기능과 역할에 갇히지 않은 신체를 의미. 사회나 관습에 따른 정상적인 구조를 거부하는 생명력 그 자체의 상태
** 생강이나 대나무 뿌리처럼 수평적으로 번식하며 이질적인 것들과 결합하여 중심도 위계도 없는 구조. 들뢰즈는 리좀을 통해 고정된 정체성을 탈피하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생성의 원리를 설명
영화는 수영장 한쪽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나왈 마르완을 발견한다. 무리의 가장자리에 있는 늑대, 예외적 존재로서의 특이자(Anomal)이다. 왜 하필 수영장인가? 콜레라, 장티푸스 등을 떠올려보면, 물은 아주 강력한 전염의 매질이다. 수영장이라는 폐쇄된 수역은 들뢰즈가 말한 전염의 장소다. 무리에서 떨어져 경계에 앉은 나왈 마르완은 그 자체로 특이자이며, 그녀의 침묵은 수면 아래로 퍼져나가는 강력한 바이러스가 된다.
들뢰즈에게 '~되기'는 유전적 계보를 따르는 모방이 아니라, 이질적인 존재와의 접촉을 통한 감염이다. 영화는 수영장의 물이라는 매질을 통해 관객을 나왈이라는 특이자와 계약하게 만든다. 이 감염을 통해 우리는 비로소 '여성-되기'의 입구에 선다. 이는 생물학적 환원이 아니라, 전쟁의 완고한 논리를 탈주하여 이름 붙일 수 없는 거대한 슬픔의 흐름과 하나가 되는 생성의 과정이다.
나왈이 겪는 비극은 어머니라는 개인의 슬픔이 아니다. 그것은 전쟁을 동원한 '수목형 기계'가 만들어낸 모순을 감당해 내는 비-인간적인 흐름이다. 영화가 그녀에게 감염되어 여성-되기에 진입한다는 것은, 나왈과 똑같이 우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마주한 그 거대한 슬픔의 매질(물) 속으로 함께 뛰어든다는 뜻이다.
잔느가 유언을 착실히 따르는 것, 어머니의 과거를 쫓는 것은 생물학적 여자로서의 동질성에 따르는 것이 아니다. 수영장에서 이미 침묵에 전염되어 여성-되기가 이루어진 결과다. 감염되지 않은 시몽은 여기에 공감하지 못한다. 그래서 시몽에겐 특별한 통과 의례가 필요하다. 자신들을 받은 간호사와 만난 후, 푸른 물이 가득한 실내 수영장에 몸을 담그고 누이를 껴안는 장면, 그것이 상징하는 바는 앞선 야외 수영장의 그것과 동일하다.
그는 자신의 이성적 면역 체계를 해제하고, 여성-되기에 진입한다.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그 흐름 속에 자신을 던지는 주체로 전환하는 것이다.
나왈 마르완의 삶은 단 한순간도 정주하지 않는다. 그녀는 가문의 규율에서 연인에게로, 모성이라는 본능에서 전쟁의 심장부로, 다시 암살자에서 수용소의 번호로 끊임없이 자신을 탈영토화 한다. 들뢰즈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녀의 인생은 고정된 점들을 연결하는 직선이 아니라, 어디로 튈지 모르는 역동적인 탈주선들의 궤적이다.
이 탈주는 단순히 고통을 피하기 위한 도피가 아니다. 그것은 종교, 국적, 혈연이라는 '수목형 체계'가 그녀의 신체에 낙인찍으려 할 때마다, 그 기호들을 배반하며 새로운 존재로 변이 해가는 과정이다.
그녀의 탈주선은 매 순간 전쟁의 배치물*들과 충돌한다. 가문의 명예를 위해 총을 든 남형제들, 민간인을 학살하고 버스를 불태우는 기독교 민병대들은 인간을 살육의 부품으로 재편하는 거대한 배치의 일부다. 나왈은 이 지옥 같은 배치 속에서도 생성한다. 발목에 세 점을 찍은 아들, 죽음의 문턱에서 딸이라 부른 아이는 그녀가 세상에 던지는 리좀적 연결의 시도들이다.
그러나 살육의 배치물들은 번번이 그녀의 생성을 앗아간다. 아들은 '아부 타렉'이라는 전쟁의 도구로 재영토화되고, 딸이라 불린 아이는 총탄에 쓰러진다. 들뢰즈가 경고했듯, 탈주선은 이처럼 완고한 권력의 배치물들에 의해 끊임없이 가로막히고 굴절된다.
나왈의 가장 강렬한 탈주는 암살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통해 죽음의 선으로 굴절된다. 거대 배치물의 심장을 쏘아 올린 그녀의 행위는 체제의 전복인 동시에, 스스로를 파괴의 블랙홀 속으로 밀어 넣는 자폭이다. 이에 배치물들은 잔혹한 복수로 응답한다. 수용소라는 폐쇄된 영토는 그녀의 신체를 고통과 출산의 기능 속에 유폐하며 가장 비인간적인 방식으로 그녀를 재영토화하려 한다.
탈주와 탈영토화, 생성, 배치물의 제거와 전복, 복수와 재영토화. 그리고 배치물이 된 생성과의 재결합과 재생성.. 나왈 마르완의 생은 들뢰즈가 말하는 순환적 흐름을 완벽하게 재현한다.
마지막으로 그녀는 자신을 파괴했던 배치물(가해자)을 다시 자신의 생성(아들)으로 껴안음으로써, 전쟁으로는결코 도달할 수 없는 절대적 탈영토화에 성공한다. '함께 있다는 것은 위안이 된다'는 그녀의 마지막 말은, 수평적 고른 판 위에서 모든 고통을 통과해 낸 자만이 내뱉을 수 있는 숭고한 사건의 목소리다.
* 특정한 목적이나 기능을 위해 서로 이질적인 요소들(사람, 사물, 법률, 감정 등)이 유기적으로 결합한 상태. 이 영화에선 인간을 살육의 부품으로 작동하게 만드는 거대한 시스템의 총체를 의미
영화의 결말부, 시몽은 결코 성립할 수 없는 수식 "1+1=1"에 도달한다. 산술적 논리, 즉 수목형 사고에서 1(니하드)과 1(아부 타렉)은 분리된 두 개의 개체여야 한다. 가해자와 피해자, 괴물과 혈육은 결코 섞일 수 없는 이분법적 실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왈이 걸어온 고른 판 위에서 이 수식은 진실이 된다. 들뢰즈는 이를 다수성(Multiplicity)이라 부른다. 다수성은 단순히 여럿이 모인 상태가 아니다. 그것은 서로 다른 성질(증오와 사랑, 고문 기술자와 아들)이 하나의 평면 위에서 서로 섞이고 접히며 공존하는 상태다. 나왈은 아부 타렉이라는 '전쟁 도구'와 니하드라는 '자신의 생성'을 별개의 존재로 나누지 않는다. 그녀는 이 모순된 두 존재를 하나의 신체로 껴안음으로써, 아들이 갇혀 있던 전쟁의 인과율을 끊어낸다.
나왈이 남긴 두 통의 편지는 이 사건을 완성하는 도구다. 한 통은 고문 기술자이자 아이들의 아버지에게 보내는 증오의 기록이고, 다른 한 통은 아들에게 보내는 사랑의 전언이다. 이 두 편지가 한 사람에게 전달되는 순간, 니하드/아부 타렉은 분열된 자아를 넘어선다. 그는 비로소 자신이 어머니의 고통이자 사랑이었음을 깨닫는다. "1+1=1"은 수학적 오류가 아니다. 그것은 분절된 세계를 통합하고, 그 어떤 끔찍한 배치물이라도 끝내 사랑으로 환원시킬 수 있다는 나왈 마르완식의 구원 방정식이다.
영화는 수미쌍관으로 끝을 맺는다. 처음에 얼굴을 클로즈업했던 소년도, 묘비 앞에 서있는 남자도 같은 사람이다. 이제 그의 이름이 니하드인지 아부 타렉인지 중요치 않다. 그는 발목에 세 개의 점이 박힌 남자, 그것이 그의 모든 실체이고, 들뢰즈가 말하는 <이것임>*이다.
영화는 처음처럼 그에게 다가서지 않는다. 얼굴이 보일 듯 말듯한 그 거리를 지키며, 바라보며 끝난다. 그리고 이어지는 크레딧 화면에선 나왈 마르완의 생을 함께한 붉은 탈주선이 선명하게, 곧게 그려진다.
* 개별적인 이름이나 고정된 정체성이 아니라, 어떤 특정한 시간, 장소, 강렬함의 흐름 그 자체를 일컫는 말. 영화의 마지막, 그는 '누구'이기 이전에 세 점의 문신과 침묵이라는 고유한 사건적 존재로서 머문다.
들뢰즈가 '천 개의 고원'을 세운 것은 사유의 지도를 완성하기 위함이 아니라, 누구나 그 위에 자신만의 고원을 덧보태라는 초대였다. 드니 빌뇌브와 와이디 무아와드는 그 광활한 고원들 사이에 『그을린 사랑』이라는 천일 번째 고원을 우뚝 세워 올렸다. 그들은 비극을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침묵과 용서라는 탈주선을 통해 인간의 지성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숭고한 높이를 증명해 냈다.
이 천일 번째 고원은 고정된 숫자가 아니라, 기존의 질서에 '하나(n+1)'를 더함으로써 세계의 판도를 바꾸는 생성의 상징이다. 나는 앞으로도 무수히 솟아날 또 다른 천일 번째 고원들을 기다린다. 증오의 영토를 가로지르는 지성의 투쟁은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