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일 번째 고원: 2017년 - 블레이드 러너 2049

상징 디코딩 #006: 당신은 레플리컨트입니까?

by 나인테일드울프

드니 빌뇌브 감독의 『블레이드 러너 2049(Blade Runner 2049, 2017)』는 1982년에 개봉한 리들리 스콧 감독의 『블레이드 러너(Blade Runner, 1982)』의 공식 후속작이다. 전작이 남긴 족적은 너무나 뚜렷해서 사이버 펑크 장르를 하나의 영토로 우뚝 서게 만들었다.


하지만 사이버 펑크가 가진 장르적 한계란 것이 있다. 매번 반복되는 비슷한 질문과 주제의식 말이다. 이 영화에서 중심축 중 하나인 기억과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는, 망작 취급받는 『공각기동대: 고스트 인 더 쉘』에서 정확히 같은 연도에 한 번 했다.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폴 버호벤 감독의『토탈 리콜(Total Recall, 1990)』도 정확히 이 주제 의식을 다룬다. 따라서 '기억과 정체성'이라는 키워드에만 꽂힌 분석과 해석은 다른 영화에서 이미 했던 이야기를 재탕, 삼탕 하는 동어 반복일 뿐이다. 달리 말해서 그냥 얕다.


새로운 시각이 필요하다. 이 영화는 사이버 펑크라는 장르적 한계를 어떻게 탈피해 나가는지, '기억과 정체성'이라는 이젠 너무나 뻔해진 이 소재를 어떤 승화의 작용으로 풀어나갈 수 있는지, 그 가능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전작의 계승과 절연

하얀 고목이 상징하는 전작의 체계. 여전한 증오와 엉뚱하게 드러나는 동질성


이 영화, 세상에 첫 선을 비친 것을 기준으로 35년 만의 후속작이다. 전작이 사이버 펑크 장르의 클래식으로 자리 잡고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는 점에서, 감독은 계승과 절연을 명확하게 할 필요가 있다. 그런 점에서 저 고목과 K의 주거 환경은 중요하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드러나는 하얀 고목이 있는 저 장소는 전작의 레이철이 묻혀있는 곳이다. 그녀는 이곳에 묻혀 있고, 출산을 했다. 그러니까 이곳이 그녀가 탈주하여 도착하여 세운 영토, 즉 전작이 세운 사이버 펑크라는 장르, 국가이다. 나무는 이전의 걸작이 세운 수많은 담론과 지식들의 체계, 하지만 세월이 흘러 더 이상은 유효하지 않은 죽은 고목으로서만 존재한다. 계승은 하되 새로운 질문을 던지겠다는 감독의 의지가 느껴진다. 고목의 아래에는 이야기의 씨앗이 심어져 있고, 어디서 날아왔는지 모를 들꽃이 시선을 붙든다. 그 들꽃 감독이 지금부터 우리에게 던지려는 질문이다.


그리고 K의 주거 시설을 보라. 레플리컨트에 대한 인간의 혐오는 30년 동안 변한 게 없다. 레플리컨트가 이런 낙후된 시설에서 사는 거야 차별받는 존재니 그러려니 해도, 그를 껍데기를 부르는 사람들도 이 후지고 더러운 곳에 산다. 이 세계에선 미학적/계급적 경계가 이미 붕괴되어 있다. 영화는 결국 '이 둘이 뭐가 다르지?'라는 질문으로 시작하고 있다.


『그을린 사랑』의 연장선

테스트 기계는 관리의 수단이란 측면에서, 국장은 추적을 지시한다는 점에서 『그을린 사랑』의 서류창고와 공증인을 계승한다.


이미 사망해서 지하에 묻힌 여자의 출산이 이야기의 시작점이라는 점에서, 이 감독의 유명한 전작 『그을린 사랑(Incendies, 2010)』과 연결되는 지점이 있다. 잔느와 시몽이 그랬듯이, K도 결국 그녀의 출산을 추적한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 출산의 결과물이 자신들이라는 확인이, 이번에는 다른 사람이었다는 결론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도 시스템의 무력한 모습을 묘사하는 것 또한 잊지 않는다. 이른바 기준선 테스트, 레플리컨트의 변절 혹은 배신을 사전에 감지하겠다는 이 절차, 시스템의 강고한 관리 능력을 보여주려 애쓴다. 하지만 정작 K의 거짓말을 시스템은 알지 못한다. 더군다나 K는 거짓말하는데 크게 어려움을 느끼는 것 같지도 않다. 순종적이라는 넥서스 9 모델에 대한 평가가 의심스럽다.


국장의 모습은 더 역설적이다. 열성적인 시스템의 수호 의지를 가진 여자로, 레플리컨트의 출산이라는 사건이 시스템에 일으킬 균열을 미리 알아보기는 한다. 그래서 이 자체를 없었던 일로 만들기 위해, 비인간적 수단을 사용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하지만 레플리컨트인 K를 유혹하다 거절당하고, 머쓱해하는 모습에서 그녀가 가진 신념의 가치는 얄팍해진다.


시스템이 지하에서 흐르는 에너지, 그 충동에는 딱히 효과적인 모습을 보이지 못한다는 이 묘사는 『그을린 사랑』의 공증인의 서류창고에 대한 일종의 주석처럼 작용한다. 그래서 『블레이드 러너 2049』라는 이 영화 사실, 『그을린 사랑』의 확장판 같은 성격마저 지닌다.


K의 아이-되기

K는 이곳에서 자신의 기억 속 유년의 모습을 만날 뿐만 아니라, 자신의 기억이 실재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과 마주친다.


K는 국장의 어린 시절을 이야기해 보라는 말에 진짜가 아니라 심어진 것이며, 어렸던 적이 없다는 대답을 한다. 이 유년의 실재 유무는 영화 내에서 레플리컨트와 사람을 구분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그리고 K의 이 태도는 아이-되기의 거부가 아닌 불가능성의 인식이다. 들뢰즈는 아이-되기를 "자신의 나이로부터 이 나이의 젊음을 구성하는 입자들, 빠름과 느림, 흐름들을 추출"하는 것으로 정의한 바 있다. 자신의 생을 제조일부터 현재의 것으로 자각하는 한에서는, 심어진 기억의 입자, 흐름, 빠름과 느림은 현재의 청춘을 위한 재료가 될 수 없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곧 유년 시절의 목각말이 기억 속 그 장소에 발견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여기서부터 K가 레플리컨트 특이자로, 인간-레플리컨트를 아우르는 보편자로 작동하기 시작한다.


K는 고아원의 아이들과 먼저 조우한다. 이 아이들은 이곳의 관리자에게 노예처럼 부려지고, 심지어 매매의 대상이기도 하다. 그리고 목각말의 발견으로 K가 이곳 출신일 수 있다는 점, 유년 시절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드러난다.


성장기의 실재에 따른 차별성이 사라지면, 인간과 레플리컨트는 구분은 더욱 모호해진다. 그리고 하필이면 인간만의 것이라고 생각한 그 유년의 아이들은 노예처럼 부려지고 있다. 인간 고유의 것이 노예적 상태라면 도대체 레플리컨트와 인간의 차이란 무엇인가? 고아원 아이-K-레플리컨트-인간의 순환 고리를 관통하는, 이 '노예'란 키워드로 인해 레플리컨트와 인간의 구분은 의미가 없어진다.


인간 고유의 영역이라 믿었던 '유년'조차 노예적 삶으로 전락한 세계에서, 인간과 레플리컨트를 가르는 장벽은 한낱 서류상의 분류에 불과해진다. 거기에 더해 자신이 겪었을 유년 시절의 모습을 재현하는 아이들. 이 기능적 동질성의 목격은 바로 아이-되기의 진입로가 된다.


들뢰즈는 『천 개의 고원』에서, 아이-되기는 "보편적인 청춘을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말했다. 유년을 획득하는 이 사건으로 인해, K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재료로 현재를 구성할 수 있게 되고, 노예라는 동질성으로 인해 레플리컨트-사람을 넘어서는 인간적인 것에 대한 보편성을 지닌 존재로 거듭난다.


레이철의 출산과 두 종류의 국가

이 영화에서 레이철의 출산이란 사건은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중심축인 것은 맞다. 하지만 이 사건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설명이 없다. 레플리컨트의 생식과 출산을 위한 기능이 정의되지 않았고, 이종이 결합하는 메커니즘은 생략되어 있다. 여기에는 단지 해석들만 존재한다.

이 둘이 다르게 느껴진다면 그건 착각이다. K는 결국 이 둘 모두에게서 탈주한다.


첫 번째 해석은 웰레스의 것이다. 그는 레플리컨트를 최초로 만들었던 타이렐 사의 잃어버린 기술이라는 관점에서 레이철의 유골을 회수하고, 데커드의 딸을 얻으려 한다. 그 기술만 있으면 웰레스 사의 수요에 대처 못하는 생산력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이게 첫 번째 수목형 체계의 사고방식이다. 이 체계 안에서는 태어난 아이들을 당연히 웰레스의 소유로 분류하지만, 이것이 과거 노예제의 방식이라는 점에서 판 자체에 이미 균열과 탈주의 가능성을 내포되어 있음을 자각하지 못한다. 시스템이 정작 일이 벌어지면 무력한 이유가 이것이다.


두 번째는 기적이라고 바라보는 레플리컨트 해방군들의 해석이다. 이는 종교적이고 신화적 해석에 가깝다. 웰레스 사의 논리는 나름 명쾌한 반면에, 이들의 것은 현실성 마저 많이 떨어진다. 레이철의 출산이 모든 레플리컨트의 보편적 기능으로 확산될 가능성은 사실상 0에 가깝다. 그들에겐 태어난 자에겐 영혼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뿐인데, 이것 또한 사람이라는 지배자의 논리를 내재화한 결과다. 이런 방식의 재영토화야 말로 들뢰즈가 가장 경계하는 것이다. 종교적 믿음의 투쟁, 이것이 초래하는 것은 결국 전쟁, 살육, 학살밖에 없다. 그리고 그 끝에 다시 세우는 건 고작 새로운 노예 국가일 것은 뻔한 일이다. 감독의 전작은 이 과정에서 일어난 이야기를 다룬다.


그래서 이 영화는 기적의 아이가 아니라, 이후 K의 탈주, 이 두 수목형 시스템을 벗어나는 작동에 초점을 맞춘다.


이 일이 왜, 어떻게 일어났는 지를 따지는 것은 이 영화의 몫이 아니다.


영화가 레이철의 출산을 다루는 방식은 사실 인간과 레플리컨트의 유비적 관계를 따지는 방식으로 진행되지 않는다. 둘의 메커니즘, 영혼의 유무 따위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이것은 어린 사내아이가 여자 아이도 쉬를 해야 하니까 고추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비슷하다. 심지어 기관차에게도 있지만, 의자에겐 없다. 기차가 어떻게 굴러가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달리고 있다는 작동이 곧 기차도 '쉬는 해야지'라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레이철이 출산은 여성이었으니까, 데커드를 사랑했으니까라는 가장 단순한 사실의 유사성으로 일어난 일이다. 둘 사이의 아이는 지금 여기서 세상을 재구성하고 있는 현재의 작동으로 사랑하는 남녀 사이에 태어난 존재다. 그냥 당연한 것이고, 부모는 이 존재가 당연히 누려야 할 것을 생각할 뿐이다. 존엄, 안전, 행복한 삶 등등. 데커드가 자신은 진짜가 무엇인지 안다는 말, 사실 이런 걸 이야기하는 거다.


여기에 생물학/기계적 메커니즘의 설명은 하등 필요 없다. 아이는 기적의 상징이 되기 위해 태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후자의 방식은 감독의 전작에서 점 세 개의 문신을 가진 아이가 전쟁 도구로 탈바꿈됐던, 바로 그 방식을 철저하게 따르는 것이다. 세상 어느 부모도 그 따위 것을 바라지 않는다.


K의 정동

이 영화에서 가장 보편적 인간으로 작동한 K. 그가 침묵의 고원을 완성한다.


바로 이렇기 때문에 K의 아이-되기가 영화에선 반드시 필요했던 것이다. 그 시선으로만 레이철의 출산이 온전히 이해되기 때문이다. 그의 기억이 누구에 의해 심어진 것이냐, 아니냐 또한 중요한 이야기가 못된다. 그건 전작이 심어놓은 고목 아래에나 있는 이야기다. K는 자신이 그 고목의 아들이 아님을 깨닫는 순간, 역설적으로 그 죽은 나무의 계보학에서 완전히 탈주한다.


K에게 필요한 것은 기억의 진실이 아니라, 그 기억의 틈새에서 피어오른 정동(Affect)*이다. K의 '아이-되기'는 비록 자신이 '태어난 아이'가 아니라는 사실에 직면하지만, 그 절망의 끝에서 역설적으로 "누군가의 도구가 아닌 보편적 존재"로서의 정동을 획득한다.


그의 마지막 선택인 데커드를 구하는 행위는 해방군이 명한 '살육'이라는 전쟁의 명령도, 월레스가 설계한 '노예의 기능'도 아니다. 그것은 기원이 없는 자가 오직 자신의 변이 된 정동만으로 밀어붙이는 가장 투명한 탈주선이다.


눈이 내리는 계단 위에 누운 K의 모습은, 그래서 숭고하다기보다 지각 불가능하게 된 상태에 가깝다. 쏟아지는 눈송이들은 K라는 개별적인 신체를 지우고, 그를 세계라는 고른 판의 일부로 흩뿌린다. 나왈 마르완이 전쟁의 지층을 온몸으로 견디며 고원을 세웠다면, K는 자신의 존재를 n-1**로 지워버림으로써 단 한 사람의 만남을 가능케 하는 침묵의 고원을 완성한다.


결국 이 영화가 도달한 천일 번째 고원은 기적의 탄생에 있지 않다. 기원이 없어도, 특별하지 않아도, 오직 지금 여기서 작동하는 정동의 힘만으로도 우리는 시스템이 코딩할 수 없는 '보편적 청춘'일 수 있다는 그 서늘한 증명에 있다.


그리고 이것은 『그을린 사랑』에서 유년을 박탈당한 채 전쟁의 노예가 된 점 세 개 문신을 가진 아이의 다른 가능성이다. 그 어린 기억의 회복만으로 같은 노예 국가를 위한 전쟁에서 다른 성취를 이룰 수 있었다는, 전작에서 미처 남기지 못했던 메시지가 이 스크린에 새겨지고 있는 것이다.


* 감정이 '나'라는 주체에 고인 심리적 상태라면, 정동은 신체와 신체가 만나 발생하는 '에너지의 변동'이자 '변용하는 능력'. 신체가 다른 신체와 접속하여 자신의 능력을 증강하거나 감소시키는 그 강렬도의 변화가 바로 정동이다.
** 통계에서 표본 집단의 특성은 그 집단을 상징하는 단 하나의 대푯값을 n-1로 삭제해야 얻을 수 있다. 우리는 K의 n-1로 인해 인간이라는 표본 집단이 지닌 보편적 성질을 비로소 관찰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은 표본의 대푯값이지 모수는 될 수 없다. 수목형 시스템이 항상 착각하는 게 이것이다.


그리고 연결

image.png 『그을린 사랑』의 마지막 지점에 등장했던 눈 쌓인 숲. 의미를 알 수 없던 그 눈이 둘 모두에게 내린다.


『그을린 사랑』에서 나왈 마르완의 유언이 모두 성취되는 마지막 순간에 영화는 의미가 명확하지 않은 풍경을 내보낸다. 처음의 화면은 그녀가 올라 선 고원을 말하는 것이겠지만, 두 번째 눈 쌓인 숲은 무엇을 말하는지 알기 힘들었다.


『블레이드 런너 2049』에선 이 눈을 마지막에 등장시켜 두 영화가 연결된 것임을 다시 한번 확인시킨다. 출산으로 태어난 자와 그 사건을 추적한 자 모두에게 내리는 눈. 나왈 마르완은 그의 첫아들과 쌍둥이 남매 모두에게 편지를 남겼다. 그 메시지가 다시 한번 여기 새로운 고원에 흩날리고 있다.


마지막 질문

"당신은 레플리컨트입니까?" 영화는 끊임없이 이 질문을 던지는 듯 보이지만, 사실 우리에게 되묻고 있는 것은 이것이다. "당신은 무엇이길래 사람입니까?" 결국 이 영화가 세운 천일 번째 고원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의 답이 아니라, "나는 어떻게 작동할 것인가"라는 결단에 있다.


K가 그 결단을 내리기 전, 거대한 핑크빛 조이 광고판 앞에서 목도한 진실이 바로 그것이다. 광고판 속에서 모든 이에게 '보고 싶은 것'을 투사하는 양산형 조이는, 에머네이터 안에서 자신과 시간을 공유하다 사라진 '그 조이'와는 다른 존재다.


그 결정적인 차이는 시스템의 코드가 아니라, K와 조이 사이에 피어오른 정동에 있었다. 그녀는 영화 내에서 유일하게 K를 '특별한 존재'라 말했다. 비록 그것이 프로그램된 기능이었을지라도, 조이가 안전한 서버를 버리고 위험한 모바일 장치로 탈주하여 K와 함께 세운 그 영토는, 실재하는 정동의 기록이다. K는 광고판을 통해 조이가 '가짜'임을 확인하는 순간, 역설적으로 그녀와 나누었던 그 정동만큼은 복제 불가능한 '나만의 진짜'였음을 자각한다.


기원 없는 자가 눈 위에서 맞이한 그 투명한 죽음은 숭고한 희생이라기보다, 시스템이 규정한 노예의 사양을 벗어나 오직 스스로 느낀 정동의 궤적을 따라 '사람-되기'에 성공한 자의 고요한 함성이다. 이로써 K는 '아무것도 아닌 자(Nobody)'에서 시작하여,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유일한 작동'으로서의 생을 완성한다.



『블레이드 러너 2049(Blade Runner 2049, 2017)』


수, 토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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