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두 개의 질문 - 생각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제2장 동굴의 약속, 신의 탄생
2절. 경험의 재창조: 이야기의 탄생
그의 이야기는 단순한 사냥 보고가 아니었다. 만약 그랬다면 이야기는 짧고 건조했을 것이다. “들소를 쫓았다. 눈보라가 쳤다. 길을 잃고 헤맸다. 뿔에 받혀 상처를 입었다. 겨우 돌아왔다.” 이것은 ‘정보’의 전달이다. 생존에 필수적인 사실들의 나열, 즉 상황 보고서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는 정보를 전달하지 않았다. 그는 ‘경험’을, 그 끔찍했던 순간의 살아있는 질감을, 자신의 내면에서 휘몰아쳤던 공포와 절망, 그리고 마지막 희망의 불씨를 언어라는 조각칼로 다시 빚어내고 있었다. 그는 지금 인류 최초의 예술가가 되어, 혼돈스럽고 무의미했던 현실의 조각들을 가지고 의미 있는 무언가를, 즉 ‘이야기’를 창조하고 있었다.
그가 마주한 근본적인 문제는 이것이었다.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말로 전달할 수 있는가?. 살을 에는 추위라는 감각, 뼛속까지 스며드는 한기, 방향을 완전히 잃은 채 죽음의 공포에 서서히 잠식당하는 내면의 상태. 이것들은 언어 이전에 존재하는, 오직 유한하고 상처받기 쉬운 육신만이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원초적인 경험이다. 그는 이 지독하게 주관적이고 내밀한 고통을, 단 한 번도 그런 경험을 해보지 않은 채 어미 품에 안겨 있는 아이에게, 그리고 너무 늙어 이제는 그 기억마저 희미해진 노인에게 어떻게 온전히 전달해야 할까?.
그는 입을 열어 “바람이 너무 차가웠다”라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그 말을 혀끝에 올리려던 순간, 그는 멈칫했다. ‘차갑다’는 단어는 겨울날 냇가에서 손을 씻을 때나 쓰는, 평온하고 일상적인 말이었다. 그 빈약한 단어로는 자신의 살갗을 찢어발기고 뼈를 으스러뜨리려 했던, 그 살의(殺意) 가득한 공기의 질감을 도저히 설명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이 겪은 그 압도적인 공포를 담아낼 그릇이, 부족의 기존 언어에는 없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무력한 사실을 말하는 대신, 생생한 진실을 그리기로 했다.
모닥불의 그림자가 춤추는 그의 얼굴이 그 순간의 극도의 공포로 일그러졌다. 그는 자신의 어깨를 움켜쥐며, 마치 지금 그 순간에도 고통받고 있는 것처럼 몸을 떨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그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집중했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거칠게 갈라져 나왔다.
“그것은 바람 따위가 아니었다. ‘하얀 이빨을 가진 북쪽의 영혼’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늑대가 으르렁거리며 나의 살갗을 물어뜯었다.”. 그는 자신의 팔을 들어 보이며, 동상으로 검게 변해버린 손가락 끝을 가리켰다. “보아라, 이것이 그 영혼이 남긴 이빨 자국이다. 그것은 나의 뼈까지 얼리려 했다.”.
길을 잃고 절망 속에서 헤맸던 순간은 ‘눈의 악마가 나의 눈을 멀게 하고 발자국을 모두 지워버린 순간’이 되었다. 그의 목소리는 이제 거의 귓속말처럼 낮아졌고, 동굴 안의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앞으로 몸을 기울였다. 모닥불의 그림자는 그의 얼굴 위에서 기괴하게 춤을 추며 그의 말을 거들었다.
“사방이 온통 하얀색이었다. 땅도, 하늘도, 공기도. 악마가 나의 눈에 뜨거운 재를 뿌린 것처럼 하얀 장막을 씌웠다. 내가 걸어온 길도, 내가 가야 할 길도 모두 지워버렸다. 세상에 나 혼자만 남겨진 것 같았다. 동족의 목소리도, 짐승의 울음소리도 들리지 않는, 오직 하얀 침묵만이 가득한 곳. 그곳에서 나는 죽어가고 있었다.”.
이것이 언어가 가진 최초의 마법, 즉 '은유(metaphor)'의 힘이다. 당시의 언어에는 ‘저체온증’이나 ‘방향감각 상실’, ‘극한의 심리적 압박’ 같은 추상적이고 과학적인 단어가 없었다. 그는 자신이 겪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공포와 고통을 전달하기 위해, 그들이 이미 알고 있고 두려워하는 가장 구체적이고 무서운 존재—굶주린 맹수의 ‘이빨’이나 악의를 가진 ‘영혼’과 ‘악마’—의 이미지를 빌려와야만 했다. 인지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와 마크 존슨이 훗날 그들의 기념비적인 저서 <삶으로서의 은유>에서 밝혔듯, 은유는 단순히 말을 아름답게 꾸미는 수사법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의 개념을 다른 개념을 통해 이해하는, 인간 사고의 근본적인 방식 그 자체다. 우리는 ‘사랑은 전쟁이다’라고 말하며 사랑의 어려움과 갈등을 이해하고, ‘시간은 돈이다’라고 말하며 시간의 가치를 파악한다. 사냥꾼은 바로 그 원리를 본능적으로 체화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개인적인 육체적 경험(‘살을 에는 추위’)을, 부족 공동체가 공유하는 집단적인 공포의 경험(‘맹수의 이빨’)에 빗대어 ‘번역’함으로써, 전달 불가능해 보였던 것을 전달 가능하게 만들었다.
부족 사람들은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함께 몸을 떨었다. 아이들은 어미의 품으로 더 깊이 파고들었고, 젊은 사냥꾼들은 자신들이 지난 사냥에서 겪었던 아찔한 순간들을 떠올리며 마른침을 삼켰다. 그의 고통이 이제 그들의 고통이 되었다. 그의 공포가 그들의 공포가 되었다. 이것이 바로 ‘감응의 전염(Contagion of Affection)’이다. 훗날 신경과학자들은 ‘거울 뉴런’이나 ‘신경 결합(neural coupling)’이라는 개념으로 이를 설명할 것이다. 우리가 이야기에 깊이 몰입할 때, 우리의 뇌는 마치 우리가 그 이야기를 직접 겪고 있는 것처럼 활성화된다. 이야기꾼의 뇌와 청중의 뇌 활동 패턴이 기묘하게 동기화되는 것이다. 사냥꾼의 이야기는 동굴 안 사람들의 뇌를 하나의 거대한 신경망처럼 연결했다. 이야기는 한 개인의 육체라는 감옥에 갇혀 있던 주관적인 경험을, 공동체가 함께 느끼고 공유하는 객관적인 사건으로 바꾸는 위대한 변환 장치였다.
이 ‘감응의 전염’은 단순한 감정적 동요나 오락이 아니었다. 그것은 생존에 필수적인 지식과 지혜를 전달하는 가장 강력한 방식이었다. 젊은 사냥꾼들은 그의 이야기를 통해 직접 눈보라를 겪지 않고도 그 위험의 실체를 간접적으로 학습했다. ‘북쪽의 영혼’이 깨어나는 계절에는 절대 무리에서 너무 멀리 떨어지면 안 된다는 것, 길을 잃었을 때는 바람을 등지고 바위 그림자를 찾아야 한다는 것, 들소의 공격을 받았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에 대한 생생한 교훈. 이야기는 가장 효율적이고 안전한 생존 시뮬레이터였다. 이야기는 우리를 죽이지 않고 우리를 더 강하게 만들었다.
또한 이야기는 공동체의 유대를 강화하는 강력한 접착제였다. 그의 고통에 함께 아파하고, 그의 생환에 함께 기뻐하면서, 부족 사람들은 자신들이 단순히 생존을 위해 모인 개인들의 집합이 아니라, 고통과 기쁨, 공포와 희망을 함께 나누는 하나의 운명 공동체임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이야기는 그들을 흩어진 ‘나’들에서 하나의 ‘우리’로 만들었다.
이처럼, 사냥꾼이 모닥불 앞에서 풀어놓은 이야기는 단순한 무용담이 아니었다. 그것은 인류 최초의 교육이었고, 최초의 예술이었으며, 최초의 사회 통합 장치였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재창조함으로써, 부족 전체를 더 현명하고, 더 강하고,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의 가장 위대하고도 중요한 부분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그것은 그가 어떻게 그 지옥 같은 절망 속에서 살아 돌아올 수 있었는지에 대한 대목이었다. 그 대목에서, 인류는 비로소 ‘신(神)’의 얼굴을, 그리고 ‘사회’라는 거대한 약속의 얼굴을 어렴풋이 마주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