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르키소스를 사랑한 요정 에코의 이야기...
얼마나 속이 탔을까? 헤라의 저주를 받아 에코는 누구에게도 먼저 말을 걸 수가 없다. 남의 말을 따라서 할 뿐,
뒤따르는 어떤 소리에 나르키소스가 뒤돌아보며 “누구?” 하고 소리치면 ‘저예요, 에코’ 대신에 저도 따라서 ‘누구?’
높은 산에 올라가 건너편을 향해 소리를 지르면 메아리는 똑같은 소리를 돌려보낸다. 거들떠보지도 않는 나르키소스를 연모하다 여위고 여위어 마침내 형체는 사라지고 목소리만 남은 슬픈 요정 에코다.
우리에게 슬픔의 깊이는 얼마나 될까?
정도의 차이와는 상관없이 슬픔이 없는 삶은 없을 듯하다. 슬픔은 결핍과도 연결되어 있다. 에코처럼...
외가 마을에 상수라는 바보가 있었다. 나보다 서너 살 많은 형이었다. 외갓집 바로 뒷집에 살았는데 바보와 그의 누이, 늙은 어미 세 가족이었다. 가끔 놀러 가 보면 어둑한 호롱불 아래에서 쿰쿰한 냄새 그득히 된장찌개 하나뿐인 반찬으로 풀대죽이나 깡보리밥을 먹었다. 누이는 달빛 아래 피는 박꽃처럼 얼굴이 희고 음전했다. 늘 바느질을 하거나 새끼를 꼬거나 뭔가 일을 했다. 상수형은 그렇다고 완전한 바보는 아니고 정상인보다 지적 능력이 약간 떨어지는 10%쯤 바보였다. 동네에서 다른 집 일을 거들기도 했지만 늘 구박을 받아 나중엔 그냥 백수처럼 놀기만 했다. 술에 취해 돌아다니는 그를 보기도 했다. 찢어지게 가난한 살림이었다. 산 너머 마을의 부잣집 노인에게 누이가 팔려가다시피 시집을 간 뒤 얼마지 않아 상수형은 마을 뒷산에서 소주에 농약을 타서 마시고 죽었다. 혼자 남은 그 어머니도 어디론가 이사를 가 버려 그 뒤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언제나 나를 환하게 반겨주던 그 식구들이 떠오를 때면 마음 한 편이 아려온다. 바보네 가족들에게 슬픔은 호흡과 같은 생존의 방식이었을 것이다. 살아야 한다면 감내해야 할 공기와 같았을 것이다.
토마스 하디의 ‘이름 없는 주드’를 떠올린다. 운명은 끝까지 그를 양지로 보내주지 않는다. 비록 시골 태생이긴 하지만 배움에 대한 열망을 놓지 않은 주드, 어설픈 첫 결혼이 파국으로 끝나자 꿈에도 그리던 대학 도시 크라이스트민스트로 간다. 석공으로 일하면서 부단히 대학 사회의 울타리 안으로 진입하기 위해 애쓰지만 그의 미천한 계급은 그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사촌 누이 수와의 불안한 동거는 첫 번째 결혼에서 얻은 아이가 수와의 동거에서 낳은 아이들을 죽이고 자신도 죽는 끔찍한 비극으로 막을 내린다. 첫 번째 결혼 상대였던 아나벨라의 사악한 그림자는 끝까지 그를 놓아주지 않고 유일한 희망이었던 수마저 그의 끝은 떠난다. 한 인간의 운명이 이렇게 비극적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가슴을 짓누른다.
‘데드 돈 허트(Deth Don’t Hurt)’라는 영화,
마을의 악당에게 겁탈당한 아내가 매독에 감염되어 죽자 악당을 죽이고 악당과 아내 사이에서 난 아이를 데리고 주인공은 샌프란시스코의 바닷가로 간다. 아내를 혼자 두고 전쟁에 나갔던 그는 마치 동굴의 이끼처럼 오래고 깊은 슬픔과 회한에 젖은 눈빛으로 끝없이 밀려오는 파도를 바라본다. 그때 아이가 묻는다. 저 너머가 세상의 끝이냐고...
영화는 말하는 듯하다. 아무리 큰 슬픔이 몰려와도 다만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의 내일이라는 것을, 자고 나면 내일이 오고, 그 내일은 오늘보다 더 소중한 오늘이 된다고
... 한때의 슬픔도 지나고 보면 먹기 좋은 홍시처럼 물러터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