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쥔 카드 — HBM 전쟁의 실상

보이지 않는 전쟁 제4회

by 조종주

한국이 쥔 카드 — HBM 전쟁의 실상

보이지 않는 전쟁 제4회


2026년 2월, 경기도 이천과 평택. 직선거리로 약 50킬로미터 떨어진 두 도시에서 동시에 역사적인 라인이 가동되었습니다. SK하이닉스의 이천 M16 공장과 삼성전자의 평택 캠퍼스에서 HBM4 양산이 시작된 것입니다.[4-1] 세계 최초의 차세대 HBM을 두 한국 기업이 같은 달에 생산하기 시작했습니다.

지난 회에서 HBM이 AI의 심장이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심장을 세계에서 가장 많이 만드는 나라가 한국입니다.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를 합치면, 전 세계 HBM 생산의 약 75~80%를 차지합니다.[4-2] 한 나라가 하나의 핵심 기술에서 이 정도의 지배력을 가진 경우는 반도체 역사에서도 드뭅니다.

그러나 이 3파전은 고정된 구도가 아닙니다. 1위가 흔들리고, 꼴찌가 반전하고, 미국의 도전자가 급부상하고 있습니다.


SK하이닉스 — "AI 메모리 킹"의 무게

SK하이닉스는 HBM 시장의 부동의 1위입니다. 2025년 2분기 기준 출하량 점유율 62%, 3분기에도 53%로 1위를 유지했습니다.[4-3] NVIDIA Vera Rubin 플랫폼에 탑재될 HBM4의 약 70%를 SK하이닉스가 공급할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4-4]

이 지배력의 배경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NVIDIA와의 동맹입니다. SK하이닉스는 TSMC와 함께 "One-Team"이라 불리는 전략적 파트너십을 맺고 있습니다. SK하이닉스가 DRAM 다이를 만들고, TSMC가 12nm 공정으로 로직 베이스 다이를 제조하며, NVIDIA GPU와의 통합을 공동으로 최적화합니다.[4-5] 이 삼자 동맹이 Blackwell부터 Vera Rubin까지 NVIDIA의 핵심 공급 라인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둘째, 양산 수율입니다. HBM은 만들기 극도로 어렵습니다. 30~50마이크로미터 두께의 웨이퍼를 12장 쌓아 수천 개의 TSV로 연결하는 공정에서, 한 층이라도 불량이면 전체가 폐기됩니다. SK하이닉스는 Advanced MR-MUF(Mass Reflow Molded Underfill)라는 독자 패키징 기술로 이 수율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2019년부터 축적해온 이 기술은 칩 연결과 보호 충전을 동시에 수행하여, 공정을 단순화하고 불량률을 낮춥니다.[4-6]

셋째, 투자 규모입니다. SK하이닉스는 용인에 세계 최대 반도체 메가 클러스터를 건설하고 있습니다. 투자 규모는 128조 원에서 600조 원(약 4,100억 달러)으로 대폭 확대되었습니다.[4-7] 2027년 첫 팹이 가동될 예정이며, HBM4, HBM4E, 321층 NAND 등 차세대 제품이 이곳에서 생산됩니다.

그러나 압도적 1위에도 그림자는 있습니다. 3분기 점유율이 62%에서 53%로 떨어진 것은 삼성의 급반등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2025년 연간 영업이익 47.2조 원이라는 기록적 실적에도 불구하고, NVIDIA라는 단일 고객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는 구조적 리스크가 남아 있습니다.[4-8]


삼성전자 — "삼성이 돌아왔다"

2025년은 삼성전자의 HBM 사업에서 가장 극적인 한 해였습니다. 상반기의 추락과 하반기의 반전이 공존했습니다.

상반기에 삼성은 NVIDIA의 HBM3E 품질 인증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여기에 중국향 수출 제한까지 겹치면서, 2분기 점유율은 17%까지 떨어졌습니다. 1년 전 41%에서 절반 이하로 추락한 것입니다.[4-9]

반전은 3분기부터 시작되었습니다. HBM3E가 주요 고객사의 인증을 통과하면서, 점유율이 22%로 급반등했습니다. 특히 Google의 TPU용 HBM3E에서 60% 이상의 공급을 확보한 것이 큰 성과였습니다.[4-10]

그리고 HBM4에서 삼성은 기술적 차별화에 성공했습니다. 삼성의 HBM4는 세 가지 점에서 경쟁사와 다릅니다. 첫째, 6세대 10나노급 공정인 1c DRAM을 채택했습니다. 경쟁사 대비 한 세대 앞선 메모리 공정입니다. 둘째, 로직 베이스 다이를 자체 4나노 파운드리 공정으로 제조합니다. SK하이닉스가 TSMC 12나노를 사용하는 것에 비해 수 세대 앞선 공정입니다. 셋째, 설계부터 생산까지 자체 수행하는 '턴키' 솔루션입니다.[4-11]

그 결과, 삼성 HBM4는 11.7Gbps의 핀 속도를 달성했습니다. 이는 JEDEC 표준(8Gbps)을 크게 웃도는, 업계 최고 수준입니다.[4-12] NVIDIA와 AMD 양쪽의 인증을 통과했으며, 2026년 2월부터 양산 출하를 시작했습니다.

삼성 DS 부문 공동CEO 전영현은 신년사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HBM4에서 고객사도 '삼성이 돌아왔다'고 평가했습니다."[4-13]

삼성은 2026년 내 월 웨이퍼 생산능력을 17만 장에서 25만 장으로 약 50% 확대할 계획입니다.[4-14] NVIDIA Vera Rubin HBM4 공급에서는 약 30%의 배분을 확보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글로벌 HBM 시장 점유율은 2026년 30%를 넘어설 것으로 전망됩니다.[4-15]


마이크론 — 미국의 카드

이 3파전의 세 번째 주자는 미국 아이다호주 보이시에 본사를 둔 마이크론입니다. 2024년까지만 해도 HBM 시장에서 존재감이 미미했던 마이크론은, 2025년에 극적인 변화를 만들어냈습니다.

2025년 2분기, 마이크론의 HBM 점유율은 21%를 기록하며 삼성을 제치고 2위로 올라섰습니다.[4-16] 3분기에도 21%를 유지했습니다. 이 급부상의 배경에는 세 가지 전략적 결정이 있습니다.

첫째, 소비자 시장 포기입니다. 마이크론은 2025년 12월 소비자 메모리 시장에서 철수를 선언하고, 전사적 역량을 AI 데이터센터 메모리에 집중했습니다.[4-17] 수익성 낮은 PC·스마트폰용 메모리를 버리고, HBM이라는 고수익 시장에 올인한 것입니다.

둘째, HBM4 양산 개시입니다. 마이크론은 2026년 1분기에 HBM4 36GB 12-Hi의 양산 출하를 시작했습니다. 11Gbps 이상의 핀 속도와 2.8TB/s 이상의 대역폭을 달성했으며, NVIDIA Vera Rubin용으로 공급되고 있습니다.[4-18] 다만 Vera Rubin의 플래그십 라인에는 삼성·SK하이닉스가 주력 공급사이며, 마이크론은 추론 중심의 Rubin CPX 등 중급 제품에 집중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4-19]

셋째, 미국 정부의 지원입니다. 마이크론은 CHIPS Act를 통해 61억 달러의 연방 지원금을 확보했으며, 뉴욕주에 약 1,000억 달러 규모의 첨단 반도체 공장 건설에 착수했습니다.[4-20] 미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반도체 투자입니다. 아이다호 팹 확장도 진행 중이며, 향후 미국 내에서 최초로 HBM 후공정(패키징) 라인을 갖출 계획입니다.

실적이 그 전략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마이크론의 2026 회계연도 2분기(2026년 2월 마감) 매출은 239억 달러로, 전년 동기 대비 196% 증가했습니다. 순이익률은 41.5%에 달합니다.[4-21]


세 기업의 칼날


04회_시각자료_3파전비교.png [이미지: HBM 시장 3파전 — 3사 전략 비교]


같은 HBM4를 만들지만, 세 기업의 칼날은 다릅니다.

SK하이닉스의 무기는 양산 수율과 NVIDIA와의 동맹입니다. TSMC 12nm 로직 다이와 Advanced MR-MUF 패키징으로 안정적인 대량 생산을 실현하며, Vera Rubin HBM4의 약 70%를 공급합니다. 약점은 NVIDIA 의존도가 높다는 것입니다.

삼성의 무기는 기술 차별화입니다. 1c DRAM과 4nm 자체 로직 다이라는 공정 우위로 11.7Gbps라는 업계 최고 속도를 달성했습니다. 약점은 양산 수율의 안정화가 아직 진행 중이라는 것입니다.

마이크론의 무기는 미국이라는 지정학적 위치입니다. CHIPS Act 지원, 미국 내 팹 건설, 공급망 다변화 수요 — 미국 정부와 미국 빅테크에게 "한국에만 의존하지 않아도 된다"는 선택지를 제공합니다. 약점은 한국 양사 대비 생산 규모가 작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HBM 한 개 스택의 가격은 600달러를 넘습니다.[4-22] HBM3E 12-Hi 대비 50% 이상 높은 가격입니다. 일반 DRAM의 가격이 GB당 2~3달러인 세계에서, HBM4 스택 하나에 600달러. HBM은 더 이상 "부품"이 아니라 "전략 자산"입니다.


고정되지 않은 구도

한국이 HBM의 약 75%를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은 현재 진행형의 강점입니다. 그러나 이 구도는 고정된 것이 아닙니다. 마이크론의 매출이 1년 만에 3배로 뛰고, 삼성의 점유율이 한 분기 만에 5%포인트 급등하는 시장입니다. 빠르게 변합니다.

그리고 이 3파전 밖에서, 벽 너머의 도전자가 42억 달러를 베팅하며 준비하고 있습니다. 중국의 CXMT는 HBM3 양산을 목표로 자체 생태계를 구축하고 있습니다. 과연 벽을 넘을 수 있을까요.


1.이 글은 『보이지 않는 전쟁 — AI 반도체, 누가 미래를 지배하는가』 연재의 4회입니다. 매주 화·수·금 발행됩니다.

2. 이 글은 필자가 주 2회 발행하는 브런치 매거진 'AI 트렌드 리포트'의 기획기사로 12회에 걸쳐 연재할 예정입니다.


참고 자료

TrendForce, "Samsung, SK hynix Reportedly Tapped as NVIDIA Rubin HBM4 Suppliers", 2026년 3월 9일.

Dataconomy, "Samsung And SK Hynix To Dominate Nvidia Vera Rubin HBM4 Supply", 2026년 3월 9일.

Introl, "South Korea's HBM4 Moment", 2026년 1월 7일.

Micron Technology, IR 발표(GTC 2026), 2026년 3월 16일.


각주

[4-1] SammyFans, "February 2026 is when Samsung HBM4 arrives", 2025년 12월 25일. SeoulEconomicDaily 인용. 삼성은 평택 캠퍼스, SK하이닉스는 이천 M16 및 청주 M15X에서 2026년 2월 HBM4 양산 개시.

[4-2] Introl, "South Korea's HBM4 Moment", 2026년 1월 7일. "Samsung and SK Hynix produce 90% of global High Bandwidth Memory." 다만 이 수치는 삼성+SK 합산이며, 마이크론 21% 점유율을 감안하면 약 75~80%가 보다 정확한 추정. TrendForce(2026.3)는 SK하이닉스 50% + 삼성 28% = 78%로 2026년 전망.

[4-3] Counterpoint Research, Q2·Q3 2025 HBM Market Share. Semiecosystem(2025.12.24) 인용. Q2 62%, Q3 53%.

[4-4] Yonhap News/TrendForce, 2026년 1월 28일. "NVIDIA is expected to allocate roughly two-thirds of its HBM4 demand for the Vera Rubin platform to SK hynix, with the company's share understood to be close to 70%." Korea Economic Daily(2026.3.8)도 약 70% 배분 확인.

[4-5] Introl, 위 기사. "SK Hynix takes a different approach, outsourcing the logic base die to TSMC through its 'One-Team' alliance." TSMC 12nm 공정 사용.

[4-6] TrendForce, "Breaking the Memory Wall: HBM Basics", 2025년 9월 29일. MR-MUF 기술 설명: "combining chip connection and protective filling in a single step."

[4-7] Introl, 위 기사. "SK Hynix announced plans to increase investment in its Yongin semiconductor cluster from 128 trillion won to 600 trillion won ($410 billion)."

[4-8] FinancialContent, "SK Hynix Emerges as AI Memory King", 2026년 1월 30일. 2025년 연간 영업이익 47.2조 원, 삼성(43.6조 원)을 최초 추월.

[4-9] Counterpoint Research, Q2 2025. Semiecosystem(2025.8) 인용. 삼성 Q2 2024 41% → Q2 2025 17%로 하락.

[4-10] TrendForce, "Samsung Reportedly Supplies 60%+ of Google TPU HBM3E", 2025년 12월 1일.

[4-11] TrendForce, "Samsung Set to Begin Official HBM4 Shipments", 2026년 1월 26일. 삼성 1c DRAM + 4nm 파운드리 로직 다이 설명.

[4-12] TrendForce, 위 기사. "Samsung's HBM4 achieves a data rate of 11.7 Gb per second."

[4-13] BusinessKorea, "NVIDIA's Mass-production of 'Vera Rubin'", 2026년 1월 6일. 전영현 부회장 신년사 인용.

[4-14] TrendForce, "Samsung Reportedly Plans 50% HBM Capacity Surge in 2026", 2025년 12월 30일. 월 17만 장 → 25만 장 확대 계획.

[4-15] TrendForce(2026.3.9): SK하이닉스 50%, 삼성 28%. EBN 보도: "Samsung's share of the global HBM market is expected to surpass 30% this year."

[4-16] Counterpoint Research, Q2 2025. 마이크론 21%로 삼성(17%) 추월.

[4-17] DCD, "Samsung and SK Hynix to scale up memory production", 2026년 3월. "In December 2025, Micron announced plans to exit the consumer memory and storage market."

[4-18] Micron Technology IR, GTC 2026, 2026년 3월 16일. "HBM4 36GB 12H in high-volume production, designed for NVIDIA Vera Rubin — greater than 2.8 TB/s."

[4-19] TrendForce(2026.3.9): "Micron is expected to provide HBM4 for mid-tier AI accelerators geared toward inference, such as Rubin CPX."

[4-20] The Motley Fool, 2026년 3월 27일. CHIPS Act $61억, 뉴욕 $1,000억 팹 투자.

[4-21] FinancialContent, "Micron Crushes Expectations", 2026년 3월 26일. FY2026 Q2 매출 $238.6억, 전년비 196% 증가, 순이익률 41.49%.

[4-22] TrendForce(2026.1.28): "Industry sources expect prices for 12-layer HBM4 products to exceed $600." HBM3E 12-Hi는 $300 중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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