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대신 분필을 잡은 밤
검정 페인트 벽 앞에 서면 나는 더 이상 10,300원짜리 소모품이 아니었다.
손에 쥔 분필 한 토막은 낮 동안 사무실에서 나를 난도질하던 결재 서류와
비아냥거리는 시선들에 대항하는 유일한 무기였다.
나는 벽 전체를 집어삼킬 듯한 초대형 인물을 그려 넣기 시작했다.
칠판이 아닌,
거친 벽면의 요철을 따라 분필 가루가 뭉치고 흩어지며 인물의 피부 질감이 살아났다.
특히 공을 들인 것은 눈동자였다.
그 눈동자는 나를 사원으로 강등시킨 사장과,
8,000만 원의 빚을 약점 잡아 부조리한 업무를 몰빵하던 이사들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너희가 나를 지우려 해도, 내 영혼은 이렇게 거대하게 살아있다"는 무언의 선전포고였다.
정교하게 묘사된 동공 속에 조명이 반사되는 찰나를 하얀 분필로 찍어 누를 때,
내 안에서 미쳐 날뛰던 공황의 괴물도 잠시 숨을 죽였다.
엑셀 시트의 작은 칸 속에 억지로 구겨 넣었던 나의 모든 분석적 감각과 통찰력은,
이제 이 거대한 벽 위에서 압도적인 실재감을 뿜어내는 예술로 변모했다.
내가 벽면 전체를 하얀 가루로 뒤덮으며 광기 어린 몰입에 빠져 있을 때,
주인 언니 P는 단 한 번도 나를 제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내가 분필 가루를 뒤집어쓴 채 벽과 사투를 벌이는 그 풍경 자체를
'달팽이 노리터'의 일부로 받아들여 주었다.
10,300원이라는 시급으로 내 노동력을 착취하던 회사가 나를 '근태 불량'이라 낙인찍을 때,
P언니는 내가 벽에 새겨 넣는 그 처절한 선들을 묵묵히 지켜봐 주는 유일한 관객이자 성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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