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처음 그런 연락을 받았을 때
굳이 목소리를 듣고자 했던 것은,
역설적이게도,
이미 그로 인해 비대해진 나의 자아를, 이번에는 심해에 가둔. 그 사람의 목소리를 듣고 나면,
뭍에 걸칠 수라도 있을 것 같아서였던 것 같다.
나를 이토록 실망시킬 수 있는 건 그뿐인데,
이런 나를 다시 일으킬 수 있는 것 또한 그뿐인지라.
첫째로는 자신의 감정을 그 자신 또한 헷갈렸을 것이라 여겼다.
둘째로는 그러므로 나의 부재를 느끼면 자연스레 진짜 본인의 마음을 깨달을 것이라는 나의 생각.
셋째가 지나고 넷째가 돼 서야 그 생각이 안일한 것이었음을 깨달았고,
다섯째가 되던 날에, 운명이라고 은근하게 기대해 왔던 나와 그의 관계가 놀랍도록 아무것도 아닌 거였음을 깨달았다.
우리는 완전한 친구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연인 사이도 아니었다.
서로가 좋아하는 것을 알고, 이따금 애정표현도 하지만 사귀지는 않는. 이런 이상한 관계를 정의할 수 있는 단어는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더 이상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실은 물어보고 싶은 것이 참 많았다.
무엇 때문인지, 나한테 서운한 게 있었는지, 앞으로 어떻게 하고 싶은 건지…
우리가 정말 아무런 관계도 아니었음을 깨달은 순간,
저 질문들도 무의미함을 깨달았다.
그야 저 질문들은, 앞으로의 미래가 당연한 사람들이 할법한 얘기들이었으니까.
놀랍도록 아무런 관계가 아니었던 우리는,
친구가 아니었기에, 같이 해결책을 탐구하기에는 이 문제가 너무 무거웠고,
연인이 아니었기에, 새로운 시작을 궁리하기에는 우리의 관계가 참 가벼웠다, 애석하게도.
좋아하면 실망도 큰 법이라 여겨서 마음을 아껴놨었다.
바보같이 내 마음의 남은 공간을 이 관계에 대한 기대로 채우고 있었던 줄은 몰랐다.
그래서 지나간 사랑에 대한 미련보다, 잃어버린 관계에 대한 상실감이 더 클 줄은 더더욱 몰랐다.
아직도 그 사람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그가 그리워서일까, 아니면, 내가 만든 관계를 이렇게 끝내고 싶지 않아서일까.
실연은 당할수록 강해진다는데,
어쩐지 나는 당할수록 사람을 좋아하기 더 어려워지는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