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중일기] 역사 속 영웅, 기록 속 인간

<고전에서 찾는 인간이해 #8>

by 여의도겨울바람

이순신이라는 이름을 떠올리면 떠오르는 거대한 장면들이 있다.

학익진으로 바다를 덮었던 한산해전의 압도적 승리.

모함과 시기 속에 관직을 박탈당하고 평민의 몸으로 전쟁터를 누벼야 했던 백의종군.

칠천량 패전 이후 궤멸한 수군을 재건해 단 13척으로 수백 척의 왜선을 마주했던 명량해전의 기적.

그리고 끝내 적의 총탄에 쓰러지며 남긴 노량해전에서의 마지막 유언까지.

우리가 기억하는 그는 결코 흔들리지 않는 성웅의 모습이다.


그러나 그의 친필 기록인 난중일기를 펼치면

우리가 기억하던 그 완벽한 영웅의 이미지와는 조금 다른 얼굴이 나타난다.

거기에는 전투의 승리를 자랑하는 문장도,

전략과 전술에 대한 치밀한 복기도 거의 보이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를 반복해서 채우고 있는 것은

날씨의 변화, 몸의 병세, 걱정과 분노, 그리고 그날의 일상이다.

이 기록은 한 영웅이 남긴 승리의 연대기가 아니라,

전쟁을 이끌어야 했던 한 인간의 시간이 쌓여 있는 자리다.



아픈 몸과 고립된 영혼으로 버티는 자리


일기 속 이순신은 생각보다 훨씬 자주, 그리고 깊게 아팠다.

“몸이 불편하여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토하고 설사하여 기운이 하나도 없다”

“땀이 비 오듯 흘러 옷을 적셨다”는 기록이 일기 곳곳에 줄을 잇는다.

조선의 바다를 책임지던 통제사는 극심한 스트레스와 누적된 피로 속에서

자신의 몸 하나를 겨우 지탱하고 있던 위태로운 사람이었다.


그는 초인이 아니었다.

승리라는 결과 뒤에 숨겨진 과정은

매 순간 부서져 가는 육신을 추스르며 책임을 다해야 하는 처절한 인내였다.

일기에는 원균을 비롯한 동료 장수들에 대한 노골적인 불만과 비난도 거침없이 등장한다.

정제된 역사서라면 지워졌을 표현들이지만,

그는 성인군자처럼 말하지 않는다.

인간으로서 느끼는 답답함과 분노를 숨기지 않고 붓 끝에 실어 쏟아낸다.

이 날것의 기록은 장군의 위엄을 세우기보다,

수장이기에 겪어야 했던 고립을 나타낸다.



전략보다 먼저 적힌 것들


우리가 이 책을 처음 펼칠 때 기대하는 것은,

한산해전의 진법은 어떻게 구상되었고,

명량의 울돌목을 어떻게 이용해서 승리했는지 등에 대한 위대한 전략의 기록이다.

그러나 정작 일기에는 그런 설명이 많지 않다.

“비가 왔다.”

“바람이 거세다.”

“어머니가 그립다.”

전쟁의 흐름을 바꾼 승리 이후에도 그는 공적을 길게 남기지 않는다.


왜 그는 승리의 비결보다 날씨와 주변의 소소한 일들을 더 많이 적었을까?

아마도 이 일기의 목적은 전쟁의 성과를 남기는 것이 아니라,

기록하지 않으면 흩어져 버릴 매일의 사실들을 붙잡아두는,

지극히 개인적인 습관이자 업무의 연장이었을 것이다.

전쟁이라는 비정상적인 소용돌이 속에서

오늘 날씨는 어땠는지, 몸 상태는 어땠는지,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를 기록하는 행위는

그가 처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마주하려는 태도였다.

승리는 역사에 기록되지만,

그 뒤에 숨겨진 개인의 불안과 하루의 무게는 스스로 기록하지 않으면 어디에도 남지 않기 때문이다.



수장으로서 짊어진 가족에 대한 부채감


난중일기의 문장들 사이에는 가족에 대한 마음이 깊게 패어 있다.

하지만 그 감정은 따뜻한 그리움을 넘어 묵직한 부채감으로 읽힌다.

나라의 수군을 통솔하며 바다를 지키는 자리였지만,

정작 자신의 가장 소중한 사람들은 단 한 명도 곁에서 돌보지 못했다는 자책이다.

백의종군 중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그는 상주로서 도리를 다하지 못하고 길 위에서 통곡해야 했다.

명량해전 이후 아들 면의 전사 소식을 들었을 때도,

그는 장군으로서 슬픔을 삼키며 배 위에서 밤을 지새웠다.

"하늘이 어찌 이토록 인자하지 못하신가",

"내가 죽고 네가 살아야 하는데"라며 울부짖는 대목에서는

위대한 성웅이 아닌, 자식을 잃은 한 아버지의 비통한 슬픔이 느껴진다.


전쟁을 이끌어야 하는 자리에서

가족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는 마음의 상처는 그를 오래 붙잡는다.

우리는 전쟁을 승리로 이끈 영웅의 결단은 기억하지만,

그 결단을 위해 그가 감내해야 했던 사적인 상실과 희생은

오직 이 기록 속에서만 숨을 쉬고 있다.

국가의 운명을 짊어진 대가가 자신의 삶을 무너뜨리는 것이었다면,

그가 일기를 쓸 때마다 느꼈을 고통의 무게는 짐작하기조차 어렵다.



시대를 건너 마주하는 한 인간의 시간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 당시 이순신의 나이를 지금의 나의 나이와 나란히 놓아본다.

그와 비슷한 나이의 시간을 통과하고 있는 나로서는,

그 일기장 갈피마다 담긴 중압감을 감히 상상하기조차 어렵다.

나는 내 삶의 작은 시련조차 이토록 담담하게 짊어지고 기록할 수 있을까?


난중일기는 우리에게 승리의 비결을 가르쳐주지 않는다.

대신 영웅이란 두려움이 없는 존재가 아니라,

불안과 고통 속에서도 자리를 떠나지 않고

매일의 사소함을 묵묵히 적어 내려간 사람이라는 것을 기록 그 자체로 보여준다.

영웅은 화려한 전투의 성과로 기억되지만,

이 기록 속의 그는 매일을 버텨낸 한 인간으로 남는다.

그래서 난중일기는 위대한 전쟁의 역사가 아니라,

전쟁을 견딘 한 인간의 시간이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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