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에서 찾는 인간이해 #9>
노자와 장자가 억지로 만들지 않는 ‘무위(無爲)’를 말했다면,
공자와 맹자는 정성을 다해 가꾸는 ‘인위(人爲)’를 말한다.
노장 사상이 인간을 그대로 두어야 온전한 존재로 보았다면,
공맹 사상은 인간을 가꾸지 않으면 금세 흐트러지는 존재로 보았다.
이들의 차이는 인간을 바라보는 근본적인 시선에서 갈린다.
노장이 삶의 무게를 덜어내려 했다면,
공맹은 삶의 중심을 세우려 했다.
비우는 것이 자유를 말한다면,
공맹은 채워야 할 자리를 묻는다.
공맹 사상은 인간이 관계 속에서 스스로를 어떻게 다듬어야
비로소 인간다워질 수 있는지를 오래 탐구한 기록이다.
논어 – 관계 속에서 무너지지 않는 기준
논어는 거창한 형이상학을 펼치지 않는다.
대신 부모를 어떻게 모실 것인지,
친구와 어떻게 신의를 지킬 것인지 같은
지극히 구체적인 장면을 반복해서 들여다본다.
공자에게 인간 이해의 중심은
‘나’라는 개인보다 ‘나와 타인 사이’에 있었다.
그가 말한 예(禮)는 흔히 딱딱한 규범이나 위계의 질서로 오해되지만,
실상은 사람과 사람이 마주할 때 갖추어야 할 태도에 가깝다.
사람 사이에는 적절한 거리가 필요하다.
너무 멀면 외로워지고, 너무 가까우면 서로를 다치게 된다.
공자는 그 거리가 무너지지 않도록 붙들어주는 태도를 ‘예’라고 불렀다.
“임금은 임금답고, 아버지는 아버지다워야 한다”는 말 역시
신분을 고착화하려는 선언이 아니다.
각자가 서 있는 자리에서 자신의 책임을 다할 때
공동체가 유지될 수 있다는 믿음이었다.
논어에서 인간은 완성된 존재가 아니다.
늘 관계 속에서 조정하고, 다듬어가며 살아가는 존재다.
맹자 – 인간 안에 남아 있는 기준
공자가 관계의 틀을 세웠다면,
맹자는 그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인간 내부의 기준을 말한다.
맹자에서 성선설은 인간을 미화하려는 선언이 아니다.
아무리 어지러운 시대라 하더라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근거를 인간 안에서 찾으려 했다.
맹자는 우물에 빠지려는 아이를 보며
조건 없이 치미는 측은지심에 주목했다.
그는 이러한 마음을 인간 안에 이미 주어진 네 가지 단서, 곧 사단이라 보았다.
그 감각은 밖에서 빌려오는 것이 아니다.
하루하루의 선택 속에서, 스스로를 배반하지 않을 때 비로소 자기 것이 된다.
맹자가 말한 선함은 고요한 상태가 아니다.
불의 앞에서 부끄러워하고, 잘못 앞에서 돌아설 줄 아는 감각이다.
맹자에게 인간은
태어난 대로 흘러가는 존재가 아니라,
자기 안에 남아 있는 기준을 끝내 놓지 않으려는 존재다.
세상 안에서 인간으로 남는 일
노장이 삶의 고단함에서 우리를 잠시 물러나게 한다면,
공맹은 우리가 발 딛고 선 자리에서 어떻게 흔들리지 않을지를 묻는다.
논어는 관계가 무너지면 인간도 함께 무너진다고 말하고,
맹자는 관계가 무너져도 인간 안에는 끝내 버릴 수 없는 것이 남아 있다고 말한다.
하나는 바깥에서 인간을 붙들고,
다른 하나는 안쪽에서 인간을 지탱한다.
그래서 이 두 사상은 대립이 아니라 서로를 보완하는 자리다.
논어와 맹자가 공유하는 전제는 단순하다.
인간은 완전히 망가지지 않는다는 믿음.
이 믿음이 없다면
관계는 통제가 되고, 도덕은 명령으로 남는다.
공자의 예와 맹자의 선한 본성은
인간을 이상화하려는 말이 아니다.
사람이 쉽게 흔들린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태도다.
논어와 맹자는 우리를 더 착하게 만들려 하지 않는다.
다만 묻는다.
“당신은 지금 관계 속에서 어떤 사람으로 남아 있는가?”
“당신 안에 남아 있는 기준은 무엇인가?”
세상 안에서 인간으로 남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다.
이 고전은 그 사실을 쉽게 덮어두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