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꿈에서나마 소원이 이루어지다

[장편소설] 넌 꿈에서 깨어나려 하지 않고

by 선명




예림은 나희에게 이끌려 탈의실로 이동했다. 나희가 온풍기를 켜니 금세 실내가 포근해졌다. 보건실에서 받아 온 물품을 꺼내 드는 나희는 어느 때보다 신중했다. 예림의 얼굴을 조심스레 닦아 내고 상처를 소독했다. 예림은 신음하며 시선을 발밑으로 떨구었다. 옷에서 흐린 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나희가 수건으로 흙을 털어내자 되려 블라우스에 더 큰 얼룩이 생겼다. 예림은 불평하지 않았다. 대신 나희가 입을 열었다. 치밀어 오르는 부아를 억누른 목소리였다.

“체육복 가지고 있니?”


예림은 고개를 저었다. 이런 비슷한 상황을 전에도 경험했다. 겨울 방학식 전날, 예림이 과학실에서 속을 게워 냈던 건 아마 그들에게 예상 밖이었을 것이다. 뒤처리를 떠맡은 표은은 과학실 내부를 일을 벌이기 전으로 되돌렸다. 그는 남은 인내심을 발휘해 갈아입을 체육복이 있느냐는 질문을 반복했다. 예림이 묵묵부답으로 일관하자 표은은 실험대 위에 예림의 가방을 올려놓았다.

“토사물 냄새 풍기며 집에 갈 순 없잖아.”

표은의 말은 똑똑히 들렸다. 그게 전부였다. 예림은 행동할 모든 가능성이 소거된 채 그저 의자에 앉아 있었다. 눈앞에서 가방이 열렸고, 자신의 소지품이 낱낱이 드러났다. 필통에서 사물함 열쇠를 찾은 표은은 교실로 올라가 예림의 체육복을 꺼내왔다. 그가 느긋하게 손마디를 꺾었다. 마치 실험 대상에 대해 통달했다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자, 집으로 가야지.”

나희가 체육복 상의를 들고 다가왔다. 예림은 어린아이처럼 두 팔을 쳐들고 나희가 사서 고생하도록 내버려두었다. 스스로 옷을 챙겨 입기엔 이미 과학실이라는 수렁에 빠져있는 상태이기도 했다. 그날, 예림은 표은이 내민 손을 도저히 잡을 수 없었다. 모든 행위를 끝마친 그는 매우 자연스러웠다. 눈빛, 호흡, 목소리, 걸음걸이 전부 어색한 점이 없었다. 상대의 안위를 살피고 부축할 수 있는 표은의 매너가 예림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지금 이 순간, 이 세상에 다정함이 남아있다는 사실에 욕지기가 다시 올라왔다. 예림은 바닥에 위액을 쏟아냈다. 토물이 묻을세라 머리칼을 모아 주는 손길에 눈물이 나왔다.


예림은 탈의실 바닥에 엎드려 그날에서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등을 어루만지는 나희의 손길이 참으로 부드러웠다. 예림은 간절히 바랐던 나희의 위로를 뿌리치며 입술을 손등으로 문질렀다. 의자에 늘어져 나희가 바닥을 치우는 양을 지켜보았다. 표은도 비슷했다. 다시 더러워진 바닥을 보고도 싫은 소리를 하지 않았다. 한숨만 내쉬고 휴지를 둘둘 말아 바닥을 훔쳤다. 지금 떠올리니 대걸레를 도로 가져오는 게 귀찮았던 모양이었다. 토사물로 얼룩진 휴지 뭉치를 보는 나희의 얼굴엔 난처한 기색이 역력했다. 나희는 여러 장 겹친 깨끗한 휴지를 들고서야 겨우 손끝으로 쓰레기를 집어 들 수 있었다.


…예림이 도망칠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교실에서도, 과학실에서도, 운동장에서도, 가장 사랑하는 친구 앞에서도 자신은 존재했다. 어디에든 자기가 있지 않은 곳이 없었다. 추악한 현실이었다.


담임의 허락을 받은 나희는 예림을 데리고 교문 밖으로 나왔다. 그는 예림의 짐을 대신 들고 버스에 탔다. 나희가 빈 좌석을 가리키며 손짓했지만 예림은 서서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날, 학교 앞 버스정류장에서도 예림은 가방을 돌려받지 못했다. 표은과 퇴근 시간대 버스를 타는 게 못내 괴로워서 예림은 무작정 걸었다. 표은이 예림의 짐을 들고 뒤따라왔다. 이따금 예림은 멈춰서 숨을 골랐다. 그때마다 말없이 기다려주는 표은이 징그럽기 짝이 없었다. 예림은 적의를 들키지 않으려 애썼다. 훗날 자신에게 가해질지도 모르는 보복이 두려웠던 것이다.


버스 창유리에 비친 예림의 얼굴을 보고 나희가 마른침을 삼켰다. 나희와 예림은 한동안 창유리에 비친 상대를 주시했다. 버스가 역에서 정차하자마자 예림은 나희에게서 책가방과 종이백을 빼앗아 들었다. 정차 벨을 누르며 예림이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너한테 짐까지 들어달라고 부탁한 적 없어.”

대문 앞에 서서 예림은 얼굴을 더듬었다. 임시방편으로 붙여 놓은 밴드 사이로 연고가 흘러나왔다. 결국 표은에게 고모의 집 위치를 드러낼 수밖에 없었던 그날, 예림은 눈이 마주치는 이들에게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다들 자신이 조금 전 어떤 일을 겪었는지, 속속들이 알고 있다는 식으로 쳐다보았기 때문이었다. 예림은 휘몰아치는 감정을 전부 가사도우미 아주머니에게 쏟아내고 말았다. 아주머니는 그날 이후로 먼저 말을 걸지 않았다.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었다. 예림은 뒤를 돌았다. 나희가 가지 않고 높다란 담장을 새삼스럽게 훑고 있었다. 예림은 그에게 원표은처럼 스토커 행세라도 할 생각이냐고 쏘아붙이고 싶은 충동을 억눌러야 했다.

“…잘 가.”


다행히 가사도우미 아주머니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마음을 완전히 내려놓을 수 없었는지 예림은 살금살금 방으로 들어와 문을 잠갔다. 예림은 창가로 다가섰다. 나희는 학교로 돌아간 모양이었다. 예림은 물먹은 솜 같은 몸을 침대 위로 던졌다. 밤늦게까지 집 앞을 지키던 표은을 상기하자 소름이 돋았다. 몸에서 흙내와 나희네 세제 냄새가 풍겨왔다. 체육복은 다음 체육 시간 전까지 돌려주겠다는 문자를 나희에게 보낸 뒤 예림은 눈을 감았다. 산속 모든 소리를 삼키는 눈처럼, 얼어붙은 채 방향감을 상실한 도로 위처럼, 추락하는 순간 운명에 몸을 맡길 수밖에 없는 무력감처럼, 졸음이 몰려왔다.


예림은 눈꺼풀을 들어 올리려고 무던 애썼다. 얼굴의 상처와 갈가리 찢겨진 외투, 더러워진 교복에 관한 변명거리를 생각해 둬야 했다….

졸리면 자도 돼. 도착하면 깨울게.

익숙한 목소리가 아득한 의식을 가로질렀다. 질척이는 도로, 더러운 눈 위에 남은 타이어 자국처럼.


학교에서 새빨간 거짓말쟁이로 낙인찍히고, 인생 최악의 고백을 듣고, 아이들에게 린치를 당하다니, 지독한 꿈이다. 누군가 어깨를 흔든다. 일어나, 송예림. 일어나야지. 눈을 뜨려는 찰나 예림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다. 자신을 깨우는 이의 정체가 수상쩍다. 목소리가 거듭 달라지고 있다. 전부 예림이 들어 본 음성이다. 엄마와 아빠일까? 두 분이 번갈아 깨우는 게 아니라면, 꿈속의 남자애들일까? 신해운, 지수열, 그리고 얼굴도 이름도 몰랐던 녀석. 예림은 미간을 구기며 몸을 살짝 뒤척인다. 절대로 궁금하지 않던 이름까지 알아버리다니, 역시 조금 전 꿈은 섬뜩하기만 하다.

“빨리 집이었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보채더니… 그냥 내버려둘까 보다.”

어딘지 그리운 목소리. 그 음성이 소년들의 것으로 바뀌기 전에 예림은 서둘러 눈을 뜬다. 눈앞에 엄마가 있다. 엄마의 얼굴을 본 순간 왈칵 눈물이 쏟아진다. 역시 전부 꿈이었던 거다. 자신이 개구리 표본에 불과하다는 걸 알게 된 그날은. 어둠이 깔린 복도를 망연히 걷던 유령은. 엄마를 꽉 껴안은 예림은 요지부동이다. 서세연의 얼굴엔 잠시 당황한 기색이 떠오르지만, 이내 딸의 등을 어루만진다. 예림의 눈물을 훔쳐내는 세연의 손끝에 살짝 힘이 들어간다.

“이제 아빠 도와드려야지?”


예림은 고개를 끄덕인다. 차 뒤편으로 다가가니 묘한 악취가 훅 끼쳐온다. 트렁크 안을 들여다보니 차곡차곡 쌓인 짐 위로 뻣뻣하게 굳은 어린 사슴이 놓여 있다. 송시우는 딸이 더는 구경하지 못하도록 사슴을 끌어 내려 반대편으로 치워버린다. 이 사달은 전부 난데없이 튀어나온 짐승과 자신의 화를 돋운 세연의 잘못이라 우물거린다. 예림은 아빠의 변명이 불쾌하게 들려 내심 놀란다. 예림의 속마음을 알 리 없는 시우는 짐을 받아 드는 예림을 향해 지친 미소를 짓는다. 예림은 불현듯 스미는 위화감을 지우려 한다.


사슴을 도로에 방치하지 않고 수습했으니, 아빠는 책임감 있는 어른이다. 그러나 도리어 강해지는 꺼림칙함을 몰아내기 위해 예림은 짐을 하나씩 들고 여러 번 짤막한 거리를 오간다. 아빠는 선량하고 다감한 사람이다. 고모가 졸렬하기 그지없는 거짓말을 한 게 분명하다. 임차료 문제로 골머리를 썩이던 엄마는 화풀이 대상이 마침 필요했을 뿐이다. 그래서 기꺼이 고모의 거짓말에 속은 거다.


할머니의 집에 머무는 동안 예림은 고삐 풀린 말처럼 사촌들과 놀기에 바빴다. 덕분에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꿈자리가 사나웠지만 한 번도 깨지 않았다. 그런데 낯설면서도 기분 나쁠 정도로 익숙한 이 사고의 흐름은 대체 어디서부터 비롯된 걸까? 뒤를 돌아보면 여태 꾸었던 악몽이 다시금 펼쳐지기라도 하는 게 아닐까? 바로 뒤에서 인기척이 난다. 예림의 모골이 송연하다. 아빠가 머리를 헝클어트리고 대문 앞에 짐을 내려놓는다. 그 장난스러운 손길에 마음이 놓인 예림은 웃음기 섞인 한숨을 내쉰다. 예림은 뒤를 돌아 가벼운 발걸음으로 다시 차로 간다. 가로등 불빛에 어른거리는 골목의 냄새를 들이마신다.


찌그러진 범퍼엔 아빠가 들이받아 버린 사슴의 피가 묻어 있다. 예림은 보닛에 쌓인 눈을 살짝 건드려본다. 눈이 시든 꽃잎처럼 부서져 내린다. 이번엔 가여운 생물의 살점을 지그시 누른다. 온기가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일까. 트렁크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몰랐다는 이유로, 예림은 고통에 몸부림쳤을 사슴의 눈빛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예림은 사슴이 되고 싶다. 그렇게 된다면 얽히고설킨 악몽 속 부조리는 너무나 명료해진다. 꿈속의 자신은 도로 위 피가 제 것이라 힘들여 주장하지 않아도 된다. 그저 가만히 누워있기만 해도 괜찮다. 누군가 현장을 발견하고 신고해 주기를 기다려도 좋다. 종국에 자신은 생활폐기물로 처리될 테니 영원히 깨어나지 않아도 된다. 악몽은 상몽이 되지 못할지언정 심상한 꿈이 되어 잊힐 것이다.


대문 안쪽에서 부모님의 대화가 들려온다. 예림은 거뭇한 피가 배어든 손을 감추고 마당에 들어선다. 엄마의 정원은 겨울바람에 생기가 한풀 꺾인 모습이지만, 적어도 예림의 기운을 북돋울 활기 정도는 남아있다. 중간고사가 끝날 때쯤 봉오리가 맺히던 장미, 여름 방학 내내 나희와 종종 살펴보았던 디기탈리스의 안쪽…. 까마득했던 정원의 일상과 꽃향기를 기억해 낸 예림은 가슴에 응어리처럼 남았던 의혹을 남김없이 내려놓는다. 예림은 기지개를 켠다. 더없이 산뜻한 밤하늘에 별이 가득하다.

“다행이야. 꿈이어서.”

언뜻 마당에 불길한 냄새가 퍼진다. 아빠가 어린 사슴의 사체를 들여놓은 게 분명하다.

끓어오르는 열에 예림은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 시계는 새벽 한 시를 가리키고 있었고, 여전히 나희가 빌려준 체육복을 입고 있는 채였다. 예림은 비척비척 책상으로 가 진통제를 삼켰다. 체육복을 벗어 팽개친 뒤 잠옷으로 갈아입고 도로 누웠다. 잠을 청했지만 꿈은 이어지지 않았다. 대신 새하얀 눈밭 가장자리에 자리한 등나무 벤치가 나타났다. 김세지가 서럽게 울고 있었다. 예쁘다고 할 수 없는 얼굴이었지만 계속 그를 지켜보는 일도 나쁘진 않았다. 일광에 금빛으로 물들어 땅 위를 덮었던 눈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투명한 눈물이었다. 눈에 파묻혔던 이정표가 선명하게 드러날 정도로.



[다음 화]

"아빠는 돌아가셨어요. 그러면 됐잖아요? 화풀이하고 싶으면 죽은 사람에게나 가서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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