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December 10 (2025)
뉴저지에서 Thanksgiving 연휴를 마치고 보스턴으로 돌아와서 하루하루를 참 무력하게 보냈다.
네이버 블로그가 아닌 새로운 플랫폼인 만큼 짤막한 배경을 이야기하자면, 본인은 올해 7월부터 미국 매사추세츠주 케임브리지에 위치한 매사추세츠 공과대학(MIT)에서 석사 과정을 밟고 있다.
사실 '케임브리지'라는 지명은 그리 인지도가 높지 않기에, 학교 사람이 아닌 사람을 만날 때에는 주로 케임브리지가 아닌 보스턴에 살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이곳 케임브리지는 참 고요한 도시이다. 찰스강이라는 아주 웅장한 강을 사이에 두고 강 너머의 번화한 도심과 반대편의 고요한 학교 타운이 서로를 마주 보는 형태다. 그리고 나는 이 강을 따라 두 개의 다른 다리를 건너 'ㅁ(미음)'자를 그리며 달리는 코스를 참 좋아한다. 영어로는 Charles River Esplanade라고 하는 달리기 코스이다.
러닝에 취미를 붙이게 된 지는 어느덧 만 1년 하고도 몇 개월이 지났다. 인생 첫 직장생활이 너무 팍팍하게 느껴져 무턱대고 집 앞 대공원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는데, 처음으로 눈으로 보는 스포츠가 아닌 내가 직접 하는 스포츠에서 흥미와 적성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뒤로 서울에서 열린 10km 대회에 몇 번 참가하면서 재미를 느꼈고, 보스턴으로 넘어온 뒤로도 여러 대회에 참가하고 있다.
글의 초반부에 올해 7월부터 석사 과정을 시작했다고 밝혔는데, 사실 보스턴 로건 국제공항으로의 입국은 그보다 보름 가까이 이른 6월 17일이었다. 이유는 오직 하나였다. 6월 22일 열릴 Boston 10K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서였다. 한국에서 MIT 합격 통보를 받자마자 며칠 뒤에 대회 신청 접수가 시작되었는데, 무언가에 홀린 듯이 접수를 해버렸다.
당시 일기장을 다시 읽어봤는데 꽤나 그럴듯한 마음가짐이었던 걸 확인했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커리어적인 노력도 중요하나, 그들의 커뮤니티와 문화에 잘 동화되고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것도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무조건 달리겠다고 적어 놓았다. 결과적으로는 정말 좋은 선택이었다. 비록 입국 5일 차 시차 적응이 완전히 되지 않은 채로 달려야 했지만, 목표했던 Sub 50 (50분 미만으로 10km를 달리는 행위)을 1분 남기고 달성했고 첫 단추를 잘 꿴 보람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 뒤로부터 이곳 케임브리지(혹은 보스턴)에서의 내 달리기 인생이 시작되었다.
서론이 무척 길었다.
최근에 보스턴에서 직장 생활을 하고 있는 고등학교 동창 녀석이 내게 귀하디 귀한 한글 책을 두 권 선물해 주었다. 그중 한 권이 바로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의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였다. 예전부터 정말 읽어보고 싶었던 책인데, 이 핑계 저 핑계 대다가 결국 읽지 않았던 책이다.
인간이 참 간사한 것이, 한국에 있을 때는 책은 거들 떠도 보지 않다가 해외에 살게 되니까 한글 책이 어찌나 그리운 지 모르겠다. 긍정적인 표현으로는 '해외에 사는 순기능'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겠다. 책을 마치 냉장고에 하나 남은 하드 아이스크림처럼 한 장 한 장 정성껏 아껴 읽게 되기 때문이다.
각설하고 하루키 작가와 그의 책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하자면, 하루키 작가는 본인과 겹치는 부분이 참 많아서 그의 글 스타일과는 별개로 굉장히 오랜 기간 좋아해 왔다. 특히 청춘 시절 현재의 나와 같이 케임브리지에 살면서 찰스강을 꾸준히 달렸고, 열혈 야구광이자, 재즈 뮤지션을 좋아하고, 글로 기록을 남기는 것을 즐겼다(아무렴 직업이 작가인데 당연하겠으나,)는 점에서 반갑게 느꼈다.
지난 며칠 동안 그의 책을 마무리하면서 많은 위로를 얻었고, 무너져 있던 일상에서 아침 일찍 일어나 달리기를 하며(그것이 영하 13도라 할지라도) 하루를 맞이할 원동력을 얻었다. 비단 달려야겠다는 원동력뿐만 아니라, 나도 내가 좋아하는 글쓰기를 보다 더 자주 편한 내 언어로 이어가야겠다는 확신을 얻을 수 있었다. 이는 내가 '브런치스토리'라는 새로운 플랫폼을 갑자기 찾아서, 일 년 전에 적어둔 단상 하나만을 가지고 대뜸 작가 신청까지 한 무모함의 연료가 되어주기도 하였다.
하루키 작가의 책을 읽으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뛰는 것도 정신이 없는데 어떻게 이 많은 생각들을 다 기억해서 글로 옮겼을까?' 사실 나도 생각이 정말 많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사람인만큼 달리는 중에도 끊임없이 생각을 하고 마구마구 펼쳐 나간다. 그런데 정작 다 달리고 나면 '이거 글감이다' 싶었던 소재들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고, 가장 마지막에 하던 잡생각만 덩그러니 머릿속에 남아 있을 때가 많다.
'하루키 씨는 당시에 누구와 함께 달리며 무엇을 느꼈는지 어떻게 다 자세하게 기록했을까?' '회고록인 만큼 중간중간 기억에 나지 않는 부분에는 조미료를 쳤을까?' 하는 생각들이 떠돌다가, 나는 하루키 씨만큼 암기력이 좋지 않으니 음성메모를 활용해 보자고 결심했다. 그래서 지난 화요일에는 MIT Run Club의 새벽 러닝 모임에 나가, 맨 뒤에서 음성메모를 작동시켜 두고 혼잣말로 머릿속 생각들을 읊었다. 방금 다시 들어보니 그 당시 기온이 무려 영하 13도였던 만큼 입술이 얼고 혀가 둔해져서 발음도 많이 샜다. 그럼에도 그날 혼자 녹음했던 머릿속 생각들을 이곳에 날 것 그대로 옮겨두려고 한다.
"인종, 피부색, 성별, 보폭 모든 게 다르다. 오직 하나 공통적인 것은 똑같이 영하 12도의 추위를 느낀다는 것과 똑같이 아침 일찍 일어나기 힘들었다는 사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 다 그 유혹과 겁을 이겨낸 사람들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눈동자를 보면 알 수 있다." (0:32)
32초짜리 첫 녹음은 이렇게 짧은 문장들로 구성되어 있다. 소리만 들어도 추울 정도로 바람이 쌩쌩 불고 주위에서는 온갖 영어와 스페인어 그리고 중국어가 섞인 배경음도 묻어 나온다. 글이 주는 전달력과는 또 다른 매력이 있다는 생각도 든다. 이 녹음을 하면서 내가 오래 기억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이겨내는 경험, 그리고 그 경험을 담은 눈동자(사실 눈빛을 말하고 싶었다).
"첫 3km는 매우 고통스럽다. 볼도 차갑고 손발은 마디마디가 시리다. 그도 그럴듯한 게 영하 12도다. 달리기를 시작하기 전에, 무라카미 하루키의 표현을 빌리자면-러너가 되기 전-나는 영하 1도만 넘어도 집 밖에서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쉽지 않은 결정이다. 매일 아침 일찍 수많은 유혹이 날 기다리고 있다. 특히 한국식 전기장판-이곳 말로는 매트리스 워머-라는 것을 침대에 부착한 이후로는 더더욱 아침에 나 자신과의 고된 싸움을 벌이고 있다." (1:06)
이 전날, 미국인 룸메이트로부터 '매트리스 워머'라는 표현을 배웠고 이 기억이 꽤나 강렬했던 모양이다. 꼭 덧붙이고 싶었던 것 같다.
"말을 하면서 달린 지 어느덧 24분이 지났다. 4km가 넘어가자 조금씩 여유가 생긴다. 볼은 더 이상 감각이 없고 손가락 마디마디도 그리 고통스럽지만은 않다. 보스턴에는 참 러너가 많다. 첫 4km를 달리며 앞을 향해 나아가던 중 이미 8마일쯤을 달리고 집을 향해 돌아가는 러너들을 많이 목격한다. 젠장. 그럼 도대체 몇 시에 일어났다는 말인가? 하지만 비교는 끝이 없다. 나는 그저 묵묵히 앞을 보며 달리기 시작한다." (1:58)
이번에 하루키 씨의 책을 읽으면서 달리는 순간을 회고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종종 현재 시제로 문장을 구사하는 것을 보면서 덩달아 같이 뛰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과거형이더라도 현재 시제로 문장을 구사하는 것이 멋있다는 생각을 한 채로 독백을 뱉다 보니 이런 표현을 계속 한 듯하다. 지금 보니 참 피구왕통키에나 나올 법한 대사 같고 부끄럽다.
"매사추세츠 주의 운전자들이 전체 50개 주 운전자들 가운데 가장 험악한 운전을 한다는 연구결과를 들은 적이 있다. 나는 한국에서는 운전자였고, 이곳에서는 러너에 가깝다. 대중교통만 타고 주로 두 발을 이용해 달리거나 걷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데도 이곳 매사추세츠 운전자들에게 어느 정도 공감을 해주고 싶다. 이 도시, 이 주, 결코 운전하기 쉬운 동네 아니다. 어찌 보면 험악해지는 것도 당연하다. 곳곳에서 러너들이 튀어나오고, 빨간 불 초록 불 가릴 것 없이 그저 직진이다. 또 러너들의 입장도 이해가 간다. 멈췄다 달렸다 멈췄다 달렸다 가는 것이 결코 러닝에... 몰입이 되지 않기 때문에 그저 달리는 것이다.
양쪽 모두의 입장을 이해하지만 오늘 나는 빨간 불에서도 몇 번 내 다리의 속도를 믿으며 무단횡단을 했다. 매사추세츠주 운전자들의 폭력성, 험악한 운전 하는 거에 안 좋은 영향을 미칠 것 같아 마음이 조금 무겁지만 어쩔 수 없다. 그나저나 속도가 맞는지 속력이 맞는지 매사추세츠 공과대학생으로서 약간 부끄럽지만 잘 모르겠다. 두 개념 중 하나가 하나의 절댓값 개념이라는 것만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4:29)
"이제 어느덧 4.8km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달리면 중간중간 떠오르는 단상들이 참 많은데, 그 모든 단상들이 다 뛰고 나면 휘리릭 사라져 버린다. 그래서 항상 아쉽다. '아 이거 글로 남겨놓고 싶다'하는 개념들이 달리는 중에는 생각이 났다가, 다 달리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렇게 메모장을, 아니 음성 메모장을 켜두고 달리면서 기록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속도를 5 미만으로 달리다 보면, 기차 소리가 들린다, 아무튼 다시 이어가자면, 속도를 5 미만으로 달리다 보면, 생각이란 걸 할 겨를이 없다. 잡념도 잘 안 떠오른다. 그런데 속도를 6'00 혹은 5'50 정도의 페이스로 맞춰놓고 서서히 달리다 보면 수많은 잡념들이 떠오른다. 그만큼 여유가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보통 심장 박동수는 150~160 사이를 왔다 갔다 한다.
음성 녹음에 찍혔을 지도 있지만, 방금 또 어떤 여자가 "On your left"라고 말하며 자전거를 타고 쌩 하고 지나간다. 이것이 매사추세츠다. 하던 이야기를 마저 하자면, 속도를 6'00보다 늦춰서 여유 있게 달리다 보면 잡생각이 많이 떠오르는데, 수많은 생각들, 예컨대 지나간 인연이라든지 현실에 대한 걱정, 무엇을 하고 먹고살면 좋을 것인지, 그리고 또 뜬금없는 낭만이나 꿈, 예컨대, 방금 예컨대를 두 번 말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 파리의 어느 대학교로 문학 박사 과정을 가서 불어를 5년 정도 깊이 있게 공부해서 세계의 모든 고전 문학들을 불어로 이해하고 싶다는 그런 뜬금없는 낭만 말이다. 이런 생각들을 하다가 어느덧 또 꿈에서 깬다. 무라카미 하루키 씨가 이야기했듯, 진정한 러너, 진정한 남자는 지나간 인연과 이미 낸 세금에 대해서는 왈가왈부하지 않는 것이 멋있는 것이다 하는 생각들이 떠오른다.
어느덧 5km를 넘은 지 한참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역시 무언가 다른 것에 집중하면서 걷다 보면, 아니 뛰다 보면, 거리를 잊게 된다. 돌아가는 길에 엄청난 업힐이 하나 보인다. 이날을 위해 인클라인 각도를 15도로 조정을 해놓고 빠른 걸음으로 걷거나 느린 걸음으로 달렸다. 이제 업힐이 힘들지 않겠지? 아니 똑같이 힘들다. 하지만 30분씩 매일 인클라인을 연습했다는 그 사실이 아무리 똑같이 힘들지만 또 그 언덕을 넘어설 수 있게 돕는다. 후..." (9:13)
이렇게 9분 13초짜리 긴 메모가 끝난 뒤 정상에 오를 때까지는 더 이상 녹음을 하지 않았다. 그러고 나서 2분 44초짜리 녹음을 하나 더 했는데, 눌러보기 전까지는 무슨 말을 했는지 정말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아 놀랐다. 불과 이틀 전의 이야기인데 말이다. 이래서 기록하는 습관이 참 중요한가 싶다.
"한계를 자주 넘어본 사람들에 대하여. 이곳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에서 운동을 하면서, 또 공부를 하면서 많은 것을 느낀다. 그중 하나는, 아 이곳 사람들 정말 취미마저도 한계를 뛰어넘는 사람이 참 많다. 사실, 취미에 가장 잘 어울리는 단어가 적당히다. 뭐든지 적당히 하면 취미가 되고 그것을 넘어서면 직업, 혹은 그 유사한 것이 된다. 그런데 내가 느끼는 것은 그 최고의 학교에 정말 취미마저도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을 정도로 열심히 노력한 사람이 참 많다는 것이다. 나와 함께 달리는 내 왼쪽의 Southern California에서 온 남학생은 이미 진작에 보스턴 마라톤의 Qualifier인 2시간 40분대를 뚫고 내년 보스턴 마라톤을 향해 묵묵히 준비를 하고 있다. 그 외에도 정말 풀마라톤 레코드를 Sub3 기록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단순히 러닝만의 일이 아니라, 뭐 예를 들어 피아노를 치는데 이미 피아노를 너무 잘 쳐서 직업에 준하는 수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있고, 물론 그 재능을 교회에서 피아노 봉사를 한다든지, 정말 아름답게 사용하는 모습도 보아왔다. 또 그 밖에도 악기를 정말 수준급으로 다룬다거나 본인의 한계를 뛰어넘은 사람에게서만이 나올 수 있는 그 수준의 퍼포먼스를 내는, 공부 외적인 Extracurricular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정말 많다. 이걸 보면서 느끼는 점은 이들이 단순히 이 정도 수준의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공부만의 끈질김이 아니라, 다른 모든 영역에서도 자신을 넘어보는 경험을 통해서 단단해진 것을 느낀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