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카페 Wi-Fi 비밀번호를 참 좋아해요.

Friday, Decmber 12 (2025)

by sw

"난 원체 무용한 것들을 좋아하오. 달, 별, 꽃, 바람, 웃음, 농담, 그런 것들..."


김은숙 작가의 모든 작품과 대사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미스터션샤인 속 저 대사는 가슴 깊이 남아 있다. 나 역시도 무용한 것들을 정말 좋아하기 때문이다. 두서없이 사소한 순간순간 좋아하는 것들을 기록에 남기곤 한다. 당장 지난 5분간만 하더라도 "그래, 내가 이것 참 좋아하지"하고 이야기하고 싶은 사소한 포인트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sangwonsohn.photography | All photos are my copyright.

먼저, 내가 지금 앉아서 이 글을 쓰고 있는 Flour bakery + cafe의 Wi-Fi 비밀번호를 좋아하게 되었다. 카페에 자리를 잡고 앉아 노트북 화면을 펼치면 항상 아차 싶다. 앉기 전에 Wi-Fi 비밀번호를 묻지 않았기 때문인 것이다. 늘 같은 실수를 반복하면서 오늘도 카페 점원에게 가서 "Can I trouble you for the Wi-Fi password?" 하고 묻는다. 팁도 넉넉히 눌렀으니 이 정도 물어볼 순 있다는 속마음을 품고 말이다. 돌아오는 답변은 아래와 같다.


"flourlovesyou"


성질 급한 한국인답게 대답을 듣자마자 감사 인사를 하고 황급히 자리를 향하는데, "all lowercase, one word!" 하고 덧붙이는 소리가 들린다.

소심하게 마음으로만 대답한다. "iloveflourtoo, all lowercase, one word." 지금 당장 누군가가 내게 무엇을 좋아하냐고 묻는다면, "이 카페 Wi-Fi 비밀번호를 참 좋아해요."하고 답할 것이다. (문단에 큰 따옴표가 자주 등장해서 말인데, 큰 따옴표 안의 문장이 완결된다면 마침표(.)는 따옴표("") 안에 들어가는 것이 옳다.)


조금 더 풀어서 이야기하면, 이런 위트와 감각, 그리고 사소한 단어 하나로 상대를 미소 짓게 할 수 있는 섬세함이 좋다. 여느 카페나 레스토랑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abcd1234'나 '12345678a' 따위가 아니라서 좋다. 내게 가져다준 긍정의 효용만으로 이야기하면 디카페인 아메리카노 한 잔보다 오히려 이 와이파이 비밀번호 하나가 더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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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로는, 내 맞은편에 앉아 빵을 작은 지우개만 한 크기로 조각내어 수프에 담가 먹는 왼손잡이 할머니의 우아함이 좋다. 노트북 거치대가 있는 것도 아니고, 워낙 눈동자의 움직임이 산만한 편이라 맞은편이 공석인 자리를 찾아 앉는 편이다. 그렇다, 내가 먼저 와 있었다는 걸 길게 풀어 말했다.

이내 한 할머니가 맞은편 자리에 앉으셨는데, 당신의 테이블에 카페에서 제공한 오늘자 "The Boston Globe", "The New York Times", "The Wall Street Journal" 따위의 종이 신문들이 뭉터기로 쌓여 있다. 점원이 다가와 "신문을 치워드릴까요?"하고 묻는다. 그러자 할머니께서 싱긋 웃으면서 내가 읽겠다고 두고 가라고 하신다.


그녀가 가장 먼저 고른 신문은 "The Boston Globe"가 아닌 "The New York Times"였다. 이 글을 쓰면서 그녀의 신문을 유심히 관찰하다가 이내 내 수상한 행동을 들키고 말았다. "신문을 읽고 싶니? 내 뉴욕 타임스를 마저 읽겠니?" 하고 물어보셔서 황급히 나는 신문을 읽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신문을 읽는 모습이 멋있다고,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신문은 어느 신문사의 것이냐고 질문했다. "음... 아마 지금 읽고 있는 뉴욕 타임스 아닐까? 그나저나 이 카페의 신문 셀렉션이 참 재밌구나. 보스턴 글로브와 뉴욕 타임스, 월스트리트 저널이라니."


그렇게 멋진 답변을 남기시고는 다시 돋보기안경을 코에 걸친 뒤 수프 왼쪽에 놓인 사설을 마저 읽으신다. 종종 수프 접시의 왼쪽에 놓아둔 스푼을 꺼내 빵조각을 휘휘 저어 드신다. 동네 카페에 놓인 지역 신문, 코에 간신히 걸린 돋보기안경, 작은 지우개 모양 빵조각이 담긴 수프 아침 식사, 맞은편 손자 뻘 대학원생과의 짧은 스몰토크까지. 느리지만 우아하고 기품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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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감정은 2023년 1월 9일, 런던의 Kensington Gardens에서 느껴본 적이 있다. 2022년 가을학기 런던에서 교환학생으로 한 학기를 마무리하며, 가장 좋아하던 공원에서 마지막 오후를 보내기로 했다. 한겨울에 얄팍한 홑겹의 코트 한 벌을 걸친 한 할아버지를 보았다. 오후 세시쯤 가든 테이블 의자에 앉아 켄싱턴 가든의 호수에 담긴 윤슬을 바라보며, 시가를 태우고 계셨다. 테이블에는 글라스로 주문한 레드와인 한 잔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날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씨가, 레드와인, 그리고 윤슬. 이런 데서 이렇게 늙고 싶다."라고 적었을 만큼 우아하고 멋있었다. (하지만 나는 비흡연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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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로는 머릿속에 소복소복 쌓이는 잡식을 좋아한다. 아까 할머니께서 내게 "이 카페의 셀렉션이 참 재밌구나" 하셨을 때, 나는 미국의 각 신문사가 어떤 정치적, 경제적 성향의 글을 기고하는지 잘 몰라서 그냥 미소로 대답했다. 왜 재밌다고 하셨는지 너무나도 궁금해서 하던 공부를 접고 각 신문마다의 특징을 Gemini에 물어보고 나서야, 그녀가 참 재밌다고 한 까닭을 추측할 수 있게 되었다.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성향을 띤 신문과 진보적인 성향을 띤 신문이 공존하고, 지역 라이벌인 보스턴과 뉴욕의 지역 신문이 공존해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었다. 이런 문화적 맥락과 배경지식, 어찌 보면 별 것 아닐 수 있는데 이런 사소한 것들이 머릿속에 소복소복 쌓이는 기분이 참 좋다.


고등학생 때 국어 교과를 가르친 선생님을 동경했다. 문학을 가르칠 때도, 독서와 작문을 가르칠 때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주제가 나오든 간에 툭 찌르면 마치 작금의 Chat GPT 혹은 Gemini와 같이 본인의 경험이나 배경지식을 마구 설명해 주셨다. 말이 정말 많은 분이셔서 늘 수업의 진도가 늦어지고 중간고사보다 기말고사의 범위가 현저히 많아지는 단점이 있었지만, 그 이야기들을 듣는 게 참 재밌고 좋았다.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신 있게 대화할 수 있는 그 지식과 경험 창고가 부러웠다. 그러고 보면, 어릴 때부터 지적 허영심이 좀 있는 편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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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국어 선생님께 "어떻게 하면 그렇게 아는 게 많아질 수 있나요?"하고 질문했던 적이 있다. 그러자 선생님께서 웃으면서 당신의 지식은 딱 5분이면 동이 난다며, 매번 수능과 모의고사 지문에 등장하는 다양한 주제의 글을 읽으면서 '잡식'이 쌓인 것일 뿐이라고 하셨다. 그 '5분의 잡식'이 좋았다. 대학에 가서도 늘 그 '5분의 잡식'을 기억하고 따라 하려고 했다. Chat GPT가 등장하기 전부터도 모르는 게 생기면, 궁금한 게 생기면 닥치는 대로 구글에 검색하거나 관련 책을 뒤져보기 일쑤였다. 그렇게 나도 '2분의 잡식' 정도가 생겨났다고 생각한다. 오늘 배운 미국 신문사들의 특징에 대한 간단한 정보도 이제 0.1초 정도의 분량으로 머릿속에 축적되겠지. 이렇게 새로운 정보를 재미있게 접할 수 있는 낯선 환경이 나는 좋다.


-끝-